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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21화 (121/162)

121화

내 주머니에 든 걸 알아차렸는지 크루엘로가 눈가를 찡그렸다.

“베아티투도를 감당할 몸 상태로는 보이지 않던데.”

“크루엘로보단 나을걸요.”

납득시켰으니 굳이 말꼬리를 늘일 필요는 없다.

나는 곧바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적어도 비가 때 쓴 것보단 많은 성력을 퍼붓기 위해 되도록 많은 양의 베아티투도를 쥐고.

뱀을 공격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8주문. 낙원heaven.

흥미롭게 이쪽을 구경 중이던 이에게 아낌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부정하게 만들어진 성력은 내 몸을 통로로 삼아 새하얀 빛기둥의 형체를 만들어 냈다.

갇혀 있던 공간에서 문을 만들어 낼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몸은 이상하리만치 멀쩡했다.

빛줄기는 무사히 적을 향해 뻗어 갔다.

그리고 성력이 에덴을 덮치기 직전에야, 그는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수정modification.”

주변의 공간이 뒤틀리며 낙원을 집어삼켰다.

그건 너무도 기괴한 광경이었다.

물웅덩이에 돌을 던져도 파문은 일어난다.

그러나 있는 힘껏 쏘아 낸 주문은 꿈결이었던 것처럼 아무런 결과도 내놓지 못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에덴이 공간을 왜곡해 낙원을 다른 장소에 내리꽂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수단이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퍼부은들 의미가 없다는 것 또한.

굳어 버린 내 얼굴을 보고 에덴은 또다시 미뉴엣처럼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 내가 누구의 신도인지 모르던 사람처럼.”

“…….”

“하하, 비가 때도 그랬지. 푸가 신전의 아이들은 생각이 얕구나. 내가 검은 뱀을 만든 것과 내 신앙심은 별개의 문제란다.”

그는 자랑하듯 제 성력을 펼쳐 보였다.

그 새하얀 힘에 이끌리듯 에덴의 뱀이 주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여전히 페불라를 마음 깊이 섬기고 있어. 너희의 어설픈 신앙에는 비할 바 없이 신실하지.”

물론 나도 너희들에게 놀라긴 했어, 그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 갔다.

“낙원을 쓸 수 있는 신도가 둘 이상이라니, 내가 생각한 그림을 아득히 벗어나거든.”

돌연 에덴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비가의 일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네? 내 뱀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꼭 그 아이가 보고 겪은 일을 이미 아는 사람처럼 말이야.”

“…….”

“흠. 영혼 조각은 크루엘로에게 날아간 걸로 아는데 기억을 공유했을 리도 없고.”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그는 혼자서도 잘만 지껄여 댔다.

그런 일방적인 대화가 퍽 익숙한 듯도 보였다.

“크루엘로가 말해 줬을까? 그럴 리는 없지. 저 애가 비가의 죽음에 얼마나 민감하게 구는데. 그러면 원래부터 알고 있었나.”

크루엘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것도 남의 껍데기였지? 어떻게 그 몸을 쓴 걸까. 푸가 신전에 11주문을 남겨 두진 않았는데.”

“……11주문?”

“그렇지? 모르지?”

선조 대에서 소실되어 나는 이름만 알고 있는 최고위 주문 두 가지의 하나였다.

에덴이 그 이전의 사람이라면 그가 소실된 주문을 아는 건 이상치 않다.

다만 나를 스산하게 만드는 건 그 주문의 이름이었다.

11주문. 탈피molting.

그 단어에 사장된 다른 의미가 없다면, 그건 뱀 따위가 껍데기를 벗어 던지는 일을 일컬었다.

그게 사람의 육신에 비유한 거라면, 그리고 그다음 단계까지 내포되어 있던 거라면.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네가 남의 몸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맞아. 페불라께서 내려 주신 주문 덕분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주문을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이지 않은 건 수정이나 역행도 마찬가지였지만, 남의 몸을 차지할 수 있는 주문이라니 대놓고 혼란을 유발하는 셈이었다.

은근히 욕을 하던 레카논의 규율이 생각났다.

남 욕할 때가 아니었어.

나는 있는 힘껏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몰랐던 모양인데. 아니지, 곧바로 내가 미뉴엣 보네티의 몸을 차지했다고 알아차린 걸 보면 반대로 어느 정도는 알기 때문인가?”

혼잣말 좀 그만 지껄이라고 내뱉고 싶었으나 비가 때와 같은 이유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지식 자랑은 거기까지였는지 돌연 뱀이 내게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페불라께서 네게 어떤 가호를 내려 주셨니, 아이야?”

벌어진 입으로 가호의 방패를 하나 밀어 넣었으나 뱀은 또 그걸 와그작 씹어 먹고 달려들었다.

같은 성력이다 보니 이점보다 불리한 점이 많다.

일단 마지막 방패를 던져 넣고 시간을 벌자.

그렇게 생각하던 때 쩌저정, 뱀이 얼어붙었다.

금세 뱀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잠깐의 시간 벌이쯤은 되었다.

나는 당황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쓰지 말라니까요!”

“안 썼어요, 모리온은.”

진짜?

그 말대로 하늘빛 얼음은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웬일로 말을 들었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의식을 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크루엘로는 뱀과 에덴에게 끊임없이 견제성 마법을 날려 대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순간, 크루엘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티 내지 말고 들어요.]

계시를 받을 때와 비슷한 경로로 들어온 메시지에 흠칫했으나 계시와는 확실히 달랐다.

머릿속에 느껴지는 남의 존재가 더없이 이질적이다.

이게 텔레파시 마법이구나.

[낙원이란 주문, 결국 근원은 빛이죠?]

나는 티 나지 않도록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을 거울처럼 깔아 볼게요.]

빛을 엉망진창으로 반사시켜서 공격 경로를 알 수 없게 해 보자는 거지.

그 말을 듣고 크루엘로의 공격을 살펴보니 얼음을 깔아 둔 위치가 절묘했다.

좋은 생각이다.

나는 작업이 준비되는 동안 에덴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입을 열었다.

나이젤리아 때 썼던 방식이다.

에덴이 내 선생은 아니지만, 누가 이야기의 신도 아니랄까 봐 이쪽도 떠벌리길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다른 건 다 알겠는데 크루엘로는 왜 여기로 불러들인 거야. 베티에게 전한 말은 또 뭐고?”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베티가 그러더라고요. 미뉴엣이 날 곧바로 응접실에 데려오라고 했다고.”

“하하, 미뉴엣 보네티한테 그렇게 정이 들었다니 이간질하려고 그랬지. 실패했지만.”

“이상하네. 이런 상황에선, 크루엘로가 언니를 죽이려 했다고 화를 내야 하지 않나?”

얼핏 들은 말을 떠올리며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사람의 감정이란 건 갈수록 어렵단 말이야.”

“그러면 미뉴엣의 몸을 삼킨 건 애당초…….”

“갈등을 만들기 위해서였지. 그 외에도, 그러면 네가 날 공격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도 있는데 어느 쪽도 틀려 버렸네.”

“왜 그딴 그림을 만들려던 건데.”

“음. 모리온을 삼키게 하기 전에 최고의 상태를 만들어 주려고?”

나와 크루엘로가 서로 치고받다가 그에게 마지막 절망을 선사하기 위해서, 그런 뜻이었다.

절로 입안에서 험악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 개자식이.

“그런데 이거, 시간 끌려는 패턴이지? 무슨 수작을 준비 중이야?”

엘린보다 몇백 년 더 묵었다고 눈치는 좋았다.

“어쨌거나 좋아, 나는 속 얘기를 정말 오랜만에 한단 말이야. 이렇게 대화 나누니 아주 즐겁네.”

즐거우면 그 손은 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

에덴에게서 날아든 사슬을 피해 구르며 나는 태연한 척 물었다.

“윽! 주문 속도는 왜 그렇게 빨라?”

나는 베아티투도를 쓰는데도 에덴의 속도가 더 빠르다.

엄밀히 말해 상대는 나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의 본체는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아무렴 수백 년 전 인간의 육신이 썩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랬다면 애당초 남의 몸을 빌리며 살지도 않았겠지.

신의 가호가 없이 주문만으로 미뉴엣의 몸을 비집고 들어간 거라면 육체가 벌써 안정됐을 리 없다.

어떻게 저런 속도가 가능한 거야?

내 의문에 에덴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궁금해? 알려 줄까?”

그 순간, 크루엘로가 깔던 판이 완성되었다.

에덴의 입에서 나올 말이 궁금했으나 그런 건 그를 쓰러뜨린 뒤 들어도 늦지 않다.

어차피 그에게 들어야 할 말은 아주 많았으니까.

─8주문. 낙원heaven.

아까보다 많은 양의 성력을 밀어 넣으며 나는 빛줄기를 터뜨렸다.

신성 주문이 포효하듯 길을 열었다.

공격은 곧바로 에덴을 향하지 않았다.

그의 뒤쪽에 있는 얼음으로, 그리고 그 맞은편에 있는 얼음으로.

몇 번의 반사를 거치며 마치 에덴이 빛으로 된 감옥에 갇힌 듯한 광경이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 감히 성스럽다는 감탄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에덴을 다 가둔 낙원은 마침내 본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에덴은 빛의 뱀에 삼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수정modification.”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단숨에 사라져 버린 성력이 허탈할 지경이다.

이를 악물었는지 크루엘로의 턱 근육이 움찔했고 나는 조용히 에덴을 노려보았다.

“방금 건 좀 괜찮았지만, 어차피 소용없어. 공격이 어디서 날아오든 주변의 공간을 다 왜곡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미치겠네. 수백 년 전에는 성자한테 특전이라도 있었어? 아니면 삼시 세끼 베아티투도 퍼먹었어?”

“선배로서 조언하자면 그거 먹지는 마. 잘 맞는 육체가 거의 없어서 자칫하면 몸만 하나 버리는 셈이거든.”

“그러면 그 출력은 뭐야, 대체.”

“나도 보란 듯이 말하고 싶긴 한데, 이미 사용된 방식이라 조금 멋쩍네. 나이가 많아서 그래, 창의력을 발휘하기엔 곤란한 연령대거든.”

그렇게 말하며 에덴은 장갑을 벗었다.

매끈해야 할 미뉴엣의 손바닥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너도 이거야?”

마치 크루엘로가 모리온이 있는 공간을 연결해 사용했던 것처럼, 그는 다른 공간에서 성력을 공급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의문을 가지자마자 답이 함께 떠오른다.

나는 내가 갇혔던 곳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사막에서 겨우 몇 움큼을 쥐어 왔을 뿐이니 상대가 될 턱이 없지.

“말하다 보니 또 옛날 생각이 나네. 화이트데저트는 내가 만들었어. 베아티투도로 하얀 사막을 만들겠다는 나름의 각오였단 말이야.”

그건 또 왜 모았냐고 안 물어보니?

그는 산책하듯 여유롭게 걸으며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을 이어 갔다.

마치 그 순간을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희열로 눈이 번들거렸다.

“나는 페불라의 성자야, 아주 오래전부터 한 번도 신앙심을 잃어 본 적이 없어. 그런 만큼 바라던 것이 있지. 어째서 페불라께서는 아직도 그 자리에 계시는가.”

“…….”

“그분 외의 신성엔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러니 내 원대한 바람의 밑거름이 되는 게, 그들에게도 영광스러울 거야.”

에덴이 개소리를 지껄이는 동안 뒤쪽의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봤기에 금세 알 수 있었다.

크루엘로가 게이트를 열려 한다.

그는 심지어 내 의사를 확인할 생각도 없다는 듯이 내 팔목을 붙들었다.

지금 당장 도망친다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까.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한마디도 내뱉을 겨를이 없었다.

에덴이 말했다.

“도망치려고? 바티가 불쌍하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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