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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55화 (5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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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55화

    19. 의외의 주인공(3)

    “보았느냐? 보았어? 하하하!”

    길어진다면 며칠 내내 거듭했을 삼국의 협정. 그 협정을 하루 만에 끝내 버린 장본인은 라그나르가 아닌 황태자 하이든,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익히도록 만든 이안 페이지였다.

    “전하.”

    “오, 단장. 자네도 봤어야 하는데!”

    황태자의 들뜬 모습에 올리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또한 협정의 결과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했던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말이야. 저 회의장을 아주 그냥…… 크흠흠, 아니지, 이런 얘기는 가서 하자고. 간만에 한잔씩 쭉 하면서. 도시구경도 좀 하고. 이런 날 놀지 또 언제 놀겠어?”

    이안과 올리버를 번갈아 보는 황태자. 그 말 그대로 언제 놀아보겠는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올리버 역시 이번만큼은 긍정의 침묵을 지켰다.

    “하하하! 그렇게들 나와야지. 이안, 네 녀석도 성년이 코앞이지 않느냐? 이참에 한수 가르쳐 주마. 무릇 남아로 태어났다면 애주의 묘리를 알아야 진정한……!”

    “황태자 전하.”

    술에 대한 예찬론이 펼쳐지는 그때였다.

    오늘 협정에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한때 주인공이었으나 이제는 단역만도 못한 5황자 라그나르가 황태자에게 다가왔다. 가면이나 마찬가지인 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로.

    “뭐냐?”

    “오늘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이 아우도 많이 배웠습니다.”

    퉁명스러운 황태자의 대꾸에 칭찬을 늘어놓는 라그나르. 평소에는 가식임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으나, 지금은 여실 없이 느껴졌다.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닌가 보군.’

    이안뿐만 아니라 황태자조차도 그렇게 느꼈다.

    ‘좋구나.’

    라그나르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쾌감.

    그 처음 맛보는 쾌감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해묵은 감정들이 쑥 내려감을 느끼는 황태자였다.

    ‘여기가 아프지도 않고.’

    평소에는 줄곧 그랬다. 황자들, 특히 라그나르와 마주칠 때마다 느껴졌던 이상한 감각, 마치 심장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던 답답함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네.’

    황태자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답답함의 원인은 열등감이었다. 한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열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답답함도 찾아오지 않는 거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그리 판단해버린 황태자가 크게 웃었다.

    라그나르의 팔을 툭툭 쳐주며 평소와 다른 화답까지 내어줬다.

    “하하! 그래 동생아. 많이 배웠다니 다행이구나.”

    덕분에 라그나르의 분노는 더더욱 깊어졌다. 항상 으르렁거리거나 도망치기 바빴던 황태자다. 그 반응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자신한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번에도 확인하고 싶었다. 황태자의 열등감을. 한데.

    “네 녀석도 그 뭐냐. 그래! 증진! 항상 증진하고, 수양도 꾸준히 쌓도록 하고! 또…… 음, 뭐 아무튼 열심히 해라. 내 말 알겠느냐?”

    그 말에 미소마저 사라져 버린 라그나르.

    자칫 대놓고 얼굴을 구겨 버릴 뻔했다.

    설마 저따위 개소리를 들을 줄이야.

    자존심이 통째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제기랄!’

    급히 가식적인 얼굴을 되찾은 라그나르가 시선을 돌렸다. 계속 황태자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다가는 크게 실수할 것 같았으니까.

    ‘다 저놈 탓이야.’

    돌아간 시선에는 이안이 보였다.

    현재로서 가장 거슬리는 존재.

    당장 치워 버리고 싶은 개자식!

    ‘저놈이 끼어드는 바람에……!’

    라그나르가 어금니를 뿌득 물었다.

    황태자도, 그 얼간이를 지키는 기사도.

    그 얼간이를 도와주는 저 마법사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반드시.’

    라그나르의 가득 차오른 독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밤은 실컷 즐기자며 행복감만 과시하는 황태자였다. 조금 의도한 것 같기도 했다.

    “자자, 가지! 일주일 동안 참았던 거 오늘 밤 싹 다 풀어버릴 테니까. 올리버 자네도 오늘은 눈이랑 어깨에 힘 좀 빼고 말이야. 매사 팍팍하게 그러지 말고, 이안 너도 이제 곧 성년이니만큼 내가 하사하는 술…… 아, 이 얘기 벌써 했던가?”

    황태자의 말이 길어지는 그 순간.

    “아무튼 간에…… 어?”

    이안의 몸에서 정체 모를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변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은 황태자. 뒤이어 대부분의 눈에 목격되었다. 올리버와 라그나르는 물론, 멀찍이 있던 그린리버 제국의 사절단과 호위대까지.

    “이, 이안? 어떻게 된 거냐? 네 몸이…….”

    좀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이안의 몸뚱이가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조금 흐릿해지다 돌아오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큼직하게 사라져 갔다. 이안 페이지라는 존재 자체가.

    “아무래도 한계인 것 같네요.”

    “한계라니? 알아듣게 얘기해 보아라.”

    황태자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

    다짜고짜 한계가 왔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송구하옵니만, 술은 황성에서 하사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

    “자세한 설명은 황성에서.”

    슬슬 얼굴마저 흐릿해진다.

    덕분에 목소리마저 희미하다.

    “드리도록 하겠습…….”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안의 몸뚱이.

    모두가 당혹감에 멈춰 있을 무렵, 탑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떨림으로 가득했다.

    “부, 분신? 설마 지금까지 계속 분신이었다고……?”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커다란 혼잣말.

    그만큼 자제력이 상실된 탑주였다.

    “저런 분신이 존재할 리가…….”

    탑주의 상식으로는 결코 불가한 일이었다. 미러 이미지라 해봤자 우두커니 서 있는 인형과 같다. 이안의 분신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마법까지 사용하는 분신, 그것도 몇날 며칠을 유지되는 분신마법은 단언컨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으니까.

    “지금껏 분신 하나에…….”

    자제력을 잃어버린 혼잣말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어느덧 다가온 라그나르가 탑주의 로브를 슥 당겼다. 덕분에 정신머리를 되찾은 탑주, 재빨리 뒷말부터 삼켰다.

    ‘놀아났다는 겐가?’

    듣도 보도 못한 분신마법.

    그러나 목격했고, 명백한 사실이었다.

    실존하는 분신마법이 맞는다는 거다.

    ‘고작 그 따위 분신마법 하나에?’

    놀아났다. 표현 그대로 놀아나 버리고 말았다. 평소 ‘마법의 정점’이라 자부했던 탑주 자신이 고작 새파랗게 어린 마법사, 이안 페이지의 분신마법 따위에 놀아났다는 얘기다.

    “…….”

    할 말을 잃어버린 탑주 허버트.

    일생일대의 굴욕감이 밀려왔다.

    어느새 칠십 년이 훌쩍 넘어버린 삶.

    그중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굴욕감.

    ‘크흐흐…….’

    보는 눈이 많다.

    대놓고 웃음을 내뱉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속으로 흘린 탑주의 웃음은 생소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 그것은 아주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러나온 본성, 바로 그 본성이 토해낸 ‘광소’였다.

    * * *

    “대영주님. 이번 대초원 경계선 인근 마을에 관한 복구 계획서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수정을 지시할 부분이 있으시다면…….”

    “없다.”

    “예?”

    피에릭 영주성의 지하 폐관수련장.

    이안이 퍼핏 플레이와 함께 가수면 상태로 접어든지 어느덧 십수 일이 지났다. 한데도 대영주와 최고 전사들은 여전히 무장된 상태였다. 식사와 몇몇 생리현상을 제외하고는 교대까지 해가며 폐관수련장 앞을 지켰으니까.

    “벌써 몇 번을 얘기하나? 당분간은 따로 보고할 것 없이 자네 선에서 판단하도록 하라, 내 분명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하, 하오나…….”

    덕분에 대영주는 집무실을 찾는 일이 적었고, 많은 관리들이 직접 폐관수련장까지 내려와 영지업무의 결재를 받아야만 했다. 그마저도 요즘은 각각의 책임자들에게 떠넘겨 버린 모양이었다.

    “지금까지도 자네가 해왔던 일인데, 내 허락이 뭐가 중요하다고? 나와 영지는 자네의 그 출중한 능력을 믿고 있네만.”

    “그, 그런…….”

    “뒷주머니만 차지 않는다면야.”

    슬쩍 도끼자루를 고쳐 쥐는 대영주 칼리언. 그 위협적인 모습에 결재를 받으러 왔던 중년의 관리가 소스라치듯 놀란다.

    “뒤, 뒷주머니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알아, 알아. 자네 성품 빤히 아는데. 아무튼 복구에 필요한 지원은 아끼지 말고. 부족하면 가문창고 열어서 가져다 쓰고. 응?”

    “아, 알겠습니다. 대영주님.”

    “이만 물러가 봐. 난 은인을 지켜야 하니까.”

    영지의 은인 이안 페이지.

    그의 부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영주로서, 그리고 전사로서의 명예가 아니겠는가? 조금 길어지는 감이 있기는 하나, 그 또한 부탁의 일부였다.

    “으으음…… 푸……!”

    물론 모두가 대영주와 최소 전사들처럼 무장된 것은 아니었다. 정작 이안의 옆을 도맡았던 매리. 옆으로 기운 채 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확실했다.

    “쿠우…….”

    “매리 님.”

    “푸우우…….”

    “매리 님.”

    “으음……?”

    누군가의 부름에 눈을 뜬 매리.

    “우왓!”

    켄슬레이션 주문에 당했을 때처럼 특유의 괴성을 지른다. 마치 여자와 남자의 중간이라도 되는 듯 해괴망측한 괴성, 1년간 유지해 왔던 남자 행세의 여파일 것이리라.

    “이…… 안 님?”

    “간만입니다.”

    “깨, 깨어나신 건가요?”

    “보시다시피.”

    이안은 여전히 축 늘어져 있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으니까.

    십수 일간 활동이 전혀 없었던 몸뚱이다.

    마법으로 에너지소비와 생리현상을 최소화시켰지만, 완벽할 수는 없다.

    “괜찮으신 거…… 맞죠?”

    “당장은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네요. 머리 아프고, 움직이지도 못하겠고, 무엇보다.”

    잠시간 뜸을 들였던 이안.

    이내 마음먹은 듯 입을 연다.

    “배가.”

    “예? 배요? 배가 아프신……?”

    “아뇨, 배가 고프군요.”

    내가 지금 배가 고프다. 태어나 어머니에게밖에 해본 바 없었던 소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아무리 이안이라도 한계까지 도달한 생리현상은 어쩔 도리가 없거늘.

    “많이.”

    이왕에 큰맘 먹고 내뱉은 말.

    한 번 더 강조하는 이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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