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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81화 (28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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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95화

    “이름은 나중에 정해줄게. 나도 작명에는 영 소질이 없어가지고.”

    작명에 소질이 없는 건 이안도 마찬가지, 그러니 일단은 보류다.

    “그럴싸한 이름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냥 팡이라고 부르지 뭐, 일단 지팡이는 맞으니까?”

    착각이겠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팡이’를 뒤로한 채.

    (크로미에 이어서 팡이라? 계약자의 취향이 의심되는구나.)

    그리고 팡이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마도서 크로미를 뒤로한 채.

    “후우……!”

    이안이 열한 번째 과업의 계시자를 본떠 만든 석상 앞에 섰다.

    풍성한 수염과 다부지고 각진 쾌남형 얼굴이 인상적인 석상이었다.

    ‘열한 번째 계시자는 분명…….’

    하데스에게 속성으로 들었던 ‘12과업 지배자 공략법’을 따르면 이번 계시자는 올림포스 전당에서도 가장 강한 3인으로 꼽히는, 일명 ‘삼황’에 속한 최상급 지배자였다.

    ‘하데스도 이 지배자만큼은 감이 통 잡히지를 않는다고 했지. 그러니 이번에는 알아서 잘 해보라고.’

    새삼 어렵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지배자라니.

    첫 번째 계시자였던 아프로디테와 처음 마주한 순간이 떠오른다.

    왠지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석상 생긴 것만 봐도 녹록지 않아 보이긴 해. 하기야…… 하데스조차 파악하지 못한 지배자이니.’

    과연 어떤 성향의 지배자일까?

    괜히 긴장된다. 흥미롭기도 하고.

    ‘우선 공양부터…….’

    이안이 평소처럼 아공간 주머니에서 황금 사과를 꺼냈다. 어느덧 프로메테우스의 보물 창고에서 챙겨온 사과가 얼마 남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직 나머지 과업의 공양물로 바칠 만큼은 남아 있었다.

    ‘공물로 바칠 만한 물건 중에서는 가장 값어치 있고 그럴싸하니…….’

    상대가 뭘 좋아할지 모른다? 그럼 일단 황금 사과부터 바치고 보는 거다. 그만큼 지배자란 족속들이 사족을 못 쓰는 과일이니까.

    하다못해 술까지 만든다잖아?

    이 황금 사과로 말이다.

    달그락!

    이안이 커다란 공양그릇에 황금 사과 한 개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러자 곧 석상의 얼굴에 푸른색 안광이 들어왔으니, 이 존재가 바로 열한 번째 과업의 계시자였다.

    [늦었군.]

    그 지배자의 첫마디는 그랬다.

    무척 오만하고 고압적인 목소리.

    이어지는 말의 내용도 그러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 것이고.]

    그래, 안다. 모를 리가 없지.

    저 오만한 말투와는 별개로 올림포스 전당의 삼황 아니겠는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그드라실의 아홉 세계를 관통하는 모든 물줄기의 지배자, 포세이돈 님.”

    이그드라실의 아홉 세계를 관통하는 모든 물줄기의 지배자, 무려 시계탑 명부에 등재된 명칭이었다.

    [아주 멍청하지는 않나 보구나.]

    실로 거창한 이명의 주인 포세이돈이 별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난 이 과업이라는 거, 별로 즐기지 않는다. 딱히 맡길 일도 없을뿐더러, 맡길 만한 심부름거리를 짜내는 것도 곤욕이거든. 항상 데메테르나 디오니소스처럼 할 일 없는 놈들한테 맡겨왔지. 헌데…….]

    “맡길 만한 일이 생기셨나 보군요.”

    이안의 적절한 대꾸에 포세이돈이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약간의 뜸 들임 끝에 나지막이 경고했다.

    [……건방지군. 감히 수행자 따위가 내 말꼬리를 잘라먹는 건가?]

    아, 이런 타입이구나.

    자칫 큰 실수할 뻔했다.

    정말 아마추어 실수 말이다.

    “송구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아서…… 마음이 앞섰나 봅니다.”

    [수행자 대부분이 딱 그맘때쯤에 죽더군. 꼴을 보아하니 네놈도 곧 네놈 선배들을 따라가겠는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부디 포세이돈 님께서 넓으신 아량으로 살펴주시길.”

    이안의 정중한 태도에 조금은 마음이 풀린 걸까? 더는 별다른 언급 없이 과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주는 포세이돈이었다.

    [첫 번째 중간계.]

    “……?”

    [그곳들 좀 다녀와라.]

    첫 번째 중간계.

    바로 이안의 고향.

    갑자기 거긴 왜……?

    아직 인신공양을 준비하려면 멀었잖아? 설마 계획이 바뀐 걸까?

    “……가서 무얼 하면 됩니까?”

    [나만의 세계를 갖고자 한다.]

    이건 또 뭔 뜬금없는 소리야?

    갑자기 나만의 세계가 왜 나와?

    [나와 함께 삼황이라고 불리는 지배자들, 제우스와 하데스는 모두 자신들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제우스는 우리 올림포스 전체를 다스리고, 하데스는 명계를 다스리지. 아스가르드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동급의 지배자들 중 오직 나만이 아무것도 다스리지 않아.]

    제우스, 하데스, 포세이돈.

    올림포스 전당의 삼황 중 둘은 모두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 전당 자체가 곧 그의 세력이며, 하데스는 죽은 자들의 땅 명계를 통치한다.

    그에 비해 포세이돈은 아무것도 통치하지 않았다. 분명 그들과 함께 삼황으로 거론될 만큼 높다란 격과 지위를 갖추었음에도 말이다.

    그는 평소 그것이 불만이었다.

    자신도 제우스와 하데스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싶었다.

    다른 지배자들처럼 중간계 중 일부를 갖고 노는 소꿉놀이가 아닌.

    오롯이 한 세계를 갖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포세이돈의 취향과 신념으로 탄생한 세계.

    그런 세계를 갖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고, 마침내 방도가 생겼다.

    [아는지 모르겠다만, 첫 번째 중간계는 곧 재구성이 시작된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그 위에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예정이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 비극을 막는 것이,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뿌리째 뽑아 제거하는 것이 슈페리어 차원으로 숨어든 이안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니까.

    [바로 그 재구성이 끝난 첫 번째 중간계를 내가 통치하기로 했다.]

    “……네?”

    [오직 나만의 취향과 신념에 맞추어 새로운 문명을 쌓아 올릴 계획이다. 이미 혼돈의 군주께 허락까지 받아놓았지. 그분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평의회의 의견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해.]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

    곧 아무것도 남지 않을 그 세계 위에 독자적인 영역을, 오직 포세이돈의 취향만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나는 새롭게 태어날 첫 번째 중간계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아름다운 수중 국가를 건설할 게야. 그 어떤 중간계의 제국이나 왕국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그런 수중 국가 말이지.]

    세계 전체를 바다로 만든다. 그리고 그 바다에 수중 국가를 세운다.

    [아틀란티스, 그것이 내가 구상한 첫 번째 중간계의 새 이름이다.]

    설명을 끝낸 포세이돈의 안광이 희열에 가득 찬 듯 일렁거렸다.

    단지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평생의 숙원이었으니까.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 네놈에게 맡길 임무는 간단하다. 아직 재구성이 완료되지 않은 첫 번째 중간계로 가라. 가서 내 부하를 찾아.]

    “부하…… 말씀이십니까?”

    [꽤 오래전에 후보지를 찾으려고 파견했던 놈이다. 다른 중간계로 보낸 놈들은 문제가 없는데, 유독 첫 번째 중간계로 간 그놈만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닿지 않더군.]

    “…….”

    [내가 직접 가는 순간 냄새를 맡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촉 하난 기가 막힌 놈이거든. 그러니 이번 일은 네놈에게 맡기도록 하지. 숨은 거라면 찾고, 봉변을 당했다면 놈이 파악한 정보만 가져와도 좋다.]

    찾아내서 끌고 와라.

    정보만 가져와도 좋다.

    그리 읊조린 포세이돈이 자그마한 수정구를 공양그릇으로 보냈다.

    그 수정구에는 어떤 이의 생김새와 정보가 담겨 있었는데, 받자마자 머릿속으로 쭉 빨려 들어왔다.

    본연의 모습과 변장한 모습.

    본명과 가명, 진짜 목소리와 가짜 목소리, 성격, 양쪽 세계에서의 소속, 위치, 능력에 이르기까지.

    ‘……어?’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은 놀라움을 느꼈고, 그런 기색을 감추고자 부지런히 노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변장 이후의 모습이 제법 눈에 익었거든.

    ‘이건 눈에 익은 수준을 넘어서…… 내가 아는 사람이잖아?’

    분명히 아는 자다.

    칼리두 와탕카로서가 아닌, 이안 페이지로서 아는 사람 말이다.

    그것도 꽤 가까운 사이다.

    [페사낙스, 녀석이 그 첫 번째 중간계에서 쓰는 이름은 로난 시어러, 웬 되도 않는 요술사 노릇을 하며 숨어든 것으로 알고 있다.]

    로난, 로난 시어러.

    상아탑의 7클래스 마법사.

    이안을 제외한 첫 번째 중간계의 현존 인간 마법사 중 최강자.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끊긴 부하란 아무래도 그를 뜻하는 것 같다.

    아니, 이쯤 되면 확실하다.

    ‘로난이 포세이돈의 부하였다고?’

    * * *

    상아탑의 고위마법사.

    혹은 상아탑주 대행.

    로난 시어러는 첫 번째 중간계로 파견된 지 어느덧 50년 차를 맞이했다. 이를 고향의 시간으로 환산한다면…… 글쎄, 얼마나 되려나?

    ‘……처음에는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 많이도 변했군.’

    그는 상아탑주 대행으로서 상아탑 꼭대기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보조 마법사가 타다 준 커피 한 모금 홀짝이며 상아탑주의 통상적인 업무를 보는 것, 이것이 요즘 그가 신경 쓰는 일의 전부였다.

    고향도, 중간계와 고향의 분쟁도.

    또한 그 고향으로 넘어간 이안 페이지도, 지극히 평범한 업무를 보는 순간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잖아? 나는 이제 로난으로서의 삶이 좋아졌는걸.’

    시계탑의 지배자이며 포세이돈의 부하 페사낙스가 아닌, 그린리버 제국 상아탑의 이인자 로난으로 사는 것, 그는 그게 좋았다.

    그로 살며 얻은 인망, 인맥, 지위, 문화, 생활양식, 기타 모든 것이 다 좋았다. 페사낙스로 살 때보다 훨씬 더. 이유는 글쎄, 잘 모르겠다.

    그냥 좋다. 익숙하기도 하다.

    페사낙스보다 로난이라는 이름이.

    그 이름으로 불리고 대답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제아무리 이안 페이지가 대단하다고 한들 실패할 수밖에 없다. 평의회에서 재구성이 결정된 이상 거스를 수 없어. 그러니 나는 마지막까지 이 삶을, 로난으로서의 시간을 지키고 싶다. 단지 그뿐이야.’

    만약 재구성이 시작된다면?

    그때는 과연 어찌해야 할까?

    다시 페사낙스로 돌아가서 포세이돈에게 용서부터 구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함께 죽을까?

    그린리버 제국의 고위마법사, 상아탑주 대행, 그저 마법에 미친 놈.

    로난 시어러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피식 웃은 로난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상아탑주 대행으로서 몇 가지 서류에 사인하고는, 이내 집무실 테라스로 나와 도시를 바라봤다.

    그린리버 제국의 수도 그린리버디움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전경.

    이제 이 풍경을 감상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새삼 아쉽다.

    아니, 이건 아쉬움을 넘어선 무언가다. 가슴 한편이 아려왔으니까.

    “뭘 그리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이쪽 사람도 아니시면서.”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익숙한 음성이기도 했다.

    “아니면 정말 우리 쪽으로 기울기라도 한 겁니까? 이걸 뭐라고 하더라? 감화? 아니, 동화였던가요?”

    “……!”

    흠칫 놀란 로난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급히 살폈다.

    그곳에는 언제 나타난 건지 밝은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는 누군가가 상아탑주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타, 탑주 님……?”

    “오랜만이네요. 로난 님. 아니, 페사낙스 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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