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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22화 (122/162)
  • 122화

    가보트.

    잠시 잊고 있던 이름에 몸이 굳었다.

    미뉴엣의 얼굴을 한 괴물이 징그럽게 입꼬리를 당겼다.

    “왜 그래? 내 동생이 내 손에 있는 건 당연하잖아.”

    발밑이 꺼진 듯한 부유감이 들었다.

    나는 새삼 에덴과 눈을 마주치고는 미뉴엣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

    내면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나는 되도록 감정을 빼고 말했다.

    “가보트는 어디 있어.”

    “이 저택 어딘가. 속박으로 묶어 뒀어. 어떤 주문인지는 알지?”

    4주문, 내가 큐딜을 묶었던 새하얀 사슬이다.

    가보트 혼자 힘으로는 풀어낼 수 없다.

    “찾으러 가려는 건 아니지? 그러지 마. 너희가 내 시야에서 벗어나면 나도 못 참을 것 같단 말이야.”

    “가보트를 어쩔 셈이야.”

    “별로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냥 더 시간을 끌기가 지긋지긋해서 여기서 마무리 짓고 싶거든. 그러니까 네가 죽으면 네 동생은 살 거야.”

    그런데 그 애가 그렇게 소중하니?

    속삭이는 목소리에 속이 뒤집힌다.

    “낙원heaven.”

    낙원, 낙원, 낙원…….

    나는 마구잡이로 주문을 쏟아 냈으나 에덴에게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길 수 없다.

    출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상위 주문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었다.

    그러면…… 가보트의 죽음을 불사하고 도망쳐야 할까?

    나중을 기약한들 나아질 게 없는 상황인데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무력감에 머릿속이 엉망진창, 손이 떨려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도 잘 되지 않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붙들었다.

    “진정해요.”

    내 감정에 비하면 무감해 보일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다정했다.

    손에 닿는 온기에 설움이 차올라 고개를 들었다.

    크루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아까처럼 차갑지는 않아서, 지금 상황엔 좋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에 걸맞지 않은 감정들이 결국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얼간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자그만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뺙.

    어쩌면 사람의 숨소리보다도 존재감이 약한 그것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린다.

    “낙원heaven.”

    나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다시 주문을 써 에덴의 시야를 가리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내 발밑까지 다가온 조그맣고 동그란 생명체.

    소리 내어 울고 있는 건 연둣빛 정령이다.

    피아니시모는 어느 날의 겨울 살쾡이처럼 내 품에 뛰어들었다.

    뱁새는 겁에 질렸을망정 의연하려 애썼고 두 눈에는 어떠한 용기 같은 것이 불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가보트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를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내가 걱정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까지도.

    크루엘로의 눈이 내 품으로 향했다.

    이어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머릿속에 전해진다.

    [조금 전에 거, 한 번만 더 해요.]

    대답을 듣지도 않고, 크루엘로는 다시 얼음 거울을 깔기 시작했다.

    에덴의 입장에서는 무모한 공격이 이어지는 꼴이다.

    “너희는 정말 포기할 줄을 모르는구나. 이제 슬슬 지겨울 지경이야.”

    사실 나 또한 이해할 수는 없었다.

    크루엘로는 피아니시모에게서 뭘 본 걸까.

    이 애가 뭘 할 수 있지.

    나는 품에 안은 동그란 새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피아니시모의 장점은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은밀함이다.

    심지어 에덴도 뱁새가 여기에 들어오기까지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미약한 산들바람으로는 아무것도 해칠 수 없다.

    어떻게든 에덴에게 닿더라도 이 조그만 새는 그 가슴팍을 쫄 수도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말랑한 살갗에 약간의 흔적을 남기는 정도야 가능하겠지.

    내가 멍하니 뱁새를 들여다보는 동안 크루엘로의 판은 다시금 완성되고 있었다.

    뺙!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정령에게 힘을 보태는 법을 알고 있었다.

    산들바람을 매섭게 부풀리는 법을 알았다.

    그리고 이 뱁새는 맞서 싸울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미뉴엣의 프레스토가 거대한 폭풍우의 앞에 달려들었던 것처럼.

    “……부탁, 해도 되지?”

    뺙.

    새의 울음소리가 담담하다.

    나는 베아티투도에서 손을 떼어 냈다.

    내가 가진 가장 성결한 힘을 모아, 작고 용감한 새에게 전한다.

    내 영혼에서부터 끌려 나온 새하얀 빛이 정령을 휘감아 들어간다.

    피아니시모는 프레스토처럼 멋지게 성장하지는 않았다.

    동그란 몸체가 조금 부풀고 길게 자란 꼬리털이 지느러미처럼 흔들릴 뿐.

    그러나 세상 무엇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보이는 바람이라면 그건 조금도 매섭지 않을 터.

    [지금!]

    크루엘로의 시선에 맞추어 나는 한 번의 주문을 더 사용했다.

    ─6주문. 광휘brilliance.

    검은 마나에게만 효과가 있는, 그러나 사람의 시야를 가리기엔 더할 나위 없는 빛이 터져 나갈 듯 응접실을 메웠다.

    작고 용감한 바람은 광휘에 숨어 나아갔다.

    “하하, 내가 흑마법사가 아닌데 이따위 걸 써 봐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에덴의 목소리는 도중에 끊겼다.

    얼핏 그의 신음을 들은 것도 같았다.

    나는 마치 관객이라도 된 것처럼 빛이 사라지길 기다렸고 광휘는 시간이 멈춘 듯이 느리게 사라졌다.

    마침내 명확해진 시야에 결과가 드러났다.

    에덴은 무사했다.

    두 다리는 멀쩡히 선 채였고, 가슴도 목도 머리도, 인간의 급소라 칭할 만한 곳에도 긁힌 자국 하나 없었다.

    그러나 피가 흐르는 곳이 한 군데는 있었다.

    그의 손바닥.

    “허…….”

    새하얀 사막과 연결되었던 마법진은 훼손되었다.

    삑!

    새는 의기양양하게 가슴 털을 부풀리고는 소리 내어 웃듯이 삑삑거렸다.

    쏟아 넣어 준 성력을 다 감당할 수도 없는지 형체는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당황한 뱁새는 잠깐 굳었다가 꼬리 깃을 흩날리며 서둘러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뱁새의 모습과 당황한 에덴의 낯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웃더라도 일단은 끝내야겠지만.

    나는 다시금 낙원의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주문은 각혈과 함께 끊어졌다.

    왜……?

    “욱!”

    성력이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주머니에 손을 처박고 베아티투도를 쓰려고 해도 빛이 흐르지 않는다.

    몸 상태가 엉망진창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좀 전의 행동을 되짚어 보자 곧바로 답이 나왔다.

    아, 미쳐서 주문을 퍼부어 대지는 말걸.

    성력이 지나는 통로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안 돼.

    지금 끝내야 해.

    에덴은 어느새 당황을 수습하고 제 뱀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주변의 공간을 왜곡해 공격을 회피할 수는 없겠지만 아예 무력화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낙원이 필요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이어 나가려 했고 그럴수록 몸 상태는 악화되었다.

    “우윽, 윽.”

    마치 둑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내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끝났구나.

    나는,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오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끝났다.

    “시오라!”

    당황한 크루엘로가 나를 붙들고 부축했으나, 몸에서는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이렇게 끝이라고?

    에덴을 다 몰아붙인 마당에 정말?

    믿고 싶지 않았으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안 되잖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면 어느 누가 이 이야기를 사랑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잖아요.

    “왜 이래요, 시오라. 정신 차려요!”

    “……페불라시여.”

    그녀를 부정했던 게 거짓말인 양 자연스럽게 내 입에 신의 이름이 올랐다.

    답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간절히 기도한 순간은 많았으나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거짓말처럼.

    정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이 기적적으로, 나는 선명한 신의 손길을 느꼈다.

    망가졌던 내부의 길이 다시금 이어진다.

    시오라의 몸은 여전히 회생할 수 없이 망가졌으나 내 영혼은 세 번째 육신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내 시간만 멈추어 그대로 박제되기라도 한 듯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해졌다가 나는 곧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낙원heaven.”

    질리도록 쏟아졌던 빛의 기둥은 에덴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우직하게.

    에덴의 새하얀 뱀이 주인을 감싸려 했으나, 아까는 내 성력에 그토록 강대히 반응하던 짐승이 쉽사리 허물어지고 성력은 에덴을 덮쳤다.

    한순간 온 세상의 소리가 다 사라진 것처럼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잠시 눈꺼풀을 감았다가 뜬 순간, 나는 쓰러진 에덴을 볼 수 있었다.

    “끝, 났네.”

    몸에서 쭉 힘이 빠져나간다.

    이미 크루엘로가 나를 부축하던 중이기에 굳이 버티려 들지 않았다.

    거의 그에게 매달린 채로, 나는 에덴에게 다가갔다.

    내가 공격한 건 에덴인데 쓰러져 있는 건 미뉴엣이란 점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널브러진 에덴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페불라께서 널.”

    마지막에 느꼈던 신의 존재를 그 또한 느꼈던가.

    내 착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한층 더 현실감이 없어졌다.

    “흐……. 흐흐. 그래, 이번엔 확실히 내가 섣불렀네. 고지가 코앞에 있어서 들떠 버렸나 봐.”

    에덴은 소매로 입가를 문질러 피를 닦더니, 눈동자만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이 몸에서 한 달만 머물렀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거야. 본신의 성력만으로 너를 밟아 줄 수 있었을 텐데.”

    “허.”

    “남의 몸을 쓸 땐 그렇잖아, 나도 마찬가지거든.”

    “오래 살아서 변명도 그렇게 꼬리가 긴 거야?”

    내 말에 그는 멈칫했으나 곧 다시 웃었다.

    “뭐, 좋아. 다음엔 방심하지 않을게. 좀 더 확실히 숨어서 착실하게 목을 조여 줄 테니 기대해.”

    “네게 다음 같은 건 없어. 여기서 모든 게 끝날 테니까.”

    “하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게 없는 건 다음이 아니라 끝이야.”

    “무슨 소릴─.”

    “나는 죽지 않아. 미안한 말이지만, 다음에 갈 몸도 정해져 있거든.”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차게 식었다.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에덴은 어떻게 미뉴엣의 몸을 차지했나.

    그가 남의 몸을 쓰는 데는 어떠한 조건도 필요하지 않은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아무리 신성 주문이라 한들 다음 몸도 없는 채로 그런 걸 정해 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상식에 이미 뒤통수를 맞았기에 나는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이자를 세상에서 없애는 게 가능하긴 해?

    에덴은 내 굳어 버린 얼굴을 보고 비죽 웃었다.

    그러고는.

    “그런데 너는 괜찮겠어? 미뉴엣, 아직 살아 있는데 말이야.”

    심장이 덜컥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내 동요가 겉으로도 드러났는지 크루엘로가 다시 한번 내 손을 잡았다.

    “흔들기 위한 개소리예요.”

    “알, 아요. 안 믿어요. 그런 희망 고문 같은 말.”

    “어쩌면 이렇게 신뢰가 없을까. 애석하게도 정말이야.”

    그는 후들후들 떨면서도 제 팔을 들어 올렸다.

    손등, 뱀의 잇자국 같은 자국이 났던 그 자리.

    설마 그게 주문의 매개였단 말이야?

    “여기에 성력을 퍼부어 놓은 거 네가 했지? 그게 보호막이 된 모양이야. 분명히 집어삼켰는데도 아직 버티고 있지 뭐야.”

    이미 흔적이 지워진 살갗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에덴은 입꼬리를 길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미뉴엣도 같이 죽을 거야.”

    어때, 시오라.

    “네 자매를 죽일 각오는 되어 있어?”

    잔혹한 물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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