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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82화 (28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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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96화

    로난의 본명, 페사낙스.

    그 이름을 부르며 나타난 이안의 모습에 로난은 아무 대응 없이, 그저 올 것이 왔다 싶은 표정이었다.

    “……그분을 만나셨나 보군요.”

    그분.

    포세이돈을 뜻할 터.

    이안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거기다 지금 탑주님께 느껴지는 격까지 고려해 본다면…… 이미 지배자의 격을 허락받으신 겁니까?”

    로난의 눈에 이안은 모든 과업을 통과하고 지배자의 격까지 얻어낸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게, 하급 지배자쯤이야 쉬이 꺾을 만큼 강대한 격이 느껴졌으니까.

    “아뇨, 아직은 아닙니다. 이제 열한 번째죠. 이번 과업의 계시자가 그쪽이 말하는 그분이겠고요.”

    “그, 그럼 수행자의 몸으로 그만한 격을 쌓았다는 겁니까……?”

    “뭐, 어쩌다 보니.”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로난의 표정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보통이 아님은 알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일 줄이야.

    “……솔직히 놀랐습니다. 얼마 버티지 못하실 줄 알았으니까요. 죽거나, 중간에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로 생각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이네요. 중간계인 맞습니까?”

    “맞을 겁니다. 아마도.”

    이쯤 되니 이안도 자신이 순수한 중간계인 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걸 확신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하고 뒤집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놀란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간 어떻게 연기하신 겁니까? 마나 호흡법만 알려줘도 눈빛이 초롱초롱하셨는데, 설마 그것들이 다 연기였을 줄이야…….”

    “아, 그건 연기 아닙니다. 마법이라는 거, 저한테는 뭐랄까요? 처음 접하는 학문? 기술? 아무튼 많이 흥미로웠습니다. 탑주님께서 지도편달을 해주신 덕분에 7클래스까지 올라오기도 했죠. 제 본신의 힘을 쓰지 않고 말입니다.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로난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장난을 치는 건지, 진심인지.

    아직 모르겠다. 좀 더 지켜보자.

    “아무튼, 그분을 뵙고 오셨다는 건…… 아마 저를 찾아오라고 하셨겠죠. 그게 과업이실 테고요.”

    “잡아 올 수 있으면 잡아 오고, 녹록지 않으면 그냥 로난 님께서 수집해놓은 자료만 챙겨오라더군요.”

    “역시, 그분들 하는 일이 다 그렇죠. 포세이돈뿐만 아니라 전부 다요. 헤스티아 정도를 제외하면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 세계로 치면…… 그냥 반사회적 인격자들의 집합소잖아요? 힘만 셀뿐이지.”

    로난은 자신도 모르게, 혹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을 ‘우리 세계’라고 칭했다.

    또한 지배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였으니, 이쯤 되면 그가 어째서 잠적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탑주님.”

    아주 잠깐의 침묵.

    그것을 깨는 쪽은 로난이었다.

    그는 정체가 탄로 났음에도 여전히 이안을 탑주님이라고 불렀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실 줄 압니다. 그래도 한 말씀만 드리자면, 저는 로난으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이제 그냥…… 로난으로 살다 죽고 싶어요. 그게 답니다.”

    그냥 로난으로 살다 죽고 싶다.

    그게 익숙하고, 전부일 뿐이란다.

    물론 저런 말 몇 마디로 진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로난이라는 역할 놀이에 충실했다는 거, 그거 한 가지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로난으로 살다 죽고 싶다, 그 말씀은 이제 이쪽이 더 소중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비슷합니다. 더 정겹고, 편안하지요. 솔직히 이젠 페사낙스라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하거든요. 다른 사람 이름 같고 그럽니다. 하하.”

    “그런데 왜.”

    허허 웃는 로난에게 이안이 무척 싸늘한 눈빛과 목소리를 쏘았다.

    “아무것도 안 합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가 더 정겹고 편안하면, 그만큼 더 소중해졌으면, 지킬 생각부터 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요.”

    소중하다면서 왜 포기하느냐?

    뭐라도 해야지. 그게 정상이다.

    “……다 아니까요.”

    그러나 로난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생각을 고쳐먹은 지 오래였다.

    “그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그들이 재구성을 결정했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다 아니까, 방법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으니까, 어쩌겠습니까? 포기할밖에.”

    로난이라고 처음부터 포기했을까? 그럴 리가, 그 역시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만큼 이 세계가, 로난으로서의 삶이 좋았다.

    “물론 탑주님의 성과는 대단하십니다. 중간계인의 몸으로, 지배자의 격조차 받지 않았는데도 벌써 제 본신을 뛰어넘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겁니다. 그들은…… 탑주님께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합니다. 겪어보셨을 것 아닙니까?”

    아, 물론이다.

    겪어봤지. 진절머리가 날 만큼.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포기할 생각 따윈 없는데.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당신한테 희망이나 주려고 여기 온 거 아닙니다. 오히려 죽이러 왔죠. 포세이돈이 심어놓은 첩자니까요.”

    로난한테 희망이나 주려는 게 아니다. 그저 포세이돈의 첩자 페사낙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왔을 뿐.

    다만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서 이야기를 들어준 거다.

    “그러니 죽기 싫으면 여기가 더 좋다느니, 어떻게 될지 알아서 그렇다느니 하는 헛소리 말고, 무엇이 되었든 행동으로 증명하세요.”

    헛소리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

    이미 한 번의 기회는 지나갔다.

    여태껏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따라서 이건 마지막 기회인 셈.

    이안이 로난을 차갑게 노려봤다.

    여차하면 정말로 죽일 기세였다.

    “…….”

    로난이, 혹은 페사낙스가 두 눈을 감았다. 고민이 필요한 순간일 터.

    “……좋습니다. 행동으로 보여 드리죠.”

    찰나의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

    로난이 왼쪽 팔을 길게 뻗었다.

    그러고는 쭉 펼친 손바닥 위에 어떤 푸른색 기운을 끌어모았다.

    그 기운은 곧 구체의 형태를 이루었는데, 어딘가 많이 익숙했다.

    “이건 제가 올림포스 전당의 하급 지배자 페사낙스로 살아오면서 한평생 쌓아 올린 격입니다.”

    그것은 바로 페사낙스의 격.

    그 힘이 응집된 덩어리였다.

    어쩐지 익숙하구나 싶더라.

    “이게 없으면, 저한테는 페사낙스의 흔적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오직 그린리버 제국 상아탑에 소속된 7클래스 고위마법사 로난 시어러만 남게 되는 것이죠.”

    그리 읊조린 페사낙스이자 로난이 자신의 격 덩어리를 이안에게 건넸다. 가져가라는 제스처였다.

    “탑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말씀하신 증명이 되겠습니까?”

    격을 내어 드리겠다.

    이러면 증명이 되겠느냐.

    실로 파격적인 행보에 증명을 요구했던 이안마저 잠시간 침묵했다.

    “……아시다시피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이런 횡재를 거절할 생각 따윈 없습니다. 나중에 돌려드릴 생각 역시 없고요. 그래도 후회 안 할 자신 있으십니까?”

    물론 그 침묵이 길지는 않았다.

    거절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후회할 일 없습니다. 페사낙스라는 이름도, 그 이름이 가진 역사도, 이미 오래전에 버렸으니까요.”

    전부 다 버렸다.

    대신 그 빈자리에 오직 하나.

    로난 시어러라는 이름만 있을 뿐.

    “저는 로난입니다. 로난 시어러요. 상아탑의 7클래스 고위마법사이며, 다혈질이지만, 마법적 역량을 키울 수 있다면 한참 어린 후배 마법사한테도 머리를 조아릴 줄 아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페사낙스가 아닌 로난 시어러.

    다시 한번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진 그가 끌어모은 격의 구체를 이안에게 넘겼다. 이제 정말 돌이키기 어려운 강을 건넌 거다.

    “…….”

    이안이 페사낙스의 정수가 담긴 결정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망설이는 것이 아닌, 정말 격이 담긴 구체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정말 격이 담긴 결정체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격만 남겨놓았을 뿐, 하급 지배자로서 모든 격을 이 구체에 담아놓았다. 한데 이걸 이안에게 준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당장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냥 들켜서, 포세이돈 앞으로 끌려가기 싫어서 이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긴 합니다. 제가 그분의 부름을 무시하고 잠적한 세월이 꽤 길어서요. 이대로 잡혀가면 죽겠죠. 그분께서 가장 싫어하는 게 하극상, 배신, 명령 불복종, 뭐 그런 종류니까요.”

    하극상, 배신, 명령 불복종.

    그런 것들을 싫어한단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다만 그 전에, 제가 어째서 그분의 부름을 무시해가며 로난으로 살기를 고집하는지, 그 부분도 한 번만 고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그 부분을 고려했으니 대화라도 나눈 겁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빈틈 보일 때 제거했겠죠.”

    “…….”

    그 말이 진심임을 잘 알기에, 로난은 아무런 푸념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잘 받겠습니다. 근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요. 한 가지만 더 받도록 하죠. 거기까지 가면 어느 정도는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페사낙스가 아니라 로난이라는 주장 말입니다.”

    이안의 말에 로난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무려 격까지 바쳤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몹시 크다.

    결백을 주장하려고 이안의 눈앞에서 할복한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한데 부족하단다. 더 필요하단다.

    로난은 섭섭함을 느꼈으나, 표출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 또한 페사낙스로서의 업보 아니겠는가?

    “……무엇이 더 필요하신지요?”

    “기억을 좀 읽겠습니다. 당신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겸사겸사 쓸 만한 정보도 있으면 챙기고요.”

    “기억……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슈페리어 쪽에서 적응하는 데 큰 힘이 된 마법이죠.”

    “…….”

    기억을 내놓아라.

    그 말에 로난이 고민했다.

    모든 기억을 보여준다는 것.

    결백 여부를 떠나서 꺼림칙한 일이잖아? 그냥 막연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로난으로 살 수 있다면, 알겠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기억도, 격도, 원하신다면 다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그 꺼림칙함을 참으면, 당분간은 계속 로난으로 살아갈 수 있잖아?

    그럼 감내해야지. 별수 있나?

    “선택 잘하셨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이안이 꽤 오랜만에 메모리 이터 주문을 발동시켰다. 대상은 로난.

    혹은 포세이돈의 부하 페사낙스.

    그 한 명이면서도 두 명의 기억을 모조리 빨아들일 때쯤, 이안은 비로소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네요.”

    눈앞에 이 중년인은 페사낙스가 아닌, 그저 상아탑의 7클래스 고위마법사 로난 시어러라는 점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난 님. 제가 없는 동안 별일 없으셨지요?”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사낙스는 죽었다. 정확히는 이안이 죽였다.

    그렇게 보고할 것이고, 이안이 취한 페사낙스의 격이 증거가 될 터.

    이제 돌아가서 로난에게 받은 기록을 포세이돈에게 넘기면 끝이다.

    한데 영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고향 땅을 밟았다.

    시간도 없을뿐더러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 일부러 오지 않았던 고향,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

    조금만 움직이면, 아니 움직일 필요조차 없다. 텔레포트 주문 한 번이면 그리운 얼굴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가족들, 어머니, 아버지, 아내 하이리, 더글라스, 그리고…….

    ‘……요하나.’

    그렇게 한참을 배회했다.

    자신의 저택, 페이지의 장원.

    그 일대를 하염없이 서성거린 끝에 내린 결론은 이전과 같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안은 자신을 안다.

    만나는 순간 무너진다.

    아닌 것처럼 보여도, 굉장히 위태롭게 꾸역꾸역 버티는 중 아닌가?

    ‘모든 걸 끝낸 다음, 그때.’

    가족들에게는 미안하다.

    특히 요하나에게 미안했다.

    오랫동안 곁을 비우지 않겠노라 약속했건만, 지키기가 쉽지 않다.

    ‘미안해요. 다들.’

    그로부터 얼마 후.

    페이지 일가의 저택 마당에 어떤 새싹이 태어났다. 그 싹은 굉장한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 커다란 사과나무로 거듭났는데, 놀랍게도 그 나무에서는 무척 향기롭고 달콤한 황금빛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졌다.

    그것은 이안이 몰래 심어놓고 떠난 황금 사과 씨앗과 격이 담긴 마법의 결과였으니, 미안한 마음을 꾹 눌러 담은 나름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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