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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05화 (105/162)
  • 105화

    심상치 않은 말에 되물으려던 찰나 비가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일었다.

    나는 비가를 떨쳐 내려 했으나 그녀는 내 안으로 점점 스며들어 왔다.

    흐릿한 잔상이 시야를 뒤덮는다.

    처음에 보인 건 거대한 흑수정과 크루엘로. 그 앞에 놓인 마법진.

    그는 제 몸을 통로 삼아 진에 거대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비가가 누워 있었다.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었다.

    “쟤, 대체 뭘…….”

    [전부 알게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그건 내게서 뜯겨 나갔던 기억의 일부분.

    마냥 일만 하다 죽었다고 흐지부지한, 한때 내가 살아 냈던 어느 하녀의 삶이었다.

    ***

    7년 전, 어느 날.

    신체 나이 열다섯의 소녀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짧고 숱이 적은 앞머리에 전체적인 길이는 귓바퀴를 겨우 덮는 금발.

    어둡고 우울한 인상에 갈색 눈동자에만 생기가 돌았다.

    “여긴?”

    소녀, 비가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으나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곧장 하녀장이 들이닥쳤다.

    “비가!”

    “으에?”

    “또 자고 있었구나, 이 얼빠진 것!”

    비가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일이 바빠 죽겠는데 뭘 뭉그적거리고 있어! 얼른 일어나서 나오지 못해?”

    “아니, 나한테 하는 말? 이야?”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니! 서둘러 옷 갈아입고 나와!”

    하녀장은 귀가 터지도록 소리치고 제 일을 하러 나갔다.

    비가는 어영부영 일어나 그녀가 가리킨 메이드복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뭐야, 독차를 마시고 일어났더니 귀족 아가씨가 하녀로 강등당했을 리는……. 목소리는 또 왜 이래, 독 후유증인가?”

    제 목을 더듬어 보다가 그녀는 문득, 제 손이 말도 안 되게 거칠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다급히 거울을 찾았다.

    그러고는 그 안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남의 몸살이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걸.

    ***

    비가.

    그건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에서 일하는 하녀의 이름이었다.

    갑작스러운 신분 하락이 당황스럽고 에이미로 죽자마자 눈을 떴는데 4년이 지났다니 황당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제 처지를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니까.

    “……기억이 없다고?”

    “네, 그래서 청소하는 방법도 모르겠어요.”

    이런 식으로.

    이제는 귀족 아가씨도 아니니 신전에 끌려다닐 일은 없을 거라고, 나름대로 계산한 결과였다.

    그러나 세상은 삭막했다.

    하녀장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갑자기 성격이 변한 것 같더라니……. 정신질환이 생겼단 말이지.”

    에이미의 부친인, 로열샌드 경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였다.

    아픈 게 죄야? 못돼 먹은 사람들!

    억울하고 분했지만,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걸 느끼고 비가는 재빨리 수습했다.

    “그러면 하는 수 없구나. 오늘부로─.”

    “거짓말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얼빠지게 군 게 아무래도 청소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아 실언을 했습니다.”

    “허?”

    “제 기억 멀쩡해요, ……레리아 님!”

    비가는 재빨리 하녀장의 이름을 살피고 덧붙였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비가를 내려다보았다.

    “다시는 그런 농담을 하지 말거라. 일손도 부족한데 하녀를 또 어디 가서 구해야 하는지 걱정했으니까.”

    ‘역시 쫓겨날 위기였군.’

    비가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녀장이 바빠서 그 일을 오래 신경 쓰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이후, 비가는 곁눈질로 일을 배워 나갔다.

    청소, 빨래, 잔심부름, 가끔 주방 보조!

    실력은 쑥쑥 늘었지만, 일은 많았고 사람들은 죄 바빠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 와중에 하루가 갈수록 사용인이 줄어들어 환경은 점점 악화되었다.

    누구라도 죽는소리를 할 상황이었으나 비가는 금세 적응했다.

    두 번째 몸이 에이미에 비해서도 훨씬 튼튼한 체질이었고, 의외로 이런 단순 업무가 적성에도 맞았기 때문이다.

    “뽀드득 창문, 뽀드득 창문.”

    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문을 닦던 중 비가는 멈칫했다.

    ‘근데 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분명 세계 멸망을 막으러 온 것 같은데 왜 한 달째 쓸고 닦고 있담.

    청소 파견직이었나?

    심지어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에서 일하면서 크루엘로와 마주친 적조차 없었다.

    막 자기반성을 시작하려는 때, 동료 하녀가 다급히 달려왔다.

    “비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3시까지 청소 마치고 복귀하라고 했잖아!”

    “네?”

    시계를 보니 3시 5분이었다.

    이 큰 방을 닦으라고 해 놓고 겨우 5분으로 빡빡하게 굴긴.

    “저쪽의 작은 창만 닦으면 이 방은 끝이에요.”

    “안 돼, 넌 금발이라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 몰라서 그래? 이 시간 때는 소공작님이─.”

    “내가 뭘?”

    제삼자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목소리 진짜 좋네.

    비가는 감탄하면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놀라울 만치 수려한 소년이 그들을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결 좋은 하늘빛 머리칼에 훌쩍 큰 키, 벌어진 어깨며 신체의 비율 같은 것이 희대의 예술가가 정교하게 빚어 낸 조각처럼 완벽하다.

    물론 비가는 그 아름다움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크루엘로?’

    그녀가 에이미로 살 때 마지막으로 만났던 크루엘로는 11살.

    4년이 흘렀으니 소년은 이제 열다섯이 되었다.

    세월의 격차를 시각적으로 증명하듯 아이는 훌쩍 자라 있었다.

    전과 같은 거라곤, 예쁘게 반짝이는 눈동자뿐이었다.

    ‘변성기가 와서 목소리가 달라졌구나.’

    비가는 어쩐지, 크루엘로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듣지 못한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비가로 사는 동안에는 늘 그랬듯, 이번에도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소, 소공작님!”

    동료 하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납죽 엎드렸다.

    돌아가는 상황도 모른 채, 비가 역시 얼떨결에 따라서 엎드렸다.

    한순간의 감상이 지나가자 다른 것들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의 분위기라든가 동료 하녀가 겁에 질렸다는 사실이나 조금 전 크루엘로의 표정 같은 것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의아해하는 비가의 앞에 크루엘로가 몸을 낮추어 앉았다.

    “말해 봐, 내가 뭘 어쩔 것 같길래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지?”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금발만 보면 내가 눈이 돌아가 에이미, 부르며 끌어안을까 봐?”

    어?

    비가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아니면, 에이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창문 밖으로 밀어 떨어뜨릴까 봐?”

    어라?

    비가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도 아니면, 더러운 기분을 참지 못하고 검을 들고 설쳐 댈까 봐?”

    어라라?

    비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게, 다, 무슨 소리?

    “어느 하나가 아니라 전부인가?”

    이쯤 되니 하녀는 아예 흐느끼고 있었다.

    크루엘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니 궁금하네. 얼마나 닮았는지 얼굴이나 보여 줄래?”

    불쑥 들어온 손이 비가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넋이 나가 있던 비가는 저항 없이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가 비쳤다.

    크루엘로는 비웃으려는 양 입매를 뒤틀었다. 그러나 조롱은 금세 허물어졌다.

    “뭐야, 에이미와 하나도…….”

    객관적으로 금발이라는 점을 제하곤 전혀 닮지 않은 외형이다.

    머리칼의 색조차 에이미에 비해 확연히 짙었다.

    그러나 비가의 눈빛에서 다른 감상을 떠올렸는지, 크루엘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소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녀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젠장.”

    크루엘로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

    그 일이 있은 직후, 비가는 본격적으로 저택 내 여론을 살피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녀는 크루엘로를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에이미는 절반쯤 자의로 죽었고 그 일로 그가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짐작했으니까.

    다만 비가는 크루엘로가 잠깐 슬퍼하다가도 곧 털어 낼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가 세상 사람들을 다 에이미로 부르게 됐다는 건,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래, 저번에는 존스 씨한테도 에이미라고 불렀다니까?”

    “그 사람은 수염이 북실북실 난 아저씨잖아. 머리도 빨갛고.”

    “예전에는 금발에만 반응했다는데 이젠 아무한테나 그런대. 에이미 아가씨와 비슷한 사람한테는 더 빈도가 높고. 저택에 남은 금발, 이제 너뿐인데 조심해야지.”

    동갑내기 하녀, 다이애나는 동생을 대하듯 엄중히 경고했다.

    “요즘 사용인들이 줄줄이 저택을 나가는 것도 다 소공작님 때문이잖아.”

    “……으응.”

    “너도 창문에서 떠밀리거나 화분에 얻어맞거나 광란의 칼질 앞에서 벌벌 떨긴 싫을 거 아니야.”

    “그런데 진짜 그것 때문일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잖아.”

    “뭐, 소공작님을 감시하다 걸려서 요절 낸 거라는 소문도 있긴 한데.”

    “그건가 봐!”

    “헛소문이야, 비가. 감시하라고 시킨 게 원로님들이라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다이애나의 칼 같은 말에 비가의 안색은 외려 환해졌다.

    어처구니가 없어 다이애나는 한 소리를 해 주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네가 무슨 걱정이겠어. 소공작님 생활 반경과 청소 구역도 다른데.”

    “다이애나도 나랑 같은 구역이면서.”

    “프레드가 나갔잖아. 다음 주부터 나더러 소공작님의 방을 청소하래. 어쩌지? 난 금발은 아닌데 키가 작아서 좀 무서워.”

    “어……. 그러면 그거 내가 할까?”

    비가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미쳤어? 여태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들어 봐봐. ‘에이미’라고 부르다가 상대가 그……분이 아니란 걸 알면 화를 내신다며? 모르면 되잖아.”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위험할 때 내가 그 아가씨인 척 흉내 내면 어떻게든 넘길 수 있지 않을까?”

    “들키면.”

    “도망가야지.”

    실로 허술하고 뻔뻔스러운 계책이다.

    다이애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너 또라이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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