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11화 (12/67)

[11화]

태영은 출석부를 보는 녀석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녀석의 눈치를 흘끔 보던 태영이 고개를 내밀어 출석부를 들여다봤고, 녀석의 시선이 정확히 송바위 이름 석 자에 꽂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송바위는 왜?”

태영이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바로 반응했다.

“아는 애야?”

“같은 반이니까 당연히 알지.”

“근데 얜 왜 사진이 없어?”

“여자애들이 맨날 훔쳐 가니까. 벌써 다섯 번짼가 그럴걸?”

“사진을 훔쳐 가? 왜?”

“인정하긴 싫지만 걔가 울 학교에서 얼굴로 2등이거든.”

“1등은 누군데?”

“인정하긴 싫지만…….”

태영이 손가락으로 녀석을 가리켰다. 그 순간 태영은 보았다. 녀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어쭈? 이 녀석 지금 웃은 거야? 어라? 이건 기회다! 녀석이 기분 좋을 때 말하자.

태영이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근데 너 집에 언제 갈 거야? 요 앞 사거리에 사진관 있는데…….”

“어쩌라고.”

곧장 날아든 녀석의 정색에 태영은 김이 팍 샜다. 이젠 비굴 모드로 바꿔야 할 때다.

“가는 길에 사진 좀 찍고 가면 안 될까? 시간 얼마 안 걸려. 사진 바로 나온다니까. 제발 나 좀 도와주라. 나 진짜 벌점 꽉 찼다구.”

“됐고. 이거나 도로 갖다 놔.”

녀석은 출석부를 태영에게 안겼다. 그러곤 태영의 어깨를 툭 밀었다. 비상구 문까지 밀려난 태영이 녀석을 흘겨봤다. 이젠 막무가내 모드다.

“그럼 이따 30분 후에 보자.”

“뭐래.”

“나 사거리 편의점 앞에 있을게. 너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안 오기만 해 봐. 너 기억 상실증 걸린 거 학교 게시판에 올려 버릴 거야!”

할 말을 끝낸 태영은 녀석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후다닥 옥상을 나가 버렸다.

태영이 옥상을 나가 버리자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다시 핸드폰을 꺼내 출석부 사진을 들여다봤다.

녀석이 이번에 확대해서 본 사진은 단정한 교복 차림의 여자애였다.

사진 밑엔 ‘권수아’라고 적혀 있었다.

“거슬려…….”

사진을 응시하던 녀석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까 옥상에서도 그렇고 영 느낌이 이상했다. 께름칙하고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

녀석이 돌연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까 아팠던 심장이 다시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역시 권수아라는 여자애 때문인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으니까.

“후우…….”

녀석은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가방에서 약통을 꺼냈다.

물도 없이 약을 삼킨 녀석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한참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다.

* * *

“진짜 안 오는 건가?”

30분은커녕 한 시간이나 훌쩍 지났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녀석은 안 올 모양이다.

편의점 파라솔 밑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푹푹 퍼먹으며 태영은 구시렁거렸다.

이 와중에 아이스크림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건지. 저녁 먹을 때가 돼서 그런가? 이럴 줄 알았으면 해니랑 떡볶이나 먹으러 갈걸.

“으, 내 팔자.”

신세 한탄을 하며 태영은 어느새 바닥까지 다 긁어 먹은 아이스크림 통을 아쉽게 쳐다봤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며 학교 쪽을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교복 입은 애들이 몇몇은 보였는데 이젠 거의 안 보인다. 아니, 아예 안 보인다.

태영은 플라스틱 숟가락을 입에 문 채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유일반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말았다.

“아니야. 전화해서 물으면 안 온다고 할 게 뻔하잖아. 전화 걸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그냥 기다리는 거야. 지가 사람이면 못 온다고 연락을 하든가, 그게 아니면 오겠지 뭐. 아무리 기억 상실증에 걸렸어도 본성이 그렇게 착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였는데 설마…….”

아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댔다. 오늘의 유일반은 못 온다는 연락은커녕 그냥 쌩까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그래, 본성이고 나발이고 오늘 그 녀석은 기억뿐 아니라 타고난 본성까지 몽땅 지워진 게 분명해. 근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기억만 잃은 건데 왜 성격까지 바뀐 거지? 보통 드라마에선 안 그러던데. 게다가 기억을 잃었는데 학교는 어떻게 찾아온 건데? 아까 옥상에서도 그래, 문에 부딪힌 건 이만데 왜 머리가 아니라 심장을 부여잡아?

“으, 몰라!”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라 태영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러다 저도 기억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느덧 하늘은 어둑어둑해졌고, 태영은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망했네, 망했어. 오늘 사진 안 찍으면 내일까지 제출 못 하는데. 그럼 나 벌점……. 아오!”

태영은 발을 동동거리며 테이블 위에 철퍼덕 엎드렸다.

오늘따라 하루가 왜 이렇게 긴 건지. 나야말로 자고 일어나면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이 다 몽땅 사라져 버렸음 좋겠네. 전부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너 요새 자주 본다?”

“?”

낯선 이의 목소리에 태영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제 앞에는 또 그놈들이 서 있었다.

현 원진남고 일진. 구 세원중 동창.

태영이 질색하는 얼굴로 원진남고 무리를 쳐다봤다. 그중엔 저번에 유일반의 명찰만 보고 도망갔던 험악남도 당연히 있었다. 험악남은 주변을 살피더니 비아냥거렸다.

“오늘은 지켜 줄 남자가 없나 봐? 중학교 땐 송바위 뒤에 맨날 숨어 다니더니.”

“그러는 넌 송바위 앞에선 입도 벙긋 못 한 주제에!”

“닥쳐 미친년아. 난 여자라고 안 봐줘.”

그러든가 말든가. 태영은 이럴 땐 무시하는 게 상책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서둘러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고 몸을 틀었는데.

쾅!

“윽!”

험악남이 태영의 가방을 붙잡아 다시 자리에 앉히려다 의자가 쓰러지면서 태영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딜 도망가. 우리 저번에 하던 얘기 마저 해야지.”

“난 할 얘기 없는데?”

태영이 까진 무릎을 문지르며 힘겹게 일어나려고 했는데, 또다시 험악남의 발이 날아왔다.

“꺅!”

태영이 본능적으로 양팔로 머리를 가린 채 움츠렸다. 그런데.

퍽!

“으악!”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태영은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 옆엔 험악남이 날아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든 태영은 험악남을 발로 찬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했다.

“!”

유일반이었다.

녀석은 태영의 무릎이 까져 피가 나는 것을 보더니 굉장히 살벌한 얼굴로 험악남의 어깨를 발로 짓이겼다.

“으아악! 씨발, 너 뭐야!”

험악남이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녀석의 힘을 당해 낼 순 없었다.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파 죽겠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험악남의 어깨를 더 세게 발로 밟았다. 그러곤 태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어? 어…….”

얼떨결에 녀석의 손을 잡고 일어난 태영은 또 얼떨결에 녀석의 손에 이끌려 녀석의 등 뒤에 서게 됐다.

얘 뭐야? 설마 나 보호해 주는 거야?

두근두근. 태영은 녀석의 커다랗고 안전한 등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녀석이 잡은 제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떡해. 나 손에서 땀 폭발할 것 같아. 아니야, 그것보다 더 엄청난 문제가 생겼어.

나 왜 이 녀석 멋있어 보이지? 박력 쩔어. 어뜩해.

태영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태영은 가로등 불빛에 비친 녀석의 옆모습을 흘끔 훔쳐봤다.

베일 듯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 세상에, 어제보다 더 잘생겨졌잖아. 내 눈이 이상해진 건가?

태영은 눈을 마구 비볐다. 하지만 다시 봐도 녀석의 외모는 어제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잘생겨 보였다.

녀석이 잘생겨 보일수록 태영의 가슴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 그만하라고오! 너 대체 누군데 이래! 아악! 악!”

“닥쳐. 어깨 박살 내기 전에.”

“!”

태영이 녀석의 외모를 감상하고 있던 중에도 험악남은 녀석에게 어깨를 밟히고 있었다.

그나저나 험악남은 지금 제 어깨를 밟고 있는 녀석이 저번에 봤던 유일반이라곤 전혀 눈치 못 챈 모양이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저번에 그 유일반은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고 차분하게 말하며 명찰을 보여 줬으니까.

아마 지금의 이 무서운 녀석과 저번에 본 차분하고 젠틀한 인물이 동일인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태영은 여전히 서늘한 눈빛을 한 녀석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1년 동안 유일반이 누군가와 싸웠다는 얘긴 들어 보지도 못했는데. 그렇다면 녀석의 이 폭력성은 원래 잠재되어 있었던 걸까?

하지만 기억을 잃으면서 발현된 거라고 하기엔 저번과 오늘이 너무 다른데…….

그렇게 태영의 의구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 * *

찰칵. 찰칵. 찰칵.

“다 됐습니다.”

촬영실 안에서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끝났구나. 하지만 태영은 괜히 더 불안했다. 녀석이 아무 말 없이 사진관까지 순순히 따라왔기 때문이다.

사진 찍어 주는 대신 나한테 또 이상한 거 뭐 훔쳐 오라고 시키는 건 아니겠지?

불안에 떨던 태영은 마침 촬영실에서 사장님이 나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나저나 남자 친구가 영 얼굴을 못 쓰네?”

“네?”

“저 얼굴로 웃으면 얼마나 예쁘겠어. 근데 그렇게 웃으래도 절대 안 웃더라니까. 암튼 한 시간 뒤에 찾으러 와요.”

“네!”

태영은 마침 촬영실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오는 녀석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녀석은 말도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갔다.

역시 밖으로 나온 태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와!”

벚꽃이 만개한 나무에 봄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벚꽃 잎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예쁘다…….”

살랑살랑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발견한 태영이 깡충 뛰어 꽃잎을 양손으로 잡았다. 무릎에선 피가 질질 흐르는데, 대체 뭐가 좋다고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지. 녀석은 태영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어?”

“기다리라고. 가만히.”

“응.”

태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갑자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녀석이 다시 나타나 뭔가를 내밀었다.

“붙여.”

녀석이 내민 것은 소독약과 밴드였다. 태영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고 녀석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앞으로 집에 갈 때 나랑 같이 가.”

“어?”

“기억 찾을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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