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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62화 (완결) (162/162)
  • 162화

    “아.”

    크루엘로는 놀란 듯했다.

    그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으나, 공연이 너무 시끄러운 탓에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는 척 뻔뻔스럽게 굴려고 했는데, 그 순간의 불꽃이 마지막이었는지 삽시간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으…….”

    하필.

    갑작스럽게 찾아든 적막에 귀가 먹먹하다.

    그러나 크루엘로는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내…… 가 뭐라고 했어?”

    나날이 바보 같은 어록을 갱신하는군.

    차라리 크루엘로가 웃음을 터뜨리면 좋았겠지만, 그는 눈가를 찡그릴 뿐이다.

    그 모습이 몹시도 애가 달아 보였다.

    “라스티.”

    수도 없이 들어 온 이름인데도 그 울림이 낯설었다.

    재촉하는 듯한 눈을 마주하고도 통 입이 열리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뱉었다.

    “사랑해, 라스티.”

    “……제발 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아.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 감각을 쌓아 올려 나를 견딜 수 없게 하려는 듯, 크루엘로는 몇 번이나 더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그러나 그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말하는 게 아니다.

    같은 감정을 돌려받고 싶어서, 내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는 억눌린 숨을 토했다.

    목구멍부터 몸 안 전체를 솜털로 문지르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이 간지럽다.

    차라리 다시 불꽃이 터져 주면 좋을 텐데, 숨을 곳이 있으면 괜찮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게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나는 쥐어짜 내듯이 말을 밀어냈다.

    “사랑…… 해, 크루엘로.”

    진짜 미치겠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지?

    내 목소리로 내뱉는 말인데 왜 이렇게 견딜 수가 없는 걸까.

    참을 수 없어서, 무언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덧붙이려 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곧,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내뱉은 말 때문인지, 귓속에 쌓인 마음 때문인지.

    내가 해 본 중 가장 단 입맞춤이었다.

    ***

    약혼이나 혼인식은 보통 신의 손길이 닿은 공간에서 치른다.

    예배당이나 자그만 신전 같은 신성한 장소에서 의식을 행해야 두 사람의 혼이 제대로 맺어졌다고 믿는 것이다.

    보통은 그러한 관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마련이지만, 나처럼 다른 신을 믿는 경우엔 조금 껄끄러운 문제가 되었다.

    “정말 괜찮겠어?”

    크루엘로에게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젓기만 하면, 그는 어떤 말이 나오든 장소를 바꿨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신을 거부했느니 어쩌니, 말 나오면 피곤해져. 이젠 평판 좀 바꿔 보자, 자기야.”

    “그런다고 바뀔 평판이 아닌데.”

    “사람 잘 만나서 변했다, 소리 정도는 노려볼 만하잖아.”

    “…….”

    “그리고 나도 이제 아프면 여기 신전에서 치료받아야 하는 몸이야. 사이 틀어지면 골치 아프다?”

    결국, 크루엘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가 그를 설득하는 그림이 된 건지.

    그리하여 내가 오늘 혼례복을 갖추고 들어선 곳은 수도의 대신전이었다.

    정체를 감추고 남의 신전에서 결혼하는 기분이란, 꼭 다른 영역을 침범한 것 같은 배덕감이…….

    “큼큼.”

    아무 말도 안 했다.

    생각은 죄가 될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슬쩍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하객은 질리도록 많았으나, 약혼식을 치를 때 경험했다고 조금은 익숙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남 일 같기도 했다.

    나는 ‘라스티’의 손님만 만나면 됐는데, 호적이 생긴 지도 얼마 안 된 판에 만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끽해야 데이디어─여전히 줄리안의 일로 심란해 보였다.─라든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가보트라든가.

    “이 결혼 다시 생각해.”

    “한참 늦었어, 바티.”

    “미뉴엣!”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미뉴엣이 차갑게 대답했다.

    가보트는 짜증이 나는 정도를 넘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이러기냐? 공작이 어떤 인간인지 그렇게 잘 알면서?”

    “바티, 라스티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잖아. 패배를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피아니시모가 뭘 보고 배우겠어?”

    “냉정해서 좋겠다, 젠장.”

    피아니시모가 배울 게 아니라 가보트를 가르쳐야 할 것 같은데.

    가보트를 위해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는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고맙기도 하고, 이런 게 동생 키우는 맛인가 싶기도 하고.

    “잘 살아라, 라스티.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려 놓고 못 살기만 해. 아니지, 그렇다고 그 자식이 못되게 굴면 입 다물지 말고 당장 얘기해.”

    “얘기하면 어떻게 되는데?”

    “뭘 어떻게 돼, 이혼하는 거지!”

    “우와, 결혼식 당일에 저주하는 거야?”

    무섭다, 무서워.

    호들갑스럽게 어깨를 떨자, 가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식이 시작될 시간이 가까워졌기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가보트의 어깨에서 타이밍을 살피던 피아니시모가 조그만 날개를 펴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내게 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귀엽긴.

    “나 주는 거야? 고마워.”

    뺙뺙!

    볍씨는 으레 그렇듯 가슴 털을 부풀리며 자랑스러워하다가, 보네티 남매와 함께 대기실을 나섰다.

    그러고 나자 장내는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더 올 사람 없나?

    괜히 쓸쓸해져 뱁새가 준 꽃을 매만지며 손으로 꼽아 보았다.

    데이디어는 다녀갔고, 백작 부인도 만났고, 요즘 조금 친해질락 말락 하는 도리 운드도 들렀고 결혼하지 말라는 연서 편지들도 다 불태웠고…….

    “음.”

    손가락이 한참은 남았다.

    이젠 사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라스티가 된 지도 거의 반년째인데 인간관계가 이 모양이라니.

    “너무 크루엘로랑만 놀았나?”

    “앞으로도 그러려고 청혼을 받아 준 거 아니었어?”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온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평소에도 차림이 그리 단정한 타입은 아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해 보이는 옷과 그 이상으로 눈에 띄는 얼굴.

    크루엘로다.

    “안녕, 달링.”

    확실히 달라.

    감정이 실린 ‘달링’은 느끼하다.

    쓰지 말라니까 내가 싫어하는 표정을 보려고, 부득부득 쓰는 저 모습을 봐라.

    통 말을 듣지 않아 진작에 포기했지만, 역시 크루엘로의 사랑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이럴 땐 넋을 놓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야지.”

    “넋이라면 놨는데. 말로 표현하길 바라?”

    “아니야, 크루엘로. 이런 날에는 무조건 말을 조심하고 칭찬을 아껴야 한다는 풍습이 있어.”

    “어디에 있는데?”

    “내 신전.”

    확인 못 할 출처를 들이밀자, 그는 또 웃었다.

    크루엘로가 내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계속 웃네. 그렇게 좋아?”

    “응, 이날만을 기다렸거든.”

    “농담에는 농담으로 받아 달라고 했지.”

    “진심이니까 괜찮잖아, 라스티.”

    아무튼, 할 말 없게 하지.

    나도 이런 주제를 좀 더 능청스럽게 넘길 수 있게 되면 좋을 테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여서 나는 그냥 화제를 돌렸다.

    “아까 데이디어가 말해 줬는데, 대신전에 웬 이상한 종이 있다고 하던데?”

    “그란디에의 성물이야.”

    “엥, 사랑의 신?”

    “나이젤리아의 수집품 중 하나인데 빌려 왔어. 고대 신의 성물 중 드물게도 기적이 알려져 있거든.”

    “설마 그걸 울리면 사랑이 영원히 이어진다, 뭐, 그런 류야?”

    “비슷한데 좀 달라. 결혼식 날 종이 울리면, 사랑이 영원히 이어진다?”

    “신이 죽은 마당에 성물이 울릴 리가─.”

    “하하.”

    인위적으로 종을 울릴 생각이군.

    어차피 인간이 울릴 거면 성물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일까 싶었지만, 굳이 초를 치지는 않았다.

    그런 꿍꿍이를 품은 크루엘로가 들뜬 뱁새 같아서 귀여웠으니까.

    비록 그런 수식어를 붙이기에 그는 키도 덩치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감정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거부했다.

    점점 귀엽다는 감상이 잦아지는 것 같은데 이런 게 콩깍지인가?

    하지만 그가 마냥 귀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크루엘로가 그런 종을 가져온 이유의 일부를 알 것도 같았기에.

    “내가 도망갈까 봐 불안해?”

    “응.”

    “우와, 즉답하는 거 봐.”

    “하지만 아니.”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뜨고 크루엘로를 흘겨보자, 그는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너를 믿어, 라스티.”

    여유로운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말에 담긴 건 진실한 믿음보다는, 믿고 싶다는 바람에 가까웠다.

    그래, 크루엘로의 신뢰는 아직 얕았다.

    내가 해 온 일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러면서도 그의 믿음이 조금씩은 두터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혀 믿지 않았다면 그는 그 흔적조차 드러내지 않았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 나아진다면 그걸로 족하다.

    누누이 말했듯, 내겐 이제 시간이 많았다.

    “그래.”

    나는 크루엘로의 거짓말을 모르는 척 웃어 주었다.

    예식이 시작되었다.

    절차는 약혼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집중하지 않아서 큰 차이를 놓친 걸 수도 있겠지만.

    의식을 주관해 준 건, 대신전을 담당하는 대신관이었다.

    나는 거의 영혼을 빼 놓은 채로 그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서약서를 읊으면서도 솔직히는 이걸로 뭐가 달라진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귀족들이 사랑 없이 혼약을 맺으면서도, 보여 주기식으로 의식이 거창한 이유가 뭔지.

    함께 사는 것과 결혼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머리로는 알더라도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결혼하기로 한 건, 순전히 크루엘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내가 평생 그의 곁에 있을 건 확실한 일이었으니까.

    미뉴엣은, 그런 게 결혼이라고 했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하는 거라고.

    정확히는 계약이라고 칭했으나 어쨌든 그 애의 말은 내 싱숭생숭한 마음을 단번에 진정시켰다.

    “신성한 이름으로 두 사람이 부부로 맺어졌음을 선언합니다. 두 분은 맹세의 입맞춤으로 사랑의 맹약을 마무리하십시오.”

    맹세의 입맞춤이라니, 옛날 생각 나네.

    나는 픽 웃으며 시오라 보네티의 약혼식을 떠올렸다.

    큐딜을 잡다가 끄트머리에서야 겨우겨우 더미와 바꿔치기했던, 그 요란한 날.

    실수해 크루엘로의 입에 입술을 갖다 댔다가 당황해 허둥거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깟 입맞춤이 뭐라고 그리 놀랐는지 모르겠다.

    결혼식은 분명히 입술이었지?

    나는 다가오는 크루엘로를 보고 눈을 감으려 했다.

    그때 뎅!

    “뭐, 뭐야?”

    종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그란디에가 우릴 축복해 주고 싶은가 보네.”

    크루엘로의 능청스러운 말에, 나는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하객들 사이에서 잠시 일었던 소란도 ‘화이트데저트 공작’의 결혼식이라는 걸 상기한 순간 확 사그라들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속닥거리는 소리들이 귀에 들어온다.

    또라이 공작이 단단히 미쳤다느니, 이건 신성 모독이 아니냐느니, 신부가 황당하다는 표정인데 상의도 없이 일을 벌여도 괜찮냐느니, 기타 등등.

    정말 한결같이 평판이 나쁘군.

    그 와중에 크루엘로 혼자만 진심인 게 또 귀엽다면 중증인가?

    “고대신을 관음증 변태로 만들지 마.”

    “뭐?”

    나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그의 양 뺨을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의식 자체에 회의감을 느낀 것과는 별개로 그 순간의 입맞춤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크루엘로와 내가 하나로 연결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

    우연인지, 크루엘로가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종은 딱 열두 번 울려 퍼졌다.

    그건 마법이 풀리고 마리오네트가 관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에 있다.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기로 한 건, 누군가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두 사람의 의지였으니까.

    두 개의 길은 어딘가에서 만나 하나로 이어질 것이다.

    정해진 이야기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끝내 그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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