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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96화 (96/162)
  • 96화

    그래, 솔직히 원로회에서 제일 누명을 씌우고 싶은 건 나겠지.

    엘린이 죽었다고 한들, 나는 여전히 성직자였고 그들의 적이었으니까.

    대원로는 나이젤리아와는 파벌이 다르다고 하니 그 또한 나를 페불라 악신설의 제물로 삼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소설 쓰는 것 같으면 말해 줘요.”

    “아니, 그럴싸해 보여요. 정치적으로 공격해 들어온 전적도 있잖아요?”

    “그렇단 이야기는, 자네를 필두로 한 검은 뱀 교단이 나를 죽이는 장면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거로군?”

    “추측이지만요.”

    “그러면 그 과정을 영상구로 기록해 둘 가능성이 크겠어. 변신 마법을 써서 가짜 시오라 보네티를 내세운 다음에 말이야.”

    “전하의 말씀에 동의하지만, 저라면 영상구보다는 통신구를 쓸 겁니다.”

    “아, 현장에서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맞아요, 달링. 생각보다 그런 구슬이 튼튼하지 않거든요. 기록은 반대쪽 통신구로도 할 수 있으니까.”

    영상구가 아니라 통신구라.

    그 말에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통신구면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죠? 마나를 역으로 추적할 순 없어요?”

    “부하한테 일을 떠넘겼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겠지만요.”

    “글쎄. 그토록 신원을 감추는 이가 가까운 부하를 뒀을지조차 의문이군.”

    “뭐, 그 일의 책임자가 4원로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만요, 운이 따라 주면 잘 풀리겠죠.”

    그리고 황태자가 함정에 달려들기 전에 줄리안의 정보가 들어왔으니, 우리의 운은 괜찮아 보였다.

    기나긴 논의 끝에 결론이 나왔다.

    그렇게 작전명 ‘눈에는 눈, 가짜에게는 가짜로’가 시작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믿을 수 있는 조사관들로 잔뜩 더미를 만들고 의심 가는 스파이와 함께 지하로 들여보낸다.

    이때, 더미들에게 폭발 마도구를 잔뜩 쥐여 주고 터뜨리면 모든 걸 깔끔히 끝낼 수 있다.

    이러면 언데드 흑마법사들도 줄일 수 있고, 더미 마법에 속아 넘어간 내 원한도 풀고.

    통신구 추적만 잘 되어 주면 정말 더할 나위 없겠는데 말이야.

    첩자에게 들킬지 몰라, 가까이에서 구경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쉬울 따름이다.

    다소 먼 거리에서 대기하다가 땅을 울리는 굉음을 들으니 괜히 심장이 뛰었다.

    “아, 언제 와!”

    초조해 내뱉기가 무섭게 내 근처의 공간이 울렁였다.

    곧바로 크루엘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곧장 그의 손을 확인했다.

    통신구가 들려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나는 비장하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가 통신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바로 출발할까요.”

    머뭇거릴 이유가 없지.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하여 우리가 향한 곳은 어느 저택의 정문 앞이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줄리안이 이런 머리는 좋네요.”

    줄리안이 앞서 털어놓은 추측들이 떠올랐다.

    “좁혀 놓은 후보가 둘 정도 있습니다.”

    “그 원로의 정체를 아는 건 대원로와 2원로 정도인 듯했습니다.”

    “어쨌거나 교단의 일에는 개입하고 있으니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화이트데저트 내 어느 정도 지위가 있고 흑마법을 익히지 않은 데다가 의심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인물.”

    “마침 그 가문에, 병약하단 이유로 틈만 나면 방에 처박히는 자가 둘 있었습니다.”

    첫 후보는 나 또한 껄끄럽게 여기던 이였고.

    “하나는 에덴 화이트데저트입니다. 어릴 땐 건강했으나 아내와 사별 이후 스트레스로 발병했습니다. 황궁 도서관과 저택 외에 오가는 곳이 없어 개인 시간이 많은 듯하더군요.”

    그다음 후보는.

    “다른 하나는 테타니오 화이트데저트입니다. 이쪽은 선천적으로 병약한 환자입니다. 공작 대리의 업무를 수행할 때 말고는, 맡은 일이 없어 거의 방에서만 생활하는 걸로 압니다.”

    전 공작 대리로 크루엘로의 숙부였다.

    그리고 줄리안이 의심했던 이들은 모두 눈앞, 대원로의 저택에 거처하고 있었다.

    기껏 추적해 놓은 좌표에 후보 둘이 같이 있다는 게 황당했지만, 어쨌거나 신빙성은 늘었다.

    “일단은 들어가 보죠. 도망치면 곤란하니까요.”

    크루엘로가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마차도 없이 사람이 나타나 당황스러웠는지 경비가 입을 벌렸다.

    “……공작전하?”

    “에덴을 만나러 왔네. 문을 열도록.”

    “아! 알겠습니다.”

    경비병이 허둥지둥 문을 열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섰다.

    대원로는 자리를 비운 듯했다.

    저택 전체에는 검은 마나의 기운이 물씬 풍겼으나 흑마법사를 찾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저택의 주인을 대신하여 우리를 맞은 이는 줄리안이 점찍은 후보 1번이었다.

    “크루엘로!”

    이번엔 안경을 안 끼고 있네.

    연갈색 장발의 사내가 다급히 뛰쳐나왔다.

    도서관에서 봤을 때보다 마르고 초췌한 꼴이 정말, 영락없이 아픈 사람이었다.

    에덴이 반갑게 인사했다.

    “어쩐 일이야, 네가 와 줄 줄 몰랐는데. 아, 레이디 시오라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의례적으로 건넨 안부 인사에도 그는 수줍게 웃었다.

    이렇게만 보면 나이에 비해 그저 순수한 사람 같은데 왜 이렇게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에게 살갑지 않은 건 크루엘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삭막한 목소리로 곧장 물었다.

    “뭘 하고 있었어, 에덴.”

    “응? 아, 그냥 온실에서 꽃을 좀 다듬고 있었어.”

    차가운 말씨에 기가 죽었는지 에덴의 기세가 살짝 위축되었다.

    그러며 손을 꼼지락거리길래 시선을 내려 보니 안개꽃 한 송이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안개꽃?

    설마 황태자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 조화를 다듬고 있었나?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또라이다.

    “실은…… 곧 아내의 기일입니다.”

    “아.”

    “사별한 지 이제 3년이 되네요.”

    에덴은 눈을 내리깔고 슬프게 웃었다.

    아니, 저번에도 그렇고 이 사람과 엮이면 매번 타이밍이 왜 이래?

    의심을 좀 하려고만 하면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이제 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무덤에 올릴 꽃 정도는 직접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음, 그러시구나……. 아내분이 좋아하시겠어요.”

    “언제부터 다듬었어?”

    “어? 40분쯤 됐나.”

    크루엘로는 옆에 있던 집사에게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그녀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에덴의 말대로라고 대답해 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별거 아니야. 바쁜가 본데 하던 일 하러 가, 다듬어야 할 안개꽃이 많잖아?”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야?”

    “그랬지. 이젠 숙부님을 좀 뵙고 싶은데.”

    “아.”

    에덴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대굴대굴 눈동자를 굴렸다.

    저번에 에덴의 이야기를 할 때도 느꼈지만, 사이가 왜 이렇게 됐담?

    내가 대원로의 아들을 의심하는 것과는 별개로 크루엘로의 언행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에이미일 땐 정말 잘 따랐는데 못 본 새 크게 싸웠나?

    “그래, 가 볼게.”

    노골적인 냉대에 시무룩해진 에덴은 바깥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그는 머뭇거리며 다시 내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집사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레이디 시오라,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는 걸 압니다만.”

    “네, 말씀하세요.”

    “몸조심하세요, 저희 아버지께서 레이디께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음.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은밀히 속삭인 것치곤 그 내용이 부실해 당황스러웠다.

    내 반응에 무어라도 더 말해 줄 것처럼 에덴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오래간만에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레이디 시오라. 다음에도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가 다시 바깥으로 멀어졌다.

    싸늘한 분위기에 덩달아 얼어 있던 집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테타니오 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는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았고 차를 거절하고 사용인이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마자 크루엘로는 곧장 입을 열었다.

    “에덴은 아닌 것 같네요.”

    “이유는요?”

    “여기 온실도 통창이에요. 오가며 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며 통신구로 영상을 기록하진 않았겠죠.”

    논리적인 추론에는 아무런 기꺼움이나 유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채색의 목소리라서, 나는 조금 더 두 사람 사이의 일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에덴이 아닐 거라고 하니 묻는 말인데요. 혹시 대원로가 내놓은 자식이에요? 흑마법을 익히지도 않았고, 교리 공부도 안 하는 것 같고, 레카논의 폭도 때는.”

    “인질이 되기도 했고?”

    “아내가 사별했다니 그것도 좀…….”

    줄리안이 말해 줄 때 처음 안 사실이 크루엘로가 겪은 일과 겹쳐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에덴이 무고하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요?”

    “……솔직히 말해서 그건 아니요.”

    “왜요?”

    “그냥 직감이 별로예요.”

    친근한 듯하면서 불쾌한 인상.

    도서관에서 그를 봤을 때 든 느낌은 시간이 지나도 엷어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성력만 느껴졌다면, 나는 단번에 그를 초대 교주 후보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근거? 그런 건 직감으로 충분하다. 교단에 달리 수상한 사람도 없고.

    아, 잠깐만!

    “혹시 에덴이 입양아는 아니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아니에요. 에덴을 받은 산파도 살아 있을걸요.”

    “크면서 바꿔치기 된 건─.”

    “에덴이 앓고 있는 병이 친조부 쪽 유전이에요.”

    “……하긴, 생각해 보니 그런 노괴물이 병에 걸릴 리는 없겠네요.”

    “그러고 보니 달링은 입양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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