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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64화 (64/162)

64화

크루엘로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깊게 팬 눈꼬리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짧게나마 온기가 닿았던 이마 부근을 만져 보다가, 힘없이 웃었다.

“여전히 믿는다고? 나를.”

처음으로 꿈에 나와 해 준 말이란 게 터무니없다.

에이미는 역시, 거짓말쟁이다.

죽은 사람이라면, 유령이라면 제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알 텐데.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막상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나올 때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개운했다.

그의 시선이 달력에 닿았다.

“얼마 안 남았네.”

제 생일이 코앞이었다.

그래서 이런 꿈을 꾼 건가. 아니면 그 말 때문이려나.

“나를 믿어요.”

“믿을게요. 후회하지 않게 해 줘요.”

꿈에 논리적인 트리거가 있을 리 없지.

크루엘로는 픽 웃고는 생각을 흩뜨렸다.

난데없는 꿈 때문에 마음속에 이상한 감정이 차올랐으나 여운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최근 그는 정말로 바빴으니까.

그럼에도 침실을 나서는 몸이 평소보다 가벼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동굴의 호수 바로 앞에 고꾸라진 시신은 처참한 꼴이었다.

독을 들이켜 낯빛은 파리했고 몸에는 성한 곳이 없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은 그런 시체의 곳곳을 살피는 중이었다.

무리의 틈을 가르고 나이젤리아가 앞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2원로님.”

“확인했나.”

“예, 전 10원로가 확실합니다.”

그 말에 나이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불현듯 물었다.

“딜런은.”

“머리칼 하나 남지 않게 잘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네.”

나이젤리아의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의 수하는 더 깊이 머리를 숙였다.

“다만 전하와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한 정보는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발설 금지 저주라도 걸어 두었나 보지. 되었다. 크루엘로가 아무에게나 빈틈을 보일 아이는 아니니, 그쯤은 변수도 아니야.”

“황실 조사단원은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두어라. 이번에도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을 게 뻔하니까.”

“예, 2원로님.”

필수적인 사항들을 되짚은 뒤, 그녀는 시신 옆에 국화 한 송이를 내려 두었다.

“모를 일이야, 살아온 세월도 노력도 재능도 그 자그만 여자아이한테 밀릴 아레스가 아닌데 어떻게 일이 이리되었는지.”

나이젤리아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진실한 동정이었다.

이 모든 일을 유도한 게 그녀 본인인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어느덧 그 긴 세월이 다 지나가고 거사일이 가까워지는 때였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는 훌륭하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외모, 혈통, 재능 등 모든 것이 빛났으며 세뇌마저 스스로 벗어 버렸다.

대원로는 그걸 일이 잘못되어 가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크루엘로를 다시 통제하려 했으나 나이젤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이미 절반쯤은 크루엘로를 제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이젤리아는 열쇠를 다 모아 모리온을 취하는 것이 크루엘로의 자의적인 선택이길 바랐다.

그렇기에 큐딜의 죽음을 방관했고 제 열쇠를 내어 주기로 했으며 아레스를 깔끔히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아레스는 멍청하지는 않았으나 제 아랫사람을 얕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기에 제가 진정으로 딜런을 협박해 쥐락펴락하고 있다고 믿으며 나이젤리아가 만들어 둔 길을 걸어갔다.

끝내는 죽음까지도.

‘어떻게 그 아이를 동굴로 유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세세한 사정 같은 건 중요치도 않았으니까.

“사체는 거둬 주려무나. 그래도 교단을 위해 일한 아이니.”

“예, 2원로님.”

그 말을 끝으로 2원로는 몸을 돌렸다.

일이 예정대로 진행된 걸 확인한 이상, 더는 동굴에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강렬한 정령의 기운에 파묻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아주 가느다란 무언가가 그녀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나이젤리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미뉴엣 보네티의 핏자국이 고여 있는 부근.

노인은 느릿하게 걸음을 떼어 그 지점에 멈추어 섰다.

“허.”

허공에 뻗은 손에서 전기가 튄 듯이 찌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시간이 지나 잔량은 몹시 미미했지만, 그 자리에 피어났던 건 분명히 성력이었다.

“동굴에서 나온 게 누구라고 했지.”

“예? 보네티 백작과 시오라 보네티입니다.”

“그렇군. 왜 그런 아이와 가까이 지내나 했더니.”

미약하나 내내 신경 쓰이던 호기심에 답을 찾았다.

나이젤리아의 입매가 길쭉이 늘어졌다.

조금 시험해 보되 크루엘로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내버려 두고 존중하려 했다.

하나 일이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지.

“대비책을 여럿 깔아 두면서도 불필요한 강박증이라고 자책했는데 이게 다 당신의 뜻이셨군요.”

“2원로님?”

“계획을 바꿔야겠다. 대원로께 연락드리거라.”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눈에는 진득한 살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

아레스를 처리한 이후, 나는 약간의 여유를 얻었다.

나이젤리아가 아직도 세 번째 시험을 내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나는 마믹에게서 받아 온 기록을 살필 수 있었다.

들었던 대로 자료의 80%는 대륙 공용어로 적혀 있었으나 딱 두 자료만 고대 신어로 쓰여 있었다.

전자는 마믹에게 들은 내용을 상세히 늘여 쓴 게 전부여서 볼 건 없었다.

주목해야 할 건 후자.

보네티에서 본 일기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기록이었다.

“음.”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살폈으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보네티에서 읽었던 과거를 다른 시점으로 기록한 게 대부분이었다.

정령사로 바뀐 보네티를 은근슬쩍 험담하는 내용도 끼어 있었지만, 유의미하게 주목할 부분은 하나뿐.

「성자께서 레카논의 성물을 전해 주셨다.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함께 주셨는데 그것이 의아하여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해 주셨다.

‘저는 고대신의 성력이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하면 교단이 품을 수 있는 교인 또한 늘어날 테니까요. 정령은 개중 하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시험해 보고 싶다라, 볼수록 수상쩍다.

수백 년 전의 사람이 아니었으면 단번에 흑막으로 지목했을 것이다.

지금은 흙으로 돌아갔을 테니 따져 물을 수도 없었지만.

그 외에 고대 신어로 적힌 자료는 다음과 같았다.

「페불라의 8계명.

하나, 모든 일은 정해져 있나니, 흐르는 대로의 자연스러운 삶을 받아들이라.

하나, 주어진 이야기를 엿보는 것은 오로지 페불라의 인도 아래서만 가능할지니 그 종의 말만을 거룩한 등불로 삼으라.

하나, …….」

우리 신전에서 백 번도 넘게 읽은 8계명.

보는 것만으로 질려서 눈으로만 대충 훑고 자료를 치워 버렸다.

그러고 나니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다 봤네.”

황궁 도서관, 수도의 대신전 도서관에 보네티, 마지막으로 마믹.

있을 수 있는 곳은 다 뒤졌다.

다른 나라에 기록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그 일들을 한데 묶어 정리하면 이렇다.

수백 년 전에 페불라의 성자가 인신 제물을 바쳤고─혹은 그게 누명이라도─ 그 일로 교단은 쫓겨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무리는 세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는 푸가 신전의 사람들. 비밀스럽게 숨어든 내 선조들이다.

두 번째는 정령사로 보네티의 선조들이며, 마지막은 마믹의 선조로 망해서 평민이 된 이들이다.

객관적인 사실은 이게 끝.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페불라 악신설 증명 불가능.”

어쩔 거야, 수백 년 전 사람들을 살려 내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나는 그냥 마음 편한 쪽으로 결론짓기로 했다.

“고로 페불라는 무죄, 땅땅땅.”

왜요. 결과를 모르는데 내가 그걸로 골머리를 썩어야 합니까?

나는 내 뿌리를 찾으러 밖으로 나온 게 아니다.

해야 할 일은 세계 멸망을 저지하는 것뿐이요, 그 일을 시킨 게 페불라니 아무렴 내 신이 악신은 아니실 거다.

속 편하게 생각해야 마음의 병이 안 걸리는 거야.

정리하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이제 본업에만 집중하자.

아, 그 전에.

시야 한 귀퉁이에 걸린 쪽지로 눈이 간다.

「겨울. 가장 낮은 곳. 아리스타타.」

“…….”

시일이 지나면 뭔가 번뜩 떠오를 줄 알았는데 여전하군, 후후.

누가 내 머릿속에도 레몬즙을 뿌려 놨나 보다.

그때 이후로 시일이 제법 지났으니 접선일도 가까워졌을 텐데 알아 낸 게 하나도 없었다.

달리 바쁜 일이라도 있으면 남의 사정이야 신경을 껐겠지만, 마침 한가한 데다가 조사단원이 알아낸 교단의 비밀이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고민할 머릿수라도 늘리기로 했다.

사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서 하나 발견했다.

“가보트!”

가보트와 책이라니, 그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물어서 손해 볼 건 없지.

나는 기습하듯 소리쳤다.

“겨울! 가장 낮은 곳! 아리스타타!”

뜬금없는 단어의 나열에 가보트가 눈가를 찡그렸다.

“뭔 퀴즈야? 겨울에 저지대에서 아리스타타가 핀다, 뭐 그런 뜻이야?”

“피다니? 그거 꽃이야?”

“그것도 모르면서 뭘 물어본 거야.”

내가 신전 도서관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는 해도 식물도감을 들여다보진 않았다.

그게 꽃 이름인지 나무 이름인지 내가 어찌 안담.

어쨌거나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크. 역시 내 선견지명이란.

“이것도 그 원로회 일이냐?”

“아니, 이건 다른 쪽.”

“가만 보면 너, 은근히 바쁘다? 쉬지 않고 뭘 계속하고 있어.”

“그렇지, 그래서 가끔은 가보트가 부러워.”

“너 그거 무슨 뜻이야. 야, 시오라! 어디 가! 이리 안 와?”

나는 가보트의 손길을 쓱 피해서 백작저의 서재로 도망쳤다.

식물도감을 펼치자마자 아리스타타를 찾을 수 있었다.

A로 시작했으니까.

내용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아리스타타는 다양한 종류가 있고 생김새도 피우는 시기도 크기도 제각각이며 어떻게 길러야 하고 이러쿵저러쿵.

이게 암호 해석에 도움이 될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일단은 마저 읽었다.

꽃말이나 아리스타타에 얽힌 전설은 그래도 읽을 만했다. 그리고…….

“어, 이거!”

「아리스타타는 5월 19일의 탄생화이기도 하다.」

날짜가 나왔다.

그러면 혹시 접선 날짜는 5월 19일……!

“……일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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