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61화 (161/162)
  • 161화

    “레카논 공연은 단속될 만했네.”

    그건 아주 합당한 조치였다.

    내 쪽을 돌아보는 크루엘로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수확제의 수준을 떨어뜨리잖아.”

    그가 가벼이 웃었다.

    “3대 황제 이야기야.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마리오네트라고 조롱당했지.”

    “비화 한번 살벌하다.”

    “제국민들한테는 인기가 좋은 군주였지. 황제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이런 공연까지 만들 만큼.”

    “그런 내용을 여기서 공연해? 수확제 주관하는 거 황실 아니야?”

    “아무렴, 벌써 수백 년이 지났는데.”

    하기야 맞는 말이다.

    단일 황실이라고 한들 그 정도로 오래되면 설화나 다름없다.

    공연의 유래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고.

    그토록 오랫동안 공연이 전승된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에덴보다도 어리지만.”

    “갑자기 엊그제 일처럼 느껴지잖아, 크루엘로.”

    인형극을 보는 동안 해는 완전히 저물었다.

    사위가 캄캄해진 시간대에 남아 있는 즐길 거리는 하나뿐.

    드디어 보는구나, 이 지긋지긋한 불꽃놀이!

    에이미일 적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어 있을 때 콧잔등에 무언가 축축한 것이 떨어졌다.

    “어.”

    고개를 젖히자 심상치 않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맞은 건 아직 한 방울뿐이었으나 보이는 곳 전부가 비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우려하던 일이 터졌군.

    “비 오겠는데.”

    “비가 오더라도 취소되지는 않을 거야. 어차피 마법으로 하는 공연…….”

    크루엘로가 말끝을 흐렸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 둘이,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림새로 보아 공연을 담당하는 마법사들인 듯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비가 오네. 이거 원, 불꽃이 제대로 보이기나 할는지.”

    “그래도 물 닿는다고 꺼지는 건 아니니 어찌어찌 해 봐야죠.”

    “오늘 성과에 연구비가 달렸는데. 젠장.”

    “네에? 축제 공연을 보고 연구비를 책정한다고요?”

    “예산이 아니라 일시 후원 말이야, 인마!”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곁을 지나 사라진다.

    크루엘로의 말도 그렇고 그 대화도 그렇고, 공연이 취소될 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크루엘로가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던 때, 나는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로이. 나 피칸파이와 페일에일이 먹고 싶어졌어.”

    “갑자기?”

    “사 줘.”

    무슨 꿍꿍이냐고 물어보듯이 크루엘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으나 이번만큼은 그도 독심술에 성공하지 못했다.

    수행인을 데려오지 않은 터라 그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조금 기다려.”

    아닌 밤중에 파이와 맥주를 구하기 위해, 크루엘로가 몸을 돌렸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잽싸게 걸음을 움직였다.

    성력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예민한 감각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사람들의 기척을 피해 힘껏 달렸다.

    다행스럽게도, 불꽃놀이 때문에 대부분의 인파가 빠져 있어서 머잖아 마땅한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형편없는 꼴을 구경할 순 없어.”

    기척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아직까지는 생소하게 울리는 그 이름을.

    “브릴란테, 조용히 나와. 조용히.”

    부드러운 실타래를 풀어내듯 바람은 조심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간을 열고 나온 이가 작게 울었다.

    후드가 벗겨지고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린다.

    그러나 그 은밀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왜 깃털에서 빛이 나? 불 꺼! 얼른 꺼!”

    주변 사람을 다 끌어모을 듯 찬란하던 청록빛이 사그라들었다.

    몇 번 더 재촉한 끝에 반딧불이보다도 옅어진 새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게까지 애썼음에도, 빈말로도 눈에 안 띈다는 소리는 못 하겠다.

    일단은 덩치가 어지간한 방만큼 컸고 말도 못 하게 예뻤으니까.

    수확제에 오기 직전 계약을 마친 나의 정령, 나의 새.

    불러낸 순간, 자연스럽게 알게 된 이름은 브릴란테였다.

    깃털은 내 눈동자와도 같은 청록빛이었는데 발광석이라도 잘못 삼켰는지 온몸에서 빛이 나는 거대한 맹금류, 정확히는 천둥새였다.

    쌀쌀맞게 굴지 말라는 듯, 브릴란테가 작게 울었다.

    우아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퍽 사랑스러운 울음소리였으나, 지금은 홀려 줄 여유가 없었다.

    “너, 날씨 바꿀 줄 알지?”

    아무렴, 천둥새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날씨조차 못 바꾸는 건 말이 안 되지.

    브릴란테가 자신만만하게 가슴 털을 부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피아니시모 같군.

    “다른 사람한테 모습을 들키면 안 돼. 보네티에서 말 나오는 날엔,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비장하게 내뱉자, 새는 덩달아 비장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할 말이 다 끝났음에도 천둥새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새가 뭘 바라는지가 전해졌다.

    하는 수 없이 부리에 입을 맞추어 주자 브릴란테는 재차 사랑스럽게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덩치, 아름다운 외관과 달리 새의 존재감은 공기에 녹아들 듯이 흐렸다.

    그것까지 포함하여 꼭 환상을 보고 있는 듯했다.

    브릴란테가 어디쯤 있을까.

    고개를 꺾고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해 보는데 천천히 먹구름이 가시기 시작했다.

    밤인지라 하늘과 구름의 경계가 불분명했음에도, 구름이 개며 하늘이 맑아지는 모습은 정말로.

    “멋지네.”

    “그렇지? 바깥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 새가…….”

    신나서 동조하다가 나는 말끝을 흐렸다.

    바로 옆자리에,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보였다.

    하늘색 머리칼의 사내는 나긋하게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이름이 브릴란테야?”

    “…….”

    “내가 보네티에 사람 붙인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놀라?”

    “……정령을 부르는 순간에도 목격했어?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아니, 어떤 정령을 불렀는지는 몰랐는데 알게 됐네, 지금.”

    목소리에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당황해서 할 말을 고르다가 더듬더듬 혀를 움직였다.

    “파이랑 맥주, 사 주기로 했잖아.”

    “응, 여기.”

    크루엘로는 보란 듯이 먹거리를 내밀었다.

    도대체 무슨 재주로 그 짧은 새 이걸 준비했단 말인가.

    그가 다급히 움직인다고 음식을 파는 상인들의 손이 빨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자 그가 웃었다.

    “수행인이랑 동행하지 않는다고, 근방에 아무도 없다는 이야긴 아니야.”

    “……그렇구나.”

    “나한테 숨기려던 거야? 서운해라.”

    크루엘로가 재차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하는 걸 보면, 그 시늉이 잘 통한다는 걸 알았나 보다.

    하지만 이번은 그런 척으로 감췄을 뿐, 진짜로 서운한 것 같았다.

    더 말을 끌었다가는 크루엘로의 머릿속에서 또 보네티 일가가 죽어 나갈 것 같았기에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숨기려던 건 새가 아니야.”

    “그러면?”

    “……불꽃놀이.”

    “뭐?”

    “제대로, 보고 싶어서…….”

    ……창피해.

    얼굴에 열이 몰리는 감각이 생생하다.

    나는 후드를 벗고 다시금 가면을 얼굴에 눌러 붙였다.

    여태 불꽃놀이 같은 건 별것 아니라는 듯, 기대하지 않은 척 굴어 놓고 그걸 좀 제대로 보겠다고 몰래 정령까지 부른 게 참 낯 뜨거웠다.

    어지간한 일에는 태연하게 굴 수 있는데 왜 이게 이렇게까지 창피한지는 이해할 수가 없다.

    가면을 꾹 붙들고 가만히 서 있으니 곧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허락도 받지 않고 크루엘로가 내 가면을 멋대로 벗겨 버렸다.

    “어어, 야!”

    뒤늦게 손을 뻗었으나, 가면은 이미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뒤였다.

    크루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와중에도 나는 반사적으로 그가 괜찮아졌는지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그 눈에 서운한 기색은 사라져 있었다.

    그걸 넘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지나치게 달게 느껴져서 괜히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러면 제대로 봐야지.”

    “……뭘?”

    크루엘로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게이트를 열었다.

    아차 하는 사이 시야가 뒤집혔고, 그러며 도착한 곳은 어느 저택의 지붕이었다.

    수페르 광장과 가까이 있는지,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광장에 새겨진 마법진과 그 가운데에 서 있는 마법사들 또한.

    내가 그쪽을 쳐다본 순간, 첫 번째 불꽃이 피어올랐다.

    퍼어엉!

    “와…….”

    아무런 효능이 없이,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위해 피워 낸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다.

    검은 장막을 배경으로 한 그것은 사람을 홀려 놓을 만큼이나 찬란했다.

    황궁을 불태우는 불꽃과는 여러 의미로 달랐다.

    장난으로라도 비교한 게 미안해질 만큼이나.

    나는 한참 동안 공연에 빠져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크루엘로도 제대로 불꽃놀이를 보는 게 처음이었지?

    문득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궁금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크루엘로는 나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젖힌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펑펑 터지는 불꽃이 그의 눈에서도 터졌다.

    붉은색 눈동자에서 수백 개의 별이 반짝였다.

    예뻤다, 아주.

    ……관심이 없는 척하더니만, 열심히도 보네.

    “그래. 나중에 우리 어른이 되면 같이 수확제에 가자, 에이미.”

    아니지, 관심이 없는 척한 건 나뿐이었구나.

    누가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멋쩍어져 웃고 말았다.

    귓가엔 계속해서,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은 통 들지 않았다.

    실제 불꽃보다 크루엘로의 눈에 비친 불꽃들이 더 아름다워서 통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공연에 홀려 있을 때와는 다른 것들이 마음에 차오른다.

    어떻게 헷갈렸나 스스로도 황당할 정도로 명확한 감정.

    입술이 저절로 달싹거렸다.

    크루엘로에게는 종종 들었지만, 내가 내뱉은 적은 없던 말이 혀를 간질였다.

    분위기가 잡힌 적은 몇 번 있었으나, 멋쩍고 부끄러워 전하지 못한 마음이 입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안달이었다.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시끄러우니, 어차피 들릴 리도 없으니까.

    크루엘로도 불꽃에 정신이 팔린 것 같으니 제대로 말하기 전에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슬쩍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사랑해, 크루엘로.”

    못 들었다.

    이건 분명히 못 들었을 거야.

    내뱉은 내 귀에도 들리지 않았으니 확실했다.

    그럼에도 괜히 또 얼굴이 뜨거워져서, 나는 다시 불꽃놀이에나 눈길을 처박으려고 했다.

    그러던 순간 차가운 손이 양 뺨을 붙들었다.

    시선이 강제로 올라가 붉은 것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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