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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9화 (58/122)
  • @59화

    그의 시야엔 자신이 직접 짱짱히 묶어 둔 드레스 끈이 보였다. 밀러는 입술을 짓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온몸에 소름이 돋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밀러는 인고 끝에 커다란 손으로 린느의 드레스 끈을 천천히 풀었다. 얇은 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공유됐다.

    “풀 테니, 드레스를 잡아.”

    마지막 매듭을 푸는 동시에, 그는 기계처럼 시선을 벽에 고정했다. 절대, 절대로 벽에서 시선을 떼면 안 된다는 초인과 같은 주문으로 그의 본능을 잠재웠다. 그깟 본능이야, 조절하는 건 식은 수프 먹는 것보다 간단하나, 이는 본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차에서부터, 아니 늘 그녀에게서 달콤한 과일 향이 올라와 참을 수가 없었다. 망할, 음험한 락센의 와인을 마신 탓일까? 평소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지만, 오늘은 참기가 곤욕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껴 부드럽게 품으로 끌어당기고 싶단 충동이 일었다. 여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듯이, 종일 제 팔뚝을 감싸던 그녀의 하얀 손등에 입술을 맞추고, 오늘 하루 고생했다며 그녀의 이마에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이에, 밀러는 어서 그녀의 드레스 끈을 놔줬다. 더 붙들고 있다가는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닿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탓이다.

    “가, 감사해요.”

    린느는 그의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드레스를 꼭 잡고 어서 욕실로 사라졌다. 그러자, 그는 고고하게 다리를 꼬며, 어두운 창문 밖을 빤히 바라봤다. 쓸데없이 대리석 문양을 바라보며 머릿속을 비우고자 애썼다.

    똑똑.

    노크에 밀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직도 남아 있는 홧홧한 여운을 멀리 던지며, 문을 열어 줬다. 그러자, 알렉스가 양손에 짐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각하, 쉬고 계셨습니까? 아, 이건 각하의 물품이 담긴 짐가방이고, 이건 아가씨의 짐가방입니다.”

    짐가방이 여기 있다는 뜻은, 욕실로 도망간 저 여인은 무얼 들고 들어간 걸까? 갈아입을 옷도, 수건도 챙기지 않고 무작정 욕실로 향하다니. 밀러는 알렉스에게 짐가방을 건네받으며 픽, 웃었다.

    “사용인을 데려와. 여인으로.”

    밀러는 제 할 말만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다. 짐가방 두 개 중, 자신의 짐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욕실 문 근처에 있는 협탁에 올려 두며, 막내딸을 보듯 욕실 문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그녀의 짐가방을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문밖으로 나섰다.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욕실에 사람이 있으니 불은 끄지 말고. 아니, 스위치에 손을 대지 마. 그리고 간단한 청소와 소백작의 수발을 부탁하지.”

    사용인이 밀러와 눈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침실로 들어서는 걸 확인한 후에야, 밀러는 건넌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 * *

    린느는 밀러가 미리 채워 둔 욕조 물에 얼굴만 빼고 폭 담갔다. 욕실에 가득 찬 따듯한 김이 린느의 피곤을 풀어 줬다. 그 따듯한 김에는 쌉싸름한 향과 와인 향이 함께 어우러져 코를 자극했다. 그래서인지, 피곤을 푸는 내내 밀러의 모습이 떠올라 잊히지 않았다. 그 고고한 남자가 직접 이 욕조 물을 채웠단 생각에 린느는 얼굴을 달구며 입술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그의 배려를 만끽한 후에야, 린느는 욕조 밖으로 향했다. 뒤늦게 수건이 없단 걸 알아챘고, 영리한 사용인이 그녀에게 수건과 가운을 전해 줬다. 그 수건에는 욕조에서 맡아 온 향기와 비슷한 향이 어려 있었다.

    “아가씨, 치장해 드릴게요.”

    두 사람이 신혼부부라고 착각했는지, 사용인은 린느의 드레스와 머리칼까지 매만져 줬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 끝에 물기를 모두 제거하고, 단정하게 빗질해 줬다. 치장 아닌 치장이 끝난 후, 노크가 울렸다.

    그러자 사용인은 인사를 마치고 문밖으로 나섰다. 바깥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문을 통해 밀러가 다시 들어왔다. 매번 단정하던 그의 흑발은 보기 좋게 헝클어져 있었고, 그 끝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순식간에 방 안 공기가 달궈졌다.

    그는 린느를 보자마자 채신머리없이 놀랄 뻔했다.

    밀러는 커다란 손으로 그것들을 한 손으로 옮겨 들며 다른 손으로 문을 닫았다. 고작 문 하나가 닫혔을 뿐인데,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리 와.”

    낮은 목소리가 색스럽게 갈라지며 침실을 울렸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밀러는 대리석 테이블 위로 음식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칼 끝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고, 아까와는 옷차림새도 달라져 있었다.

    “씻고 오셨어요?”

    “알렉스가 묵는 방에서.”

    “아.”

    밀러의 옷차림새는 잠옷이라기보단, 가볍게 차려입은 정장처럼 포멀했다. 대공은 잘 때도 격을 차려야 하나 싶을 만큼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식기 전에 먹어.”

    “세상에. 스테이크를 이 시간에 어디서 가져오신 거예요?”

    배달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호텔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았을 텐데? 린느는 놀란 눈으로 그가 꺼내든 접시들을 바라봤다. 아직 뜨거운 김을 내뿜는 음식들이 즐비해, 입에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린느는 포크를 밀러에게 건넸다.

    “아무튼, 일단 먹고 이야기해요, 우리.”

    밀러는 와인잔을 꺼내다 말고 그녀가 건넨 포크를 쥐었다. 어정쩡한 자세였지만, 그는 그녀가 건넨 포크를 기꺼워하며 쥐었다.

    “그대는 배려가 몸에 밴 거 같아.”

    “배려요?”

    린느는 고기 조각을 입에 넣다가 말고 되물었다. 그러자, 밀러는 와인잔 두 개를 정갈하게 배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대공저 식구들과 단시간에 친해진 게 아니겠나?”

    “에이, 그건 제 덕이 아니라 그분들이 친절하신 거죠.”

    밀러는 그녀의 깜찍한 발상의 전환이 귀여워 웃었다. 그의 미소에 린느는 심장이 잘게 콩콩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웃을 땐 느끼지 못한 감정을, 그가 웃을 때마다 종종 느낀다. 저 매서운 금안이 반달로 휠 때마다 그 엄중한 남자가 흐트러진 거 같아 마음이 함께 몽글해진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그의 웃음을 따라 미소 짓고 있단 걸 깨닫고서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저어, 각하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순간, 위엄 없이 뭐든 말해 보라며 그녀를 부추길 뻔했다. 밀러는 반사적으로 나올 뻔한 빙구 같은 웃음을 삼키며, 근엄하게 그녀의 말을 기다려줬다.

    “이번 연회 시즌엔 이 연회가 끝이에요?”

    “황궁 연회에 들를까 해. 자리를 오래도 비웠어.”

    “하지만, 언제 증상이 나올지 모르잖아요. 괜히 무리하실까 걱정스럽네요.”

    걱정이란 말에 밀러는 입술을 움찔했다.

    “그대가 오늘처럼 곁을 지켜 주면 상관없어.”

    “네? 제가요? 제가 곁에 있으면 괜찮아져요?”

    방울토마토를 먹으려던 그녀가 놀란 눈으로 밀러를 바라봤다. 믿기지 않았다. 미리안도 아니고, 자신이 곁을 지켰다 해서 그의 불안 증세가 나아졌다니? 린느는 고개를 잘게 저으며 밀러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밀러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원래 이렇게 입이 방정맞은 사람이었는지 당황한 탓이다. 그는 잠시 말을 아끼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게. 그렇게 됐어.”

    밀러가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며 수줍게 답하자, 린느는 미간을 좁혔다.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남자였던가? 저 잘난 입꼬리는 비웃기 위해 존재하고, 빛나는 금안은 깔아보기 위해 존재하는 줄 알았건만. 그는 수줍어 말끝을 흐릴 줄 아는 사내였으며, 여인 앞에서 귀 끝을 붉힐 줄 아는 남자였다. 그것도 린느 그녀 앞에서 말이다.

    “다, 다행이네요.”

    린느는 어서 포크로 고기를 찍으며 시선을 피했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한동안 포크 소리와 접시 소리만 들렸다. 밀러는 간간이 멀리 있는 접시를 린느 앞으로 끌어와 줬고, 빈 잔에 와인을 다정하게 따라 주기도 했다. 대접받을 줄만 알던 오만한 남자가 제 앞에서 쩔쩔매며 대접하는 모양새가 낯설기만 했으니. 린느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음 연회는 황궁 연회만 남았다는 거죠?”

    “그렇지.”

    린느는 잘됐다며 냉큼 말을 이었다.

    “그럼, 대공저로 돌아가자마자 라밀라 님을 초대해도 될까요?”

    “그새 많이 친해졌나 보군.”

    밀러는 유연하게 말을 이었다. 라밀라가 굳이 선대 대공의 정부이니, 대공저로 오는 걸 꺼릴 거란 말도 삼켰다. 꺼리면 오지 않을 테고, 꺼리지 않으면 올 테지. 그리고 굳이 그녀가 대공저를 꺼릴 이유가 뭐 있겠는가. 어차피, 선대 대공은 죽었고, 그의 흔적조차 지운 대공저이거늘. 밀러는 라밀라 그녀가 대공저에 오든 말든 별 관심도 없었다.

    “우리끼리 있으니 드리는 말씀인데요. 락센 경이 라밀라 님을 싫어하는 거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까 잠시 단둘이 있었는데요. 온몸에 멍이 있었어요.”

    순간 밀러의 미간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예상은 했지만, 열등감에 미친 작자가 여인을 때렸다니 절로 거부감이 들었다. 라밀라에게 잘못이 있다 한들, 락센이 그녀에게 벌을 내릴 권리는 하등 없다.

    ‘내게도 그런 권리는 없건만.’

    밀러는 락센의 방자한 짓에 쯧, 혀를 찼다.

    “그래서 대공저로 초대하는 거예요. 물론, 오지랖 넓은 짓인 건 알지만요.”

    “오지랖 넓은 게 그대의 매력이기도 하지. 그대 마음대로 해.”

    지금 이 남자가 제게 매력을 운운하며, 뭐든 마음대로 하라 했는가? 린느는 성난 파도처럼 몰아치는 그의 고백 세례에 흠뻑 젖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저렇게 잘난 얼굴로 계속 다정한지 걱정스러울 참이었다. 밀러는 곁에 있던 접시마저 린느에게 밀어 줬다. 그러자, 모든 접시가 린느를 중심으로 부채꼴을 그리며 린느의 포크질만 기다렸다.

    “모자라면 말해. 뭐든.”

    린느는 모자랄 리가 있겠냐면서도 착실히 접시를 비웠다. 그 모습에 밀러는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냅킨으로 가렸다.

    “접시는 리필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이 빈 잔은 리필이 필요하다네요?”

    능글맞게 웃으며 와인잔을 흔들자, 밀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채워 줬다.

    “명령 받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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