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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56화 (56/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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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56화

    20. 페어리 퀸(1)

    이안이 ‘퍼핏 플레이’를 멈춘 지도 하루가 지났다. 충분한 휴식과 식사, 마나 호흡 덕에 몸 상태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이제 슬슬 떠날 순간이 찾아온 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피에릭 영주성의 정문.

    이안이 모두에게 말했다. 그곳에는 함께 이안을 지켰던 피에릭 대영주와 최고 전사들, 그리고 파견마법사 매리가 간단한 배웅을 나와 있었다.

    “하룻밤만 더 묵고 가는 게 어떻겠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조촐하게나마 연회라도 베풀어드리는 게 도리이거늘.”

    대영주 칼리언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영지의 은인 되는 이안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연회라도 열어 대접하고 싶었던 모양새였다.

    “지켜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실 은인이라기보단 고위마법사의 의무가 아닙니까?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마법사께서 해결하셨을 일입니다.”

    “언제는 은인이니 지켜달라고 하지 않았소?”

    “하하. 그땐 좀 급했던지라.”

    이안의 겸양에 응수했던 칼리언 대영주.

    그가 전부터 하고 싶었던 본론을 꺼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가기 전에 우리도 그거나 합시다.”

    “그거라 하시면.”

    “그 왜 있잖소? 모그리안 가문에서 영원한 귀빈의 서약을 맺었다 들었소만. 5년 전쯤인가? 한창 이안 공께서 유명세를 떨칠 때, 그때 들었던 소문이지.”

    “맞습니다. 그랬죠.”

    “우리 동부와도 맺어보자 이 말씀이오.”

    칼리언이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영원한 귀빈의 서약.

    며칠 전부터 생각해 뒀던 이야기.

    이안이 떠나기 전에 후딱 해치울 요량이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못할 건 또 뭐요? 귀빈 대접해 드리는 게 전분데. 이안 공의 반응을 보아하니 모그리안 그 어르신, 또 서약의 징표니 맹약이니 하면서 무게 엄청 잡았나 보구먼.”

    실로 정확했다.

    모그리안 대영주는 분명 그랬다.

    두 사람, 안면이 있음이 분명하다.

    “모그리안 영주님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알다마다. 돌아가신 우리 큰형님과 절친한 동무사이셨지. 덕분에 나도 안면이 조금 있소. 매사에 너무 진중하신 양반이라 죽이 잘 맞지는 않소만…….”

    잠시 모그리안의 대영주와 돌아가신 형님을 떠올렸던 칼리언. 어린 날의 추억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으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이안 공만 괜찮으시다면 우리 피에릭 영지도 이안 공을 귀빈으로 대접하고 싶소. 단순히 은인을 향한 호의가 아니오. 얻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마법사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모두 이안 공과 같지는 않을 거라 보는데.”

    항상 최전방에 서는 돌격대장 같은 인물이지만, 그도 어엿한 영지의 대영주다. 보고 듣는 것이 아주 많다. 이안 정도 되는 마법사가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아니, 유일무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정도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전적으로 나의 판단이오만, 어느 쪽도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 믿소. 이안 공도, 우리 피에릭 영지도. 아마 모그리안 대영주께서도 그리 판단하셨겠지. 나보다 무려 5년을 앞서시다니, 하여튼 능구렁이 같은 양반.”

    영지는 황성에 비하여 강력한 마법사와 유대를 맺어볼 기회가 적다. 기회가 생겼다면, 하물며 그 대상이 이안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즉각 추진하는 것이 옳다.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오. 고위마법사라 해서 다 귀빈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건 아니니까. 칠년 전쯤인가, 그때도 고위마법사가 한번 파견을 나왔던 적이 있었지. 붉은 로브를 입은 여인이었소. 성격이 참 지랄 맞더군.”

    헬레느를 얘기함이 분명했다.

    칠년 전이라면 잠적하기 훨씬 전.

    이안에게 패배를 당하기 전이다.

    “그런 자라면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다 해도 귀빈의 자리까지 내어주지는 않소. 이안 공이니까 얘기도 꺼내보고 하는 거지.”

    물론 이안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었다. 저리 가벼운 듯 말하고 있다고는 하나, 제국의 귀족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서약이다. 언젠가는 도움될 날이 반드시 찾아올 터.

    ‘앞으로의 계획에 북부와 동부의 지지를 받는다면.’

    득을 넘어서 권력으로 돌아오겠지.

    계산은 끝났다. 이제 결정할 차례.

    이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화답했다.

    “……제국의 천년서약이라 불리는 서약을 이토록 가볍게 맺어도 되는 건지, 저는 아직도 얼떨떨하긴 합니다만, 원하신다면 거절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소.”

    스르릉!

    확인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드는 칼리언.

    서약을 위해 미리 준비해 온 검이었다.

    거절의 경우는 생각하지도 않은 듯하다.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 하지 않겠소? 명색이 천년서약인데, 어색해도 좀 참으시구려. 금방 끝내드릴 테니까.”

    대영주 칼리언이 검 끝을 바닥에 꽂은 채 서약의 자세를 갖추자, 지켜보던 최고 전사들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동일한 자세를 취했다. 모그리안 대영주가 무게를 잡니 마니 하더니만, 오히려 이쪽이 더 진중하고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본 가문은 고위마법사 이안 페이지의 방문을 언제나 환영할 것이며, 그가 동부의 힘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그 옆에 나란히 설 것을 약속하는 바, 이는 양자의 후손에서 후손으로, 또 그 후손에서 후손까지 만대에 걸쳐 이어질 것을 에메랄드 강의 가장 동쪽줄기로서 맹세하노라.”

    오래 전 마커스 모그리안 영주가 했던 맹세와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내용의 맹세. 칼리언 피에릭은 그 장황한 귀빈의 서약을 속사포처럼 후다닥 끝내 버렸다.

    “으으! 언제 해도 영 안 맞는군. 맹세니 서약이니 하는 거. 그냥 합시다! 하고 거기서 끝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부끄러운 듯 허겁지겁 검까지 거둔다. 허둥대는 꼴이 협곡 최전방에서 몬스터를 도륙하던 그 자가 맞나 싶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번에 방문할 때에는 미리 말씀하고 오시오. 동부의 연회가 무엇인지 내 아주 확실하게 보여드리도록 하지. 기대해도 좋소.”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눈 이안과 칼리언.

    이제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배웅 나온 최고 전사 한명 한명과 눈인사를 나눈 이안이 마지막으로 파견마법사 매리와 마주쳤다.

    “4년 후에 봐요.”

    “네, 네?”

    “파견 임기 다 끝나고, 상아탑에서.”

    “아, 네! 알겠습니다!”

    본래 죽음의 운명이 찾아왔을 매리. 그녀를 보고 있자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이런 변화점 하나하나가 모여 전생과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겠지.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가.

    이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최선을 다해 나아갈 뿐.

    “그럼.”

    첫 번째 고위마법사의 의무를 끝마친 이안.

    그가 피에릭 영지를 떠나 황성으로 향했다.

    사절단보다 한발 먼저 도착해 있을 계획이었다.

    ‘여유가 좀 있겠군.’

    사절단은 단체 행군이다. 중립도시 데미데라로부터 국경을 넘어 황성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터.

    ‘뭐든 준비해두려면 지금이 기횐데.’

    지금껏 가족으로부터 떨어진다는 불안감과 상아탑의 개인교습 등, 여러 상황이 겹쳐 황성을 빠져나올 기회가 없었다.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효율적으로 활용해야만 했다.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까.’

    이안은 이번 협정으로 자신의 뜻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인즉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될 거라는 얘기다.

    ‘항상 붙어 있기도 힘들어지겠지.’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언제나 가족의 곁에 머물었다.

    직접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했으니까.

    ‘아군이 필요하다.’

    그랬던 이안에게 필요한 것.

    바로 아군이었다.

    ‘강하고 맹목적인 아군.’

    아주 강력한 무위를 가진 아군.

    그러면서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아군.

    왜냐? 이유는 간단하다.

    ‘이대로는 행동에 제약이 너무 커.’

    적절한 마나하트의 성장으로 퍼핏 플레이가 가능해져서 망정이지, 계속 5클래스에 머물렀다면 탑주의 의도대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별일 아님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족에게 달려갔을 테니까.

    ‘가족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안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는 갖지 못했던 가족이란 가치.

    큰 집착이 생겼고, 벗어나기 힘들다.

    이번 사태로 더더욱 확실해졌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아주 강력한 아군으로 하여금 가족을 지키도록 만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황태자의 곁을 지키는 올리버처럼, 적어도 그 정도의 무력을 가진 아군이 필요하다.

    ‘그럼 내 행동의 폭도 조금 넓어지겠지.’

    가족을 믿고 맡길 아군이 있다?

    조금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선택과 행동의 폭도 넓어지리라.

    ‘문제는 그런 아군을 어떻게 얻느냐는 건데.’

    올리버 정도의 무인은 흔치 않다. 평범한 기사나 근위병 정도로는 부족하다. 상아탑에 호의적인 마법사들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그들은 개인 경호로 부릴 수 없는 존재다.

    ‘항시 붙어다닐 수 있으면서 강력한 아군.’

    골치가 지끈거림을 느끼는 이안이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조건 아니겠는가.

    ‘가만, 꼭 사람일 필요는 없잖아?’

    그렇다.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강력하며, 경우에 따라 맹목적인 관계가 가능한, 인간 사회의 적대감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외형까지.

    ‘페어리.’

    고민 끝에 한 가지 ‘존재’가 떠올랐다.

    전생에도 한번 인연이 있었던 존재.

    용언을 연구하며 처음 접한 그들.

    ‘확실히 페어리라면.‘

    앞서 떠올린 조건에 부합한다.

    물론 일이 잘 풀린다면 그렇다.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족속이니까.

    ‘준비가 좀 필요하겠어.’

    시간이 조금 촉박하긴 하다만.

    딱히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을 굳힌 이안이 다시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 *

    용언 연구.

    이안이 마법과 마찬가지로 가장 사력을 다했던 위업 중 하나였다. 비록 황금용 일족의 언어 일부분밖에 해석하지는 못했으나, 그 바탕이 되는 연구와 공부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족히 백년 이상을 매달려야 할 지식이었다.

    ‘사람은 물론 이종족의 언어체계까지.’

    특히 오크 주술사, 땅의 요정 노움, 숲의 요정 페어리 등 ‘마법’과 유사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종족의 언어를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보는 것이 필수였는데, 그중 ‘페어리’ 종족과의 일화가 제법 유쾌하게 남아 있었다.

    ‘아니, 악연인가.’

    피식 웃은 이안이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는 몇 가지 준비를 거친 뒤, 곧장 ‘페어리’ 일족의 보금자리로 찾아왔다. 처음 보는 자루 하나를 어깨에 짊어진 채로.

    ‘멀지 않아서 다행이야.’

    페어리들의 보금자리는 의외로 인간 문명과 그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수많은 나무꾼과 사냥꾼, 약초꾼들마저 오르락 거리는 산맥 꼭대기에 수천 년간 숨어 살고 있었으니까.

    ‘결계와 환술이 문제지만.’

    전생의 이안이 조사해 본 바, 마법 자체를 가장 잘 다루는 종족은 페어리였다. 응당 걸맞은 수준이 있었으며, 보금자리 주변에 펼쳐 놓은 결계와 환술은 그야말로 강력했다.

    ‘지금은 문제없어.’

    페어리보다 강한 마법적 역량을 가졌기에? 아니다. 이안이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무려 7클래스 마스터였다. 그랬던 당시에도 쉽지 않았으니, 지금은 더더욱 어려울 터.

    그의 자신감은 마법이 아닌, 다른 데에 있었다.

    탁!

    이안이 산맥 최정상, 페어리 결계의 경계선에 착지했다.

    앞으로는 평범한 산맥의 숲이 펼쳐졌다.

    페어리들이 펼친 결계와 환술의 효과였다.

    ‘이 결계 한번 깨부수자고 난리를 쳤었지.’

    그땐 그랬다. 인류 최강의 마법사로서 자존심도 있었고, 다른 방법 또한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바깥에서 목청 터져라 불러도 코빼기조차 비춰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

    이윽고 준비해 온 자루의 주둥이를 연 이안.

    ‘일단 이 정도만.’

    그 자루 안으로부터 최고급 보석들을 꺼냈다. 보호마법이 걸린 보석들은 5년 전 옛 상아탑의 터에 남겨뒀던 보석들이었다. 그중 일부를 며칠 사이 챙겨온 거다.

    ‘보석이라면 아주 환장들을 하지.’

    도대체 누가?

    저 결계 안쪽에 있는 페어리들이.

    특히 ‘페어리 퀸’이라면 사족을 못 쓸 터.

    보석의 물질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보석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이안은 그 습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가져가고 싶으면 결계 풀고 나와.”

    바닥에 보석들을 늘어 놓고 당당히 말했다.

    몇 개는 결계 안쪽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마법이 걸려 있기에 깨질 염려는 없었다.

    “필요 없으면 그냥 간다?”

    (자, 잠깐……!)

    다시금 자루 안으로 보석을 거두는 그때였다.

    아주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

    귀가 아닌 머리로 들려왔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거라. 인간!)

    만연했던 마나의 기운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계와 환술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

    이안이 의도대로 흘러갔다.

    ‘단순한 놈들. 아니, 계집들인가?’

    외형은 분명 아름다운 여인이니까.

    하나 같이 쥐방울만 하긴 하다만.

    “내가 좀 바쁜데.”

    (이익! 누가 단명하는 족속 아니랄까 봐!)

    톡 쏘아 붙이는 페어리들의 목소리.

    바로 그 순간 모든 결계가 거두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 펼쳐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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