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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91화 (29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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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105화

    처음 칼리두 와탕카가 에오스의 격을 흡수했을 때, 그때만 해도 제우스의 마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순식간인 것도 물론 있었지만, 저걸 먹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그의 행동을 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놈의 두 번째 계략, 헤라클레스와 아테나의 격 절반을 흡수할 때는 막고 싶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냐고? 간단하다.

    그걸 막으면 격의 맹약이 깨져버리고 만다. 두 지배자의 격이 맹약의 대상에게 넘어간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인가? 희생양으로 자처할 때부터, 아니, 혼돈의 군주와 접촉했을 때부터……?’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

    당했다. 칼리두 와탕카에게, 아니, 중간계에서 올라온 벌레 이안 페이지한테 꼼짝없이 당해버렸다.

    [……그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성 싶으냐? 네가 아무리 강해졌기로서니, 여기 모인 지배자 전원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당연히 감당할 수 없겠죠. 하지만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누가 되었든 제우스 님을 위해서 나서는 최상급 지배자가 있다면, 저는 바로 그분을 공양물로 선택할 건데.”

    누구든 이 상황을 바꾸고자 나서만 봐라. 가장 먼저 나서는 자를 제우스 대신 공양물로 바칠 테니.

    그것은 여기 모인 모든 지배자들을 향한 경고였다. 특히나 그 대상인 최상급 지배자들이 움찔거렸다.

    제우스를 위해서, 혹은 제우스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순간 공양물로 전락해버린다. 최상급 지배자들 중 누구도 그것을 원하진 않았다.

    “다들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셨다고 믿습니다. 제우스 님을 대신해서 희생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야…… 말리지는 않도록 하지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는 명백한 경고였다.

    […….]

    그리고 그 경고는 제대로 먹혔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으니까.

    오죽하면 친 제우스파로 분류되는 지배자들조차 입을 꾹 다물겠는가?

    [……아레스, 내 자랑스러운 아들아. 무어라 말을 해보아라. 어서!]

    [아, 아버지…… 저는…….]

    [내 용맹한 아들 아폴론, 헤르메스, 그리고 내 딸 아르테미스여! 지금 당장 반역자의 수급을 이 아비에게 바쳐라! 그리한다면 내 너희들의 공로를 결단코 잊지 않으리.]

    [아, 아버지…….]

    [헤라, 나를 좀 도와주시오. 그대의 반려가 위기에 빠지지 않았소?]

    […….]

    [올림포스의 지배자들이여! 그대들의 왕, 나 제우스가 명하노니, 당장 저 간악한 반역자 놈을 처단하라!]

    […….]

    제우스가 외쳤다.

    핏줄, 권위, 소속에 기대어 자신을 도와달라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선뜻 나서기에 이안의 경고가 너무 강력했고, 오랜 세월 제우스를 향하여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불만과 원성 역시 한몫 단단히 했다.

    “호소는 다 하셨습니까?”

    [……칼리두 와탕카, 정말 끝까지 가보자는 건가? 누가 더 큰 피해를 입을지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과연 네놈의 정체를 혼돈의 군주께 알려도 무사할 수 있겠느냐?]

    제우스가 쥐고 있는 칼리두 와탕카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정체.

    그가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에서 온 이안 페이지라는 사실이다.

    그 말에 이안의 정체를 알고 있던 또 다른 최상급 지배자 하데스가 흠칫했다. 제우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이건 금시초문인데?

    “아, 그거.”

    그러나 이안의 반응은 달랐다.

    전혀 당황하지도, 그 당혹감을 숨기기 위하여 횡설수설하지도 않았다.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긋 고개를 주억거리며 읊조릴 뿐이었으니, 제우스는 이게 당혹감을 숨기기 위한 연기인지 진짜인지 당최 분간이 안가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마음대로 하십쇼.”

    [……뭐?]

    “혼돈의 군주한테 일러바치든 말든, 알아서 해보시라고요.”

    [네놈, 어디서 객기를…….]

    “말 나온 김에 당장 확인해볼까요? 그게 정말 저한테 큰 타격을 줄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닐지.”

    그것은 권유가 아닌 통보였다.

    지배자로 등극한 이안은 다른 지배자들이 하는 것처럼 외침에 격을 담을 수 있었으니, 하늘 정원 위로 솟아오른 시계탑의 최정상을 향하여 있는 힘껏 외치기에 이르렀다.

    [혼돈의 군주시여! 당신께서 명령하셨던 인신공양의 제물이 결정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만족하실만한 제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하니, 부디 군주께서 친히 내려오시어 판단을 해주시길 청하옵니다!]

    이안의 외침이 시계탑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우스마저 압도하는 격의 소유자 아니겠는가? 최정상에 군림하는 아버지든, 주로 최하층 지하 연구실에 기거하는 혼돈의 군주든, 누군가의 귀에 확실히 들어갔을 터.

    쿠궁!

    바로 그 순간.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쿠궁! 쿠궁! 쿠궁! 쿠궁……!

    반복된다. 또한 가까워진다.

    시계탑 내 누군가가 이곳 하늘 정원을 향하여 무수히 많은 문을 통과하며 접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마침내 하늘 정원으로 통하는 시계탑의 거대한 흑요석 문이 활짝 열렸으니, 그 너머로 이안의 부름에 응한 혼돈의 군주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턱을 넘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우둔하고 변덕스러운 아버지께서 식사를 앞당기길 바라셨는데, 마침 잘 되었군. 책임자를 잘 골랐다니까?]

    온통 그림자만으로 가득한 그 존재의 입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래, 너희 중 누가 아버지께 바쳐질 영광을 누리게 되었느냐? 내 딱 보고 판단을 내려주도록 하지.]

    모든 지배자들 앞에 나타난 혼돈의 군주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더 재밌게 흘러가는 것 같았거든.

    “여기 계신 올림포스의 수장, 제우스라면 아버지께서 만족하시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뭐? 제우스를? 저 친구가 그걸 받아들이겠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지금 눈빛만 봐도 그렇고.]

    “그건 전적으로 군주님과 아버지께서 해결하실 문제죠. 저희는 그저 정해 드릴 뿐입니다. 최상급 지배자를 바치라 하셨으면 그 정도는 분담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흐음, 하긴, 그것도 그런가?]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혼돈의 군주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안의 말에 깊이 공감하는 눈치였다.

    [……뭐, 우리 아버지 입장에서야 제우스면 한 끼 식사로 더할 나위 없는 보양식이긴 한데, 이거 좀 미안하군. 설마 제우스 그대가 제물로 꼽힐지 몰랐거든. 그간 함께 한 세월이 있는데…… 쓰읍, 이것 참.]

    그러면서도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제우스는 그 반응에 호소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혼돈의 군주시여! 이는 저 간악한 칼리두 와탕카의 간계입니다! 혹 군주께서는 놈의 정체를 알고 계시는지요?! 저놈은 우리들의 동족이 아닙니다! 무려 첫 번째 중…….]

    [알고 있다.]

    [……예?]

    [설마 그대도 아는 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오만이로군.]

    [그, 그걸 아시면서 어찌…….]

    [난들 아나? 모두 우리 우둔하신 아버지의 뜻인데, 아, 그러고 보니 제우스 그대도 곧 알게 되겠군. 그분과 한몸이 될 예정 아닌가?]

    […….]

    혼돈의 군주도 칼리두 와탕카의 정체를 안단다. 제우스가 쥐고 있던 동아줄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어이가 없군. 해서, 나를 그 눈깔 괴물 앞에 던져주시겠다?]

    동아줄이 끊어진 이상 제우스에게 일련의 모든 상황을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갈 방법은 존재치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힘으로 저항할 수밖에.

    [혼돈의 군주여, 너희들이 우리 행성을 침략한 이후로부터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여긴다면 그것은 정말 크나큰 오산이다. 우리는 언제나 너희들을 몰아내고 이 말도 안 되는 통치에서 벗어나기만을 기다려왔지. 그리고 준비해왔노라.]

    제우스가 그리 읊조리며 양팔을 뻗자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번개로 이루어진 창이 나타났으니, 그 창의 이름은 아스트라페와 케라우노스였다. 지난 수만 년간 제우스의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이고 네놈과 한통속인 저 반역자 놈도 죽여 슈페리어의 근간을 바로 잡겠다! 그뿐인 줄 아는가? 그 즉시 혼돈의 전당으로 진격하여 너희 침략자들을 뿌리째 뽑아주지. 그 꼴사나운 눈깔 괴물까지 함께 말이다.]

    제우스의 선언을 시작으로.

    번개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그 먹구름과 번개는 제우스의 충실한 종이었으니, 그가 지목한다면 누구든 무지막지한 벼락을 떨어뜨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만일 내가 여기서 혼돈의 군주를 꺾는다면, 그리고 저 존재의 격까지 먹어치울 수 있다면…… 지배자들은 다시 한 번 나에게 복종할 것이다.’

    제우스가 생각했다.

    이건 새로운 기회라고.

    자신의 입지를 더욱 돈독히 만듦과 더불어 반역자를 처단하고 새로운 세력을 구축할 기회라는 거다.

    [호오.]

    그리고 그 새로운 야망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한 제우스를 빤히 바라보며 혼돈의 군주가 호를 그렸다.

    [순순히 나올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만, 아예 반항하고 나설 줄은 몰랐군. 하긴, 우리에게 처절히 패배했던 것도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지. 지금 그대의 반응처럼 망각해버릴 만큼 말이야.]

    상대가 누구든 그 자리에서 박살 내버릴 것만 같은 뇌전의 기운 아래에서, 온몸이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혼돈의 군주가 중얼거렸다.

    [그래, 뭐, 이참에 새로 각인시켜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마침 너희 족속들이 한자리에 다 모여 있으니, 이만한 기회가 또 없겠구나.]

    그는 제우스의 하극상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강을 바로잡을 기회로 여긴 듯 자신의 검보랏빛 그림자를 사방으로 방출하며 제우스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럼 어디 한 번 구경해볼까?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서 오랫동안 갈고 닦았다는 그 묘기를, 만약 조금이라도 나를 놀라게 하거나 상처를 입힌다면…… 그땐 제우스, 그대의 처분을 다시 고려해보도록 하지.]

    제우스와 혼돈의 군주.

    올림포스 전당의 수장과 혼돈의 전당의 이인자이며 실질적인 수장이 역사상 두 번째로 맞붙는 순간.

    쿠구구구구구구구궁……!

    그 시작은 제우스였다.

    그의 정수가 담긴 수만 갈래 낙뢰가 오직 혼돈의 군주만을 집중적으로 포격하였으니, 순간 하늘 정원 전체가 엄청난 지진을 일으켰다.

    ‘단숨에 끝낸다. 아무리 놈이어도 이 모든 것을 막아낼 수는 없어.’

    본디 이 기술은 언젠가, 혼돈의 전당과 두 번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시계탑 최상층에 퍼부을 작정으로 만들었던 기술이다. 바로 그곳에 군림하는 괴물, 눈먼 아버지를 비명횡사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무려 그런 비밀병기를 눈먼 아버지가 아닌 혼돈의 군주에게 퍼부었으니, 아무리 놈이어도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실망스럽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만발하기 시작한 먼지바람 속에서 혼돈의 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이 정도로 우리를 몰아내니 마니 한 건가? 음, 그렇다면 더더욱 실망스러울 것 같군. 좀 더 대단한 걸 기대했거든. 예컨대…….]

    혼돈의 군주가 잠시 말꼬리를 흐리는 그때, 목소리가 흘러나온 먼지바람 안쪽으로부터 아주 커다란 그림자 손아귀가 튀어나와 제우스의 머리통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바로 이런 거라든지.]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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