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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12화 (112/162)
  • 112화

    “다 풀어 줬다가 달링이 홀랑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요.”

    잡을 재주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얄밉게 군다.

    아무렴, 지금 몸 상태로는 고양이도 따돌릴 자신이 없었다.

    미뉴엣한테 성력 좀 뿌리려다가 쓰러진 몸으로 뭘 해.

    영혼이 육체에 안착하기까지 꼬박 일주일은 이 꼴일 텐데.

    에휴, 나는 일단 체념했다.

    “그러면 크루엘로는 여기에 왜 왔어요. 내가 어떤 꼴이 됐는지 구경하러?”

    “보고 싶기도 했고.”

    “원로도 다 죽었는데 그런 농담 그만할 때 안 됐어요?”

    “농담 아닌데.”

    아.

    크루엘로가 고백했었지.

    뒤늦게 아차 싶어 나는 어깨를 떨었다.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잠깐, 아주 잠깐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비가일 때도 고백받았구나.

    얘는 어떻게든 날 좋아할 운명인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찾았다.

    “다…… 음에 보잘 때는 친구로 다시 만나자면서요. 그래서 마음 정리한 줄 알았지.”

    “……달링, 누구 좋아해 본 적 없죠?”

    “그거 무슨 뜻이에요?”

    “성애적으로 사람을 좋아해 봤으면 며칠 만에 마음을 정리하니 마니 하는 말은…….”

    크루엘로는 말을 하다 말고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냥 말하지 말아요. 있다고 하면 그것도 짜증 날 것 같아.”

    “저기, 친구 버전으로 부탁해요.”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달링은 평생 혼자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떤 친구가 저런 말을 하지?

    “나는 그냥, 어제 물어보지 못한 말이 있어서 와 본 거예요.”

    물어보지 못한 말?

    그런 거라면 나도 하나 가득 있었다.

    상황 때문에 입 밖에 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지만.

    크루엘로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며 침묵하다가 눈만 들어 올려 나를 마주 봤다.

    그늘진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였다.

    “장례식장에서 달링은 왜 쓰러졌던 거예요?”

    “그간의 피로가 좀 쌓여 있었나 봐요.”

    예상했던 질문인지라 곧바로 답할 수 있었다.

    “신관을 만나도 몸에 별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하기야 저도 신관이지만 병이나 그런 건 잘 모르겠거든요.”

    “…….”

    “미뉴엣이랑 가보트도 많이 놀랐나 봐요. 덕분에 이 꼴이 됐잖아요.”

    “……그것뿐?”

    잠긴 목소리에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가 되물었다.

    “그럼요?”

    네가 생각하는 다른 이유는 뭔데.

    크루엘로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고 나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정적이 이어진다.

    기묘한 긴장감을 끊어 놓은 것은 바깥에서 난 소리였다.

    말 울음소리와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

    그리고 보네티의 사용인들이 누군가를 맞이하는 듯한 소리.

    미뉴엣이 벌써 돌아왔나?

    잠깐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크루엘로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예요?”

    “볼래요?”

    그는 도로 침대로 다가와 나를 이불째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번거롭게 굴 바에 나 같으면 결박을 풀어 주겠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은 순순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에 있는 건 거대한 마차.

    가문의 표식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나무색 머리칼의 장신. 데이디어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은발 머리는 누가 봐도 가보트였다.

    데이디어가 보네티에 왜 온 거람? 의아해하던 순간.

    데이디어의 수행인이 그녀에게 커다란 무언가를 건넸다.

    그녀의 상반신을 다 가릴 만큼 거대한 그것은 꽃다발이었다.

    “크기에서 져 버렸네요.”

    상심한 척하는 크루엘로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두근거리며 아래를 구경했다.

    그리고 마침내, 데이디어가 무릎을 꿇고 가보트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누가 봐도 그건 프러포즈였다.

    저런.

    “줄리안이 버림받았네요.”

    “아무렴, 소꿉친구라 한들 그런 범죄자를 어떻게 계속 품겠어요.”

    “그러면 크루엘로도 내가 범죄자가 되면 쉽게 잊을 수 있겠어요?”

    “나보다 더한 범죄자가 되긴 쉽지 않을 텐데.”

    “승부욕 나게 하지 말아요, 크루엘로.”

    가보트가 어떻게 나오려나.

    생각 같아서는 쿠키라도 오물거리면서 보고 싶었다.

    가보트는 멀리서 보기에도 사색이 된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꽃다발 앞에서 머뭇거리는 손이 참 웃기다.

    그러다가 그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

    촤아악, 일생일대의 반사 신경을 써서 커튼을 쳐 버렸으나.

    “……못 봤겠죠?”

    크루엘로는 말없이 웃었다.

    ***

    봤다.

    가보트는 내가 구경 중인 걸 보고야 말았다.

    덕분에 나는 이불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응접실로 끌려 내려와 사자대면의 한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가보트의 해명을 듣느라 귀가 터질 것 같아.

    나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한 서른 번쯤은 내뱉은 말이었다.

    “그렇구나, 프러포즈가 아니었구나.”

    “그렇다니까! 데이디어는 그냥 사과하러 온 거라고!”

    세상에 어떤 죄인이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건네며 사과한담?

    아, 한물간 연애 소설에서 보긴 했다.

    사랑에 빠진 죄인이라든가……, 말하면 화내겠지?

    “가보트의 말대로입니다. 저는 아카데미 때 지은 잘못을 사죄하러 왔을 뿐입니다.”

    “가보트, 데이디어 경이 아카데미 때 너한테 잘못한 게 뭐야?”

    “몰라. 욕 한 마디 들어 본 기억이 없는데.”

    “줄리안이 네게 안 좋은 소문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방관도 커다란 죄니 내가 무고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렇지.

    비밀 조사관으로 수월히 활동하기 위해 눈치 없는 척을 해 왔을 뿐, 대략적인 흐름은 데이디어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에 와서는 그녀가 둔하다는 게 정말로 위장인지도 의심스러워졌지만.

    가보트는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로 데이디어를 대했다.

    “아무튼. 사과는 됐으니까 다시는 무, 릎을 꿇는다거나 꽃다발을 주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데이디어. 가져온 금괴도 가져가고.”

    “금괴를 가져왔어?”

    “혹하지 마. 네 거 아니야, 시오라.”

    “아니긴!”

    데이디어는 이미 내게 모든 대가를 약속했다고!

    하지만 그녀와의 거래를 알 리 없는 가보트는 나를 그저 돈 귀신으로만 보았다.

    그는 데이디어에게 반드시 금괴를 다 가져가라고 신신당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약속이 있다나 뭐라나.

    가보트는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려다가 말고, 얌전히 상황을 관망하던 크루엘로에게도 한마디 건넸다.

    “공작전하. 시오라는 환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실 거라고 생각하고 믿겠습니다. 믿기진 않지만.”

    숨도 쉬지 않고 내뱉은 탓에, 세 문장을 말하면서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는 답을 듣지도 않고 가보트는 홀랑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건 분명 도망간 거야

    응접실에 있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크루엘로가 뻔뻔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뭘 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잠깐 그를 노려봤다.

    고백하고 입을 맞춘 건, 뭘 한 축에도 안 들어가나 보지.

    어쨌든 가보트가 빠지고 나니 장내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돌변했다.

    나는 계속 궁금했던 걸 입에 담았다.

    “데이디어 경, 눈치 없다는 거 흉내가 아니라 진짜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진지하게 행동했으면 가보트의 아카데미 때에 대해서 과장된 소문이 났을 겁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군. 하지만.

    “설마 그걸 사과라고 넘어갈 생각은 아니시겠죠?”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의심받지 않고 레이디 시오라를 만나려 했을 뿐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두 개의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게 전에 들었던, 그 흥미를 느낄 만하다는 자료인가?

    소몬 후작을 조사하다가 알게 됐다고 한.

    나는 주저 없이 첫 번째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있는 건 웬 인적사항들이었는데 그 공통점을 말하자면.

    “유전병?”

    “예. 화이트데저트 외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형질의 병입니다.”

    이걸 왜?

    “나이젤리아와 엘린이 동일인임을 알게 된 이후 화이트데저트의 인사들을 모조리 조사했습니다. 그녀의 행적을 역추적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유전병을 파게 된 거지.”

    “그쪽에서 더 은밀하고 기묘한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테이블에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물론 이들은 소몬 후작처럼 한 사람이 죽고 나서야 다른 사람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확연한 연계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요.”

    “다만 반드시 한 세대에 한 번씩만 발병했습니다. 유전병이란 게 그런 걸 가릴 리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나는 데이디어가 의도한 대로 서류의 내용을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에 걸쳐 한 번씩 유전병이 발병했다.

    다만 반드시 이전의 발병자가 죽고 나서야 새로운 발병자가 생겼다.

    그리고 그 병의 흐름을 타고 마지막 장에 있는 인물은, 에덴 화이트데저트였다.

    “에덴이 앓고 있는 병이 친조부 쪽 유전이에요.”

    그가 병에 걸렸을 리 없으니 그저 꾀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에덴의 몸 상태에도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던 걸까?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 자세히 서류를 살폈다.

    “병의 증상은 이렇습니다. 잠복기 때는 아무런 징조도 없다가 갑작스럽게 발병, 점차적으로 몸이 약해지며 어떠한 성력이나 약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른다.”

    잠깐만.

    그 말에서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후대로 갈수록 발병 시기가 늦춰지는군.”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치료법이나 예방책을 발견한 것도 아닌데 환자가 자체적으로 개선점을 알아낸 것처럼 그 시기가 늦춰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이건 다만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만.”

    데이디어는 두 번째 서류봉투를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맨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기시감이 형체를 갖추고 심장을 조여들었다.

    “화이트데저트 외부에도 비슷한 증상을 보인 이가 있었습니다.”

    「에이미 로열샌드. 442. 03~454. 11」

    “전하의 첫 번째 약혼자셨던 에이미 로열샌드 님입니다.”

    그건 내가 느꼈던 기분이 단순히 우연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었다.

    머릿속에 여러 의문이 차례로 펼쳐진다.

    어째서 목적성을 가지고 만든 가문에 유전병이란 결함을 내버려 두었을까.

    어째서 한 세대에 한 명에게만 발병한 걸까.

    어째서 그토록 강대한 에덴에게도 같은 고통에 시달린 걸까.

    그리고 어째서 내가 겪었던 증상이 그와 같은 걸까.

    일련의 사실이 한 줄로 엮이며 뇌리에 사실을 적어 넣는다.

    에덴 화이트데저트도 나와 마찬가지다.

    그 또한, 남의 몸을 빌리며 살아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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