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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95화 (95/162)
  • 95화

    황태자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분위기로 보아 이미 짐작했던 말이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크루엘로가 물었다.

    “단순히 큰 힘을 동원한다고 해서 모조리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원로회와 검은 뱀이 연결되는 증거만 잡으면 돼. 이후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자네도 함께 엮여 들 일이 없도록 원로회 선에서 정리하리라 약속하지.”

    “화이트데저트가 통째로 무너지더라도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반역의 혐의를 지우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크루엘로는 내 쪽을 한 번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주제가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일이 조금만 삐끗해도 전하는 살해될 겁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네. 일이 잘못되든 말든 간에 나는 언젠가 암살될 예정이야.”

    무도회장에서 황태자에게 달려들던 암살자들이 떠올랐다.

    익숙해 보이더라니, 그게 한두 번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녀는 제 죽음을 입에 담고도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황족으로 태어난 의무라도 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황태자의 말에 나는 조금 감명받았다.

    권력자의 입에서 ‘의무’란 말을 듣기는 처음인 것 같다.

    행동으로 치자면, 미뉴엣이 보여 주긴 했는데 어쨌든.

    내 안에서 황태자의 이미지가 달라졌다. 피곤한 사람에서 용감한 사람으로.

    그건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죄송한데 줄리안만으로 엮긴 힘들 거예요.”

    줄리안을 꾀어낸 원로는 철저하게 정체를 감춘 데다가, 그의 몸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도 사라졌다.

    꼬리를 자르려거든 얼마든 자를 수 있는 상황이다.

    “생각이 확고하신 것 같은데 혹시 기존에 생각하시던 방법이라도 있었나요?”

    “……있었지. 내게 공교로운 정보 하나가 들어왔었네만.”

    “오, 말씀해 주실래요?”

    황태자는 다소 씁쓸한 어조로 제게 들어온 정보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나는 크루엘로와 눈빛을 교환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해 볼까요.”

    ***

    검은 뱀 교단의 두 번째 본거지가 드러났다.

    수도 외곽의 조그만 영지.

    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깊은 지하에 그들의 다른 신전이 있었다.

    비밀 조사관의 총책임자인 황태자는 그 일을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그녀는 조사관들을 대동하고 몸소 움직였다.

    메리 놀즈는 그 틈에 섞여 있었다.

    놀즈 자작가의 차녀로 태어난 그녀는 오로지 실력만으로 비밀 조사관 제의를 받았다.

    또한, 그 실력만으로 검은 뱀 교단의 원로에게 첩자로 선택됐다.

    ‘내 결정이 옳아.’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정도를 걸어서는 더 올라갈 자리가 없다.

    그러니 다른 줄을 잡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그녀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황태자를 몸소 죽음의 무덤으로 끌고 들어가면서도 그녀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다만 거사를 앞두고 긴장되는 것까진 어쩔 수 없어서 자꾸만 손에 땀이 맺혔다.

    마침내 본거지에 다다른 황태자가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 순간, 메리 놀즈는 은밀하게 숨겨 둔 통신구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구슬은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을 남김없이 다른 곳에 보여 줄 것이다.

    “검.”

    황태자의 말에 수장이 그녀에게 검을 건넸다.

    스르릉, 날이 검집을 나오는 소리가 스산했다.

    “이외의 출구는.”

    “없습니다.”

    “외부 게이트.”

    “봉쇄했습니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만, 30분까지는 도망치지 못할 겁니다.”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조사관 하나가 숨겨져 있던 개폐 장치를 조작했다.

    끼이익, 철문 열리는 소리가 공간에 섬뜩하게 울린다.

    황태자와 조사관들은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메리 놀즈도 재빠르게 뒤따랐다.

    모두가 들어선 즉시, 철문이 도로 벌린 입을 닫았다.

    쿵!

    그들이 마주한 건 처음에는 새까만 어둠이었다.

    그러나 문이 닫힌 순간부터 벽면에 걸린 마석 램프에 하나씩 불이 들어왔다.

    가까운 데서부터 아주 먼 곳까지.

    들어온 정보에 비해 공간은 터무니없이 넓었고, 어둠인 줄 알았던 그 검은색은 모두가 사람이었다.

    산양 가면과 검은 로브를 착용한.

    비릿한 냄새가 공간을 진동했고, 마치 몬스터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음산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황태자가 입매를 비틀었다.

    “절반 이상이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적의 전력이 온전한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전하. 잘못된 정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죽었다는 원로들은.”

    “새로 충당된 이들이라면 물론 살아 있어요.”

    교인들의 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체구가 작은 여자.

    그녀가 후드를 벗자 푹신한 금발이 쏟아지고 가면을 벗자 눈에 익은 얼굴이 드러난다.

    섬세한 선이 화려한 이목구비를 그리는 가운데, 죽음을 연상시키는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녀는 얼굴을 굳힌 황태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황태자전하. 저희 오래간만에 뵙죠?”

    “……시오라 보네티.”

    시오라 보네티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변신 마법을 쓴 가짜라고 들었지만.’

    메리 놀즈는 영상구에 그녀의 모습이 잘 들어가도록 자리를 잡았다.

    황태자가 죽는 것보다도 지금 순간을 찍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자네가 정말로, 나이젤리아의 후인이었던 모양이군.”

    “여기까지 와서 변명할 필요는 없겠죠? 맞아요, 전하.”

    “황제폐하 앞에서의 반론들은 다 뭐였던 거지?”

    “그야 눈속임이죠. 덕분에 제가 검은 뱀이라 의심하는 사람은 싹 사라졌잖아요?”

    그녀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옥에 가서 들으세요. 제가 죽인 사람이 아주 많이 있을 테니까요.”

    “……이 자리를 벗어나면 반드시 네 목을 효수하겠다.”

    “노력해 보시든가요.”

    가짜 시오라는 크게 웃으며 뒤로 빠졌다.

    그 순간 교인들의 마나가 들끓었고 조사관들도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기 전에 메리 놀즈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소란 속에서 달아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철문은 안쪽에서 열 수 없었기에 그녀가 향한 곳은 미리 이야기를 들은 비밀 통로였다.

    흑마법으로 철저히 은폐되어 아는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통신구를 아무렇게나 품에 넣고, 그녀는 잽싸게 통로 안을 내달렸다.

    터질 듯한 심장 박동 위로 희열과 기대감이 번져 갔다.

    ‘이제 내 앞은 탄탄대로야!’

    비밀 조사관의 신원은 그 수장과 황태자밖에 모른다.

    이대로 그들이 모두 죽어 나가면, 제가 비밀 조사관이었으며 그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조차 묻힐 것이다.

    그러면 저는 교단이 쥐여 주는 영광을 안전하게 누리면 된다.

    마침내, 메리 놀즈는 지상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지하에서부터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신전이 다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뭐야.”

    그녀는 당황하며 제가 나온 통로 쪽을 돌아보았다.

    언데드가 된 마법사들이 비밀 조사관과 황태자를 처리하는 계획이 아니었나.

    신전을 무너뜨린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마음 안쪽에서 기이한 불안감이 싹텄다.

    그리고 그때.

    “경위가 궁금한가? 메리 놀즈.”

    익숙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메리 놀즈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며 돌아본 곳에는 땅에 묻혀 죽었어야 할 이가 서 있었다.

    “나도 참 궁금해, 내 안목이 얼마나 형편없으면 몸소 뽑은 조사관이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지.”

    “황, 태자전하……? 그, 그게 아닙니다.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

    “뒷말은 조사실에서 듣겠네.”

    목덜미를 얻어맞은 메리 놀즈가 쓰러졌다.

    바닥을 구르는 통신구를 주워 들며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신자가 있다면 필히 그녀일 거라 추측했고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으나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잘못된 칼을 고른 게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하나 지금은 제 심란함을 달랠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뒤쪽에 나타난 인물에게 구슬을 던졌다.

    “뒤는 맡기겠네, 크루엘로.”

    “마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어깨를 으쓱인 크루엘로는 통신구를 가지고 사라졌다.

    시오라 보네티에게로 가겠지.

    황태자는 고개를 돌려, 제 조사관들이 잔뜩 모인 자리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설명을 전해 듣지 못한 탓에 그들은 혼란스러워 보였으나 지금은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메리 놀즈부터 체포하도록.”

    “……예, 전하.”

    불면증만 아니라면 사흘 밤낮은 자고 싶은 기분이었다.

    ***

    인생사 모든 게 운으로 결정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황태자에게 두 번째 신전에 대한 정보가 들어갔다.

    그녀는 조사관들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마침 내가 피운 난리로 교단의 절반 이상이 죽었으니 남은 이들을 습격해 원로회와의 접점을 찾아내려 했다고.

    위험할지언정, 승산은 있어 보이는 결정이었다.

    그러니까, 죽은 교인들의 시체를 재활용할 수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언데드를 이용해 나를 잡으려 했던 모양이지. 자네들이 줄리안 미네르바를 끌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겠더군.”

    황태자는 쓰게 웃었다.

    “안 그래도 의심 가는 수사관이 하나 있었는데, 더 빨리 정리했어야 할 모양이야.”

    화가 나는 건 이해하지만, 상황이 이상했다.

    “좀 의아하네요. 황태자전하를 죽이기 위해 그렇게까지 일을 꾸밀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제 말은, 솔직히 전하는 아무 때나 죽일 수 있잖아요. 굳이 언데드를 대동해서 죽여야 하는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요. 앗, 기분 나쁘신 거 아니죠?”

    나처럼 크루엘로가 붙어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일신상의 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녀를 보호해야 할 황제는 검은 뱀에 제대로 대적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솔직히 죽이려고 제대로 마음먹으면 언제든 가능하지 않을까?

    황태자는 눈가를 찡그렸으나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부정할 생각은 없으니 어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는군.”

    “그럼에도 그 방식을 써서 얻는 게 뭘까요. ‘검은 뱀이 황태자를 죽였다’는 건 전혀 의외롭지 않잖아요. 어차피 나쁜 놈들이란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 ‘검은 뱀’에 다른 사람을 끼워 넣을 수 있으면 목적이 생기겠네요? 이를테면…….”

    말끝을 흐리며 크루엘로가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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