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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65화 (65/162)

65화

접선일은 이미 알고 있다.

조사단원을 만난 날로부터 열흘 뒤랬던가.

정확한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날짜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음.

“2월 8일이네.”

얼마 안 남은 건 알았는데 겨우 하루 남았어.

바로 내일일 줄이야, 갑자기 부담감이 두 배로 뛰었다.

물론 내가 누군지도 모를 ‘직속 선배’에게 로브를 전할 의무는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게 나뿐이다 보니 신경 쓰인다.

그런데 2월 8일, 2월 8일이라……. 왠지 익숙한 날짠데.

“혹시 이날 다른 약속이 있었나?”

“시오라 아가씨, 베티입니다. 서재에 계십니까?”

“응, 들어와. 무슨 일?”

“공작전하께서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크루엘로……?”

“말씀하시길 당분간 일이 많아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으니 연락이 없더라도─.”

“크루엘로!”

내가 외친 소리가 베티의 말을 끊어 먹었다.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어쨌거나 내 머릿속은 시원해졌다.

그래, 2월 8일! 내일은 크루엘로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바쁘다고?”

“네? 아, 네. 그래서 나중에 연락드리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응접실에서 자던 모습과 얼굴 가득 차올랐던 피로감이 떠올랐다.

그래 봐야 허수아비 공작이면서 왜 그리 바쁘담.

이렇게 되면 생일이 아니라 기일이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도 약혼한 마당이니, 선물이라도 사 두는 게 좋을까? 어차피 아레스도 죽었는데.

나갔다 올까 고민하던 때, 이번에는 집사가 서재에 들이닥쳤다.

“시오라 아가씨, 소몬 후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모로 안 도와주는군.

역시 크루엘로는 운이 없다.

***

나이젤리아 화이트데저트는 오늘도 검은 장갑을 끼고 왔다.

저번보다는 좀 짧았으나 늘 손을 가리니 의심이 든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열쇠 손에 있어요?”

“드디어 물어보는구나. 늘 쳐다보길래 언젠가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지.”

“오, 대답해 주시려고요?”

“아니.”

입이 왜 저렇게 무거워.

나는 불만스럽게 그녀를 노려봤다.

“실험을 진행하던 중, 불에 크게 덴 적이 있다. 한쪽만 끼고 다니긴 꼴이 우습지 않겠니?”

“음.”

실험을 진행하다가 벌을 받은 거였구나.

더는 잡담하지 않겠다는 양, 나이젤리아가 기세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이로구나.”

“그러게요.”

나는 긴장감 없이 답했다.

사실상 두 번째에서 내 몫은 끝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 번째 시험은 교단 물갈이, 난도가 아무리 높아졌다 한들 이제는 크루엘로의 몫이었다.

나이젤리아는 꼿꼿이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이 평소보다 어두워 보였다.

“이전에 시험을 치른 아이들은 마지막이 유독 어렵다고 하소연했다만, 너는 긴장하지 않는구나.”

“음. 왜 그러는지 아시면서.”

그녀가 묘하게 웃었다.

그래 봐야 그녀에게도 아쉬운 게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최종 보상은 열쇠라고 하셨죠, 분명히.”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단다. 정해진 규칙을 망가뜨리는 건 연구자로서도 내키지 않거든.”

“그러면 이제 마지막 과제를 내 주세요.”

“기다리거라.”

피곤하게 왜 시간을 끈담.

밖에 나가서 뭐라도 사 와야 하는데 평소답지 않은 짓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도 나이젤리아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정적을 못 참고 내가 다시 입을 열려던 때.

삐빅, 높다란 소리가 울렸다.

근원지는 나이젤리아의 품.

그 울림이 귀에 익어 눈가를 찡그리는데, 그녀가 동그란 구슬을 꺼냈다.

큐딜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통신구였다.

구슬이 붉게 물들더니, 너머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2원로님.]

나이젤리아는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나직하게 말했다.

“3차 시험이 준비됐구나.”

“음, 잘됐네요?”

“보여 주거라.”

짧은 지시에 통신구가 잠시 검은빛으로 뒤덮였다.

어둡고 흐리멍덩한 색채가 점차 선명해지며 어떠한 광경을 묘사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그 모양새를 구경하다가 멈칫했다.

통신구에 비치는 건 웬 청년이었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의자에 묶여 축 늘어진 남자.

공간은 어두웠으나 벽에 걸린 마석 램프 덕분에 체격 정도는 볼 수 있었다.

결정적인 건 그의 머리칼.

램프의 주황빛 조명이 미끄러져 비춘 곳에 찬란한 은발이 반짝였다.

얼굴의 일부가 가려진 상태로도 그는 지나치게 가보트 보네티를 닮았다.

나는 잠깐 멈추었던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질 나쁜 장난을 참 열심히도 하시네요.”

“절실한 인간이야말로 내면의 잠재력을 다 끌어낼 수 있는 법이지. 어떤 기분이 들었니?”

“미안한데 이런 걸로 안 속아요. 조금 전에도 가보트와 이야기했거든요.”

“그래. ‘조금 전’에 말이지.”

나이젤리아는 조금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정말로 가보트를 납치해 인질로 삼았다고 주장하듯이.

말려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만다.

“…….”

나는 응접실에 비치된 종을 울렸다.

곧, 베티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나이젤리아가 자연스럽게 통신구를 가렸다.

“부르셨어요, 시오라 아가씨?”

나는 곧바로 물었다.

“가보트, 지금 어디에 있어?”

“가보트 공자님께서는 현재 외출 중이십니다.”

심장이 덜컥 흔들렸다.

밖으로 나갔다고?

“언제.”

“네가 서재로 들어간 직후란다.”

“……30분쯤 전입니다.”

나이젤리아와 베티의 말이 일치한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시녀는 도르르 눈을 굴렸다.

“혹시 긴요한 용무가 있으시다면 돌아오시는 대로 전하겠습니다.”

“아니야, 베티. ……알았으니 나가 줘.”

베티는 머뭇거리면서도 응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공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심장이 무거워진 것처럼 가슴 안쪽에서 존재감을 알려 왔다.

음, 침착하자.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진지해지지 마.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익숙한 말을 되뇌며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 가보트라는 거죠.”

“아직도 못 믿겠다면 그래, 이 아이의 비명이라도 들려줄까?”

“그딴 건 됐어요.”

나는 억눌린 숨을 터뜨리듯 내뱉었다가 고개를 들어 나이젤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입매가 절로 일그러졌다.

그래.

“교단을 청소하는 게 목적이란 말, 순순히 믿은 내가 바보인 거지?”

더는 존대로 말을 꾸밀 가치조차 없었다.

“거짓말이라면 크루엘로가 알았겠지. 진심이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권력에 눈이 먼 불신자들을 지워 버리고 싶거든.”

“그러면─.”

“일의 중요도가 바뀌었을 뿐이야. 원한다면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지만 괜찮겠니?”

이번에 나이젤리아는 조그만 모래시계 하나를 꺼내 내려 두었다.

“네게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

“너무 어렵게 생각할 건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험’이니까. 가능성이 있어야 불나방이라도 달려드는 법이지.”

웃고 있는 나이젤리아의 눈에는, 안광 한 점 들지 않았다.

“30분간은 어떤 교인도 신전 내에 가보트 보네티가 갇혀 있는 건 모를 거란다. 그간에 구해 내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하. 지금 인질 앞에 서 있는 건 교인이 아닌가 봐?”

“통신구를 내버려 두고 저 아이는 떠날 거란다. 네가 룰을 어긴다면 자리로 돌아가 인질을 처리하겠지만.”

용건을 마쳤다는 듯이 나이젤리아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걸 보면서도 나는 그 옷자락조차 붙잡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시험이란다, 시오라. 인질을 구해 보렴. 물론 이번에도 참가는 너 혼자 해야 해.”

“…….”

“티파티 때처럼 눈감아 주는 일은 없을 거다. 크루엘로에게 연락하는 그 즉시, 저 아이는 죽을 테니까.”

그녀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고 응접실을 나섰다.

“행운을 비마.”

쿵, 문 닫히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지금은 얼빠진 패배감에나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나이젤리아가 두고 간 통신구와 모래시계부터 챙기고는 내 방으로 달려 올라갔다.

이 상황이 의아했는지 베티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를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방에 숨겨 둔 사제복을 꺼내고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잠깐 멈칫하기도 했다.

로브는 조사단원에게 받은 것과 원래 있던 것, 두 가지가 있었는데 고민하다가 전자를 입었다.

그러고서 뱀 반지를 손에 끼우고 가면을 쓰려던 순간,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베티였다.

그녀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것도 캐내지 않고 다만 물었다.

“공작전하께 연락드릴까요?”

“아니.”

나는 즉답했다.

크루엘로를 대동하면 나는 안전하겠지만, 인질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나이젤리아는 이미 경고했고 크루엘로에게 가보트는 가치가 없었으니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나는 말을 조금 바꾸었다.

“30분이 지나면 연락해 줘.”

그러고는 더 답을 듣지도 않고 반지를 문질렀다.

시야가 한 번 울렁이더니 눈에 익은 골목길이 나타났다.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대낮이었으나 여전히 인적은 없었다.

나는 패를 사용해 두 번째 게이트를 통과하고 곧장 지하로 내려갔다.

달리듯 빠른 걸음 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울렸다.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이고 있으니 그제야 이성이 머리를 내밀었다.

정말 이게 맞아?

가보트에게 정이 든 건 알겠는데, 이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그 애가 중요해?

어설픈 영웅 심리에 도취된 건지 가족 놀이에 흠뻑 빠진 건지.

원래의 나라면 고르지 않았을 선택지에 당연하단 듯 손이 간다.

함정인 걸 알면서 걸어 들어가는 게 처음은 아니다.

약혼식 날 화이트데저트의 마차에 오를 때도 그랬고, 보네티의 가주 시험에 참관하면서도 그랬다.

그러나 그때는 위험할 거란 생각 자체가 없었다.

적어도 크루엘로가 함께 있었으니까.

음.

생각하던 중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다리는 곧 다시 움직였지만, 의문은 남는다.

“언제부터 의존한 거지?”

처음엔 크루엘로가 원로회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게 반가웠을 뿐인데 왜.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와 그를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했다.

나는 늘 혼자서…….

“지금이 다른 생각을 할 땐가.”

짝, 나는 내 양 뺨을 힘차게 내리쳤다.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하든 간에 나는 이미 선택했기에 최선의 결과를 내야 한다.

잡념은 나중으로 미루자.

막 마음을 다잡은 순간, 내 몸은 철문 앞에 다다랐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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