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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149화 (149/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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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49화

    59. 계기가 필요할 때(3)

    “아, 스승님!”

    이안을 발견한 공주 하이리 그린리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가뜩이나 화사한 미모가 더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마께서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미리 연락을 주시지 않고.”

    “그게…… 재단! 재단 일로 이안님께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어차피 바로 옆이잖아요?”

    “페이지 재단은 전적으로 마마와 어머니의 소관 아닙니까? 제가 대답 드릴 게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그, 그거야 전 도움만 드리는 처지니까요. 재단의 공식적인 책임자는 스승님과 페이지 부인 두 분이랍니다. 서류상으로도 그렇고요.”

    어쨌든 대화를 해야겠다. 그런 의지가 공주로부터 느껴졌다.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저러는 걸까?

    “……일단 앉으시죠.”

    이안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공주 역시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바로 반대편에 앉아 얼굴을 맞대었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들어보겠습니다.”

    “네?”

    “그 하실 말씀.”

    “아!”

    왠지 모르게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공주 하이리, 그녀가 꼭 쥔 두 주먹을 허벅지 위로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

    “우선, 재단의 예산에 대해서 상의를 드리고 싶은 것이…….”

    그로부터 이어지기 시작한 공주의 이야기들은 표현 그대로 별거 없었다.

    딱히 대단한 조언이나 허락이 필요한 부분이 없었으니까. 이야기의 주제는 거의 그랬다. 재단과 관련된 통상적인 얘기들, 가끔가다 일상생활 속에서 겪었던 소소한 소란까지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이안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러 왔다기보다는, 그저 수다를 떨고 싶었던 눈치였다. 물론 대화의 9할을 공주가 주도해야만 했다.

    “……그랬지 뭐예요? 제 친구나 마찬가지인 하녀들이라지만, 가끔은 과하게 별난 아이들이에요.”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공주.

    “그러셨습니까.”

    그리고 그 대화의 주도에 가장 막강한 동기이자 막강한 장애물, 이안 페이지의 무미건조한 반응.

    물론 이안이라고 이렇게만 반응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단지 방법을 모를 뿐. 일상적 수다의 폭풍 속에서 어찌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지,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으니까.

    ‘해본 적이 있어야지.’

    진지한 논의 제외, 회의 제외, 뚜렷한 목표물로 달려가는 과정에서의 대화 제외.

    지금처럼 진중함도, 무거운 분위기도, 목표조차 뚜렷하지 못한 대화는 이안으로서 매우 생소한 경우였다. 심지어 상대조차 편한 듯 편하지 않은 공주 아니겠는가?

    “…….”

    “…….”

    그 겉보기론 건조한 반응. 하나 실상은 어떻게 반응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반응의 결과는 예상대로 ‘단절’이었다. 힘겹게 대화를 주도해 나갔던 공주의 말문이 멈추자, 두 남녀의 목소리 또한 순식간에 뚝 끊어져 버렸다.

    “마법은.”

    이안이 용기를 냈다.

    뭐라도 내뱉어야만 했다.

    무슨 얘기라도 꺼내야 했다.

    결국 다룰만한 주제는 하나.

    “성과가 좀 있으십니까?”

    이안과 공주를 이어주는 사제지간으로 연결해 준 매개체, 마법밖에는 탈출구가 없으리라.

    “마마의 재능이라면 5클래스 경지도 문제가 아닐 거라 봅니다만.”

    “과, 과찬이셔요. 벌써 5클래스라니요! 아직 대선배 마법사분들도 달성하지 못하신 경지를…….”

    “경력과 마법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저를 보십시오.”

    “그래도…….”

    마법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니 조금은 분위기가 좋아졌다. 멈췄던 대화도 매끄러운 흐름을 보였다.

    “상아탑 개인교습은 잘 받고 계십니까? 저도 한 번씩 봐 드려야 하는데, 통 시간이 나질 않네요.”

    “많이 늦은 만큼 노력하고 있어요. 특히 로난 님께서 칭찬을 자주 해주셔요. 상아탑의 역사나 기타 이론 쪽은 스승님께서 교습 받으실 때보다도 습득이 빠르다고요.”

    “저보다?”

    “네!”

    이안은 이미 전생에 상아탑의 역사와 이론 등 암기력이 요구되는 과목들을 완벽하게 암기했다.

    즉 이번 생에는 머릿속에 답안지를 펼쳐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얘기다. 한데 이안보다 빠르다고?

    ‘로난, 이 양반.’

    고위마법사 로난, 과연 줄서기의 달인다웠다. 벌써 공주에게 알랑방귀를 뀌어대기 시작했을 줄이야.

    ‘심지어 내가 교습 받을 때는 코빼기도 안 비쳤던 양반이…….’

    그때만 해도 로난은 이안을 끔찍이 싫어했다. 이안의 목에 목줄을 채워야 한다며 노발대발했던 대표주자 아니었던가?

    그런 자가 이제는 이안으로 모자라서 그 주변의 인물에게까지 꾸준하게 줄을 대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로난의 재능은 마법이 아닌 것 같았다.

    ‘줄타기가 9클래스군.’

    희미하게 웃은 이안.

    그가 말문을 이어갔다.

    “대단하십니다. 저도 그렇게 느린 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게요. 제가 아바마마의 명석한 머리를 물려받긴 했나 봐요.”

    “황태자 전하만 아쉬워졌네요.”

    “네? 앗, 그런 말씀은 좀…….”

    황족 모욕죄마저 넘나드는 이안식 농담, 그 농담을 한 박자 늦게 알아들은 공주가 난색을 표했다.

    “오, 오라버니께서도 노력하고 계세요. 조금 어긋났던 시간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계속 발전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믿어요. 오라버니께선 아바마마 이상으로 성군이라 칭송받을 군왕이 되실 거라고.”

    공주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오라버니, 인즉 황태자 하이든을 향한 믿음이 여실 없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까 산책을 좀 하면서 전하의 용안을 뵈었는데, 어려운 정치이론서까지 읽고 계시더군요. 서책이 전부는 아닙니다만, 성군이란 위업을 쌓는 일에 밑거름으로 활용할 수 있겠죠. 너무 열정적으로 읽으시기에 아는 척도 못 했지 뭡니까?”

    “아는 척을 하지 않으셨다고요?”

    “집중하시는데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실망하셨겠네요.”

    “실망이요?”

    “오라버니께서요.”

    갑자기 웬 실망이란 말인가?

    도대체 어떠한 부분에서?

    “스승님께 어려운 책 읽는 모습도 보여 드리고 싶다고, 서고에서 제일 어려운 걸로 가져오신 건데.”

    “…….”

    어쩐지, 책장을 너무 맹렬하게 넘긴다 싶긴 싶었다.

    아마 멀찍이 이안의 접근을 발견하고는 더더욱 요란하게 읽기 시작했던 모양이리라. 그렇게까지 요란을 떨었는데 아는 척은커녕 지나쳐버리다니.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셔요. 읽지도 않는 책을 들고 오신 건 아니니까요. 아직 독파는 못하셨지만, 요즘 그 책 읽으시느라고 밤까지 새시거든요. 오죽하면 아바마마께서도 걱정을 하시겠어요?”

    공주가 황급히 말문을 추가시켰다. 물론 지어낸 얘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요즘은 더 늦기 전에 여러 영지를 두루두루 살펴보고 싶다고 아바마마께 요청도 올리셨어요. 거창한 행차가 아니라, 올리버 경과 단 둘이서만, 아무도 모르게 말이에요. 말하자면 암행이지요.”

    기특한 생각이었다. 전해 듣는 이야기와 서책만으로는 군주로서의 도의를 전부 깨우칠 수가 없을 터.

    “좋은 생각이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더군다나 올리버 경께서 곁에 계신다면 신변에 관한 문제도 없을 거고요.”

    “그럴 겁니다.”

    충분히 그럴 거다. 올리버가 누구던가? 비록 약화한 상태였기는 하나, 고대의 포식자였던 가고일의 왕을 쓰러뜨린 칼잡이 아니던가?

    ‘이제 마법사 중에도 올리버 경을 꺾을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겠지.’

    그런 존재가 황태자의 곁을 철통처럼, 아니 그보다 더 완벽하게 호위해주고 있다. 전직 한복판이 아닌 이상, 어디를 가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는 얘기다.

    “사실 전 그래요. 되도록 아바마마께서 오래 건강하시고, 오래 통치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자식으로서도 그렇고, 그게 이 제국과 백성들에게는 이상적인 경우니까요. 하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순 없고, 조만간 오라버니의 시대가 시작되겠지요.”

    자칫 황태자의 험담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 그럼에도 공주는 덤덤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

    “어렸을 때는, 황실을 위한 마법사로 성장해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를 지켜야겠다. 그런 다짐을 했었죠. 헌데 그러면서도 엇나가기 시작하는 오라버니를 볼 때마다 흔들렸어요. 꽤 자주 그랬죠.”

    “이해합니다.”

    “지금은 오라버니께서 많이 변하셨지만, 또 변하시고 계시지만, 아바마마 같은 통치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면 솔직히 모르겠어요. 아니, 불가능할 거라고 봐요.”

    현 황제이자 공주의 아비 테리 그린리버. 그는 분명 인류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대륙적 성군이었다. 아마 황태자가 개인의 힘으로 그 뒤를 따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거다. 그야말로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꼴 아니겠는가?

    “대신, 오라버니의 주변에는 정말 많은 분이 계셔요. 아바마마께서 하시는 말씀이, 본인께서 인재에 목말랐을 때에는 그렇게도 인물이 보이지 않더니만, 오라버니는 그냥 숨만 쉬어도 우르르 몰려든다고 하시면서…….”

    황태자가 타고난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외모, 나머지는 사람을 얻는 ‘인복’이다. 대부분 이안 덕분에 연결된 인재였지만, 올리버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가히 ‘축복’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진정한 군주는 개인의 능력이 아닌, 완벽한 인재를 끌어당기는 축복과 그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눈썰미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완벽한 통치자가 될 수 있다. 그런 말씀도 하시더군요.”

    황제의 말이 옳았다. 황태자의 시대는 지금의 시대와 통치적 기반이 상당 부분 달라질 거다. 군주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국정이 아닌, 수많은 인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국정운영. 어찌 보면 개인기로 이끌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 확실히 어려웠다. 본디 사람이란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결단코 아니었으니까.

    “그 말씀 때문일까, 걱정 한편으로 기대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오라버니의 시대, 오라버니께서 만들어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스승님께서도 궁금하시지요?”

    공주의 물음.

    이안이 잠시간 침묵했다.

    부정적인 침묵은 아니었다.

    단지 그날을 그려봤을 뿐.

    모든 불안요소가 해소된 세상, 얼간이였던 황태자가 역사적인 성군으로 거듭나는 세상, 이안의 주변이 그 어느 때보다 순탄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세상,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함께 행복함을 나누는.

    ‘나.’

    이안 페이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풍경이었다.

    “…….”

    소매 속으로 쥔 이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승리해야 하는가.

    그 모든 의문이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이는 앞서 한 차례 느꼈던 동기부여와 맞물려 이안의 컨디션을 절정으로 끌어당겼다.

    “저도.”

    이안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공주가 건넨 물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주기 위함이었다.

    “꼭 보고 싶습니다.”

    이안의 어조에 ‘힘’이 실렸다. 다른 이름으로는 ‘진심’이기도 했다.

    “그 세상.”

    * * *

    공주 하이리와의 즐거웠던 대화, 그 대화가 끝난 지도 어느덧 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또다시 어둠으로 물들었다.

    저택 내 모두가 잠들었을 시각, 이안이 누런 양피지 위에 글자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마법의 힘을 일절 빌리지 않는, 오로지 깃펜과 잉크만 사용하는 고전적인 문서 작성이었다.

    [프란, 감시로 붙은 검은 용의 시선이 우려되어 편지로 요청한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긴히 논할 사항이 있으니, 검은 용의 감시를 피해 접선할 방법을 알려줘.]

    문서의 내용은 전적으로 프란을 향했다. 단지 부르는 것만으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이 문서 또한 읽어낼 가능성이 있을 터.

    [피할 방법이 없다면 나타나기라도 해. 급한 문제니까.]

    계속해서 작성되는 이안의 편지. 그렇게 한참을 적고, 적고, 또 적고. 여러 장을 소모하고 나서야 깃펜이 멈췄다.

    ‘이거다.’

    더불어 이안의 입고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명백한 미소였다.

    ‘놈의 감시에도 한계는 있었어.’

    프란의 감시에서 벗어날 방법.

    바로 그 수단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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