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06화 (106/162)
  • 106화

    “또라이한테 일을 떠넘긴 너는요.”

    흥, 비가는 코웃음 쳤다.

    부엌일을 도와주면서 ‘또라이’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된 비가는 씩씩거리며 크루엘로의 방을 청소했다.

    전에도 소년의 방에 드나든 적은 많았으나, 지금에는 느낌이 새로웠다.

    구체적인 차이점을 잡아낼 수는 없지만 뭔가…….

    “삭막하다고 해야 하나.”

    비가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순간 벌컥 방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그녀는 화를 내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들이닥친 사람을 본 순간 납득했다.

    하기야, 자기 방에 들어올 때 노크하는 사람은 없겠지.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웃으며 건넨 인사에도 답하지 않고, 크루엘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는 한마디도 없이 휙, 하고 방을 나갔다.

    쾅 닫힌 문을 바라보며 비가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로이가 보고 싶어. 크루엘로는 말고.’

    어쩌면 이런 게 카르마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비가가 청소 구역을 바꾸고 얼마간은 순탄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비록 크루엘로는 그녀와 말도 섞으려 들지 않았지만, 저택 내 악명대로 괴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소문이 과장된 건가?

    이쯤 되면 다시 교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비가가 슬그머니 희망을 품던 때, 소문의 실체를 확인할 일이 생긴다.

    그녀가 소파의 쿠션을 들고 팡팡 먼지를 털던 날이었다.

    “으아아악!”

    쩌렁쩌렁한 비명에, 비가는 쿠션을 무기처럼 쥐고 달려 나갔다.

    소리가 난 곳은 복도, 그곳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은 존스─하인─와 주저앉아 벌벌 떠는 다이애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에는 검을 든 크루엘로가 있었다.

    ‘우와, 씨.’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비가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하다 했어. 내 증상이 악화된 건 알지만, 맨 정신에도 그 난리를 부리진 않거든.”

    “죄송,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소공작님.”

    “뭐였나, 환각 마법? 아니면 음식에 환각제를 탔나?”

    “한 번만 용서를…….”

    존스가 제 죄를 빌고 있는데도 사용인들은 그를 동정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아무도 크루엘로를 믿지 않았다.

    비가는 조금 망설이다가 주문을 외웠다.

    ─2주문, 감각 확장extension.

    곧 진상이 드러났다.

    ‘존스 씨 흑마법사였네.’

    크루엘로는 애먼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자라난 소년은 더 이상 어리고 무디지 않았고 저를 지켜보는 눈, 귀를 분간해 내었다.

    다만 평소의 행적 탓에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뿐이다.

    말릴까 고민하던 마음이 단번에 사그라진다.

    “지긋지긋한 쥐새끼들 같으니. 갈수록 내가 우스운 모양이구나.”

    크루엘로는 검 끝으로 복도 바닥을 긁으며 존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살기가 향한 대상에는 다이애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는 내 정신을 교란하고 다른 하나는 내 방에 도청장치를 깔았으니, 그만하면 생이 아깝진 않겠지.”

    “아니에요! 제, 제가 소공작님의 방에 들어간 건 비가를 찾으려고, 그러다가 도청장치를 발견해서 말씀드렸을 뿐인데…….”

    “그 순간 내가 들이닥쳐서 그렇게 둘러댄 게 아니고?”

    짧은 대화만으로 대강의 상황은 파악할 수 있었다.

    내버려 두면 일이 터질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하지, 비가가 고민하던 때 크루엘로가 입매를 뒤틀어 웃었다.

    놀랍도록 싸늘한 미소에 그녀의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다른 사람 같아.’

    비가는 저도 모르게 크루엘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워낙에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던 터라 다른 이들도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의식하고 저지른 행동은 아니었으나 후회가 되지도 않는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반짝이는 붉은색.

    비가는 크루엘로의 그 눈만이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라 여겼건만, 지금에 와서 그건 아예 다른 색으로 보였다.

    ‘<운명>이…… 거짓말이 아니었어.’

    하기야 크루엘로가 전처럼 그토록 순진하고 착하게만 자라났다면, 그런 예언서는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마음이 아렸다.

    비가의 소년이 차게 물었다.

    “할 말이 있나 봐?”

    “다이애나의 말이 진짜일 수도 있잖아요. 해명할 기회를 주세요.”

    “싫다면. 에이미의 흉내를 내서라도 날 막아 보려고?”

    “……네?”

    뜬금없게 들리는 말에 당황했다가, 비가는 다이애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걸 크루엘로가 어떻게 알지?

    의문에 대한 답은 당사자의 입으로 들을 수 있었다.

    “왜. 저택에 나를 살펴보는 눈이 몇 개인데, 나는 눈, 귀를 심어 두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크루엘로의 두 눈에 진한 적의가 어렸다.

    그리고 이번에 그 감정은 명백히 비가를 향하고 있었다.

    “뭐가 됐든지 간에 해 봐.”

    “네?”

    “살려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녀는 변명이라도 할까 입을 달싹였으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농담이었다고 한들 어차피 믿어 주지도 않을 거야.’

    그건 다이애나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망이 없다.

    해명뿐 아니라 크루엘로를 교화시키는 것 또한.

    그녀는 입술을 꾹 눌러 다물었다가 열었다.

    “정말이죠?”

    이번 생은 글렀다.

    죽어도 다음 기회가 있다면, 시간 끌 것 없이 재깍 넘어가는 게 옳다.

    그 김에 무고한 사람이 죽을 일이 없도록 분노를 빨아들이는 것도 괜찮고.

    실은 그런 이성적인 이유보다 감정이 앞선 판단이긴 했다.

    “그러면 저, 허락받은 거예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서운하고 분해서, 비가는 분노를 담아 쿠션을 집어 던졌다.

    키가 훌쩍 커진 소년을 상대로는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퍼억, 물건은 크루엘로의 얼굴에 정확히 적중했다.

    그리고 툭.

    쿠션이 그의 얼굴에 부딪혔다가 떨어진 이후, 장내에는 숨 쉬는 소리마저 사라졌다.

    비가만이 당당하게 이죽거렸다.

    “에이미 아가씨였다면 분명 소공작님께 정신 차리라고 했을 거예요.”

    크루엘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동자만 움직였다.

    얼어붙은 사용인들, 바닥에 떨어진 쿠션, 이어 비가를 눈에 담았다.

    비가는 그가 이제 검을 휘두를 거라고 생각했다.

    ‘참나, 내가 가르쳐 준 검에 내가 죽게 생겼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운명>을 너무 얕본 제 탓이니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페불라께서도 이 상황을 지켜보셨으면 다음 생엔 하녀보다 좋은 몸을 주시겠지, 하고.

    그리고 크루엘로의 입이 움직였다.

    “넌 해고야.”

    ‘엥?’

    소년이 몸을 돌렸다.

    내리고자 하는 처벌은 그게 전부였다는 듯이.

    비가는 그 온건한 처분에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 처음부터 검을 휘두를 생각이 없었던 건……?’

    그렇게 생각하면 쓰레기가 되는 건 저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비가가 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안 됩니다, 소공작님!”

    소란을 듣고 달려 나온 하녀장이 크루엘로의 발치에 매달렸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했는지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차마 어릴 때부터 봐 온 하녀장을 매섭게 내치지는 못했다.

    비록 그녀와 아무런 친분을 쌓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거 놔!”

    “이 아이를 해고하시면 안 됩니다!”

    “하. 왜?”

    그러게. 왜 안 되는데?

    비가는 똑같은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굉장히 깐깐해 보이던 하녀장의 태도에 마음은 감동받았으나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으니까.

    “나한테 쿠션을 집어 던진 하녀 눈치까지 살펴야 하나, 내가?”

    “이 애가 인당 몇 명의 몫을 해내는지 아십니까?”

    “……뭐?”

    “안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사용인이 그만두는 탓에 저택 유지가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저 애의 일솜씨가 말도 안 되게 늘더니!”

    하녀장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장담합니다. 이제 저 애가 없으면 저택 일이 안 돌아갈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최근 소공작님의 사실에서 먼지 한 톨이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전에는 창틀만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시커메졌는데 말입니다.”

    ‘그야 거긴 더 꼼꼼히 닦았으니까.’

    크루엘로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전부 저 애의 공입니다. 이제야 숨 좀 돌리려는 데 저 애를 해고하신다니요! 차라리 저를 자르십시오, 저를!”

    내용은 희극 같은데 말하는 태도는 굉장히 절박해 보였다.

    그리고 몇몇 사용인들이 그에 감화되어 입을 열었다.

    “마, 맞아요. 비가가 정신을 차린 뒤로 얼마나 편해졌는데요.”

    “저는 폐 질환에 걸리기 직전이었는데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한 달에 세 명씩 일을 그만두고,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겨우 하나가 될까 말까인데 저런 아이를 내보내시는 건…….”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소공작님. 비가는 이 저택에 꼭 필요한 일꾼입니다.”

    분명히 용기를 짜내서 자신을 옹호해 주는 말들인데도 비가는 기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가 읽던 소설에서도 종종 나오는 전개였으나 다른 점이 있었다.

    ‘보통 인품 쪽을 칭찬하던데.’

    어쨌든 화이트데저트에서 일어난 최초의 민란은 사용인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

    크루엘로는 해고 선언을 철회했고, 비가는 나름의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가 행복해진 건 아니었다.

    ‘쟤는 로이가 아니야.’

    지나친 충격은 현실도피로 이어졌고 끝내는 비가의 행동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교화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비가는 모리온을 찾아 없애기로 결심하고는 공작저 곳곳을 뒤적거렸다.

    그건 에이미 때도 한 일이지만 조사할 여유와 시간은 지금이 훨씬 많았다.

    방침이 바뀐 이상 크루엘로를 더 만날 필요는 없다.

    그녀는 제 소년을 만나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귀에 황금 같은 정보가 들어왔다.

    “오늘 대원로님이 오신다고?”

    “그래, 간만에 소공작님을 뵈러 오신다던데 그게 5시던가?”

    동료 하녀의 말을 듣고, 비가는 평소보다 일을 더 빨리 해치우기로 했다.

    원로는 에이미 때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월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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