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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8화 (57/122)
  • @58화

    “라밀라, 정신 똑바로 차려. 넌 내 부인이야. 대공의 새어머니가 될 뻔한 요부가 아니라. 선대 대공이 이 꼴을 보면 격하게 칭찬해 주긴 하겠군. 자네의 진실한 사랑에 감격하겠어.”

    선대 대공은 라밀라의 오점이었다. 그녀가 무슨 신세로 선대 대공의 정부가 됐는지, 어떤 심정으로 죽지 못해 살았는지 다 알면서 락센은 라밀라를 조롱했다.

    “그래,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올해 연회는 망할 대공 자식 때문에 다 망쳐 버렸으니, 버릇 나쁜 개를 길들이는 데에 정성을 들이면 되겠지.”

    락센의 눈동자가 라밀라의 눈동자를 번갈아 보며 죽일 듯이 노려봤다. 입매는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으며, 그가 뱉은 숨에서 더러운 와인 향이 풍겼다. 하지만, 라밀라는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열등감에 찌들어서 상황 파악도 안 되시나 봅니다. 소백작님께서……!”

    “소백작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말뿐이지, 소백작 주제에 대공저로 그대를 초대할 수 있기나 할 거 같아? 주제 분간도 못 하는 미친 영애의 말을 믿다니! 오, 라밀라, 정신 차려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자네야.”

    평소보다도 더 잔악한 웃음을 지어 대자, 라밀라는 입술이 바싹 말랐다. 가둬 놓고 굶기는 거야, 항상 당하는 일이지만 그의 입에서 여동생이 언급될까 겁이 올라왔다.

    “게다가, 한창 바쁜 연회 시즌인데 소백작이 그대를 초대한다고? 해 봐야 연회 시즌이 끝난 후에 하겠지! 그럼 한 석 달 후쯤이겠군. 그래, 그때까지 빵 한 톨도 주지 않을 테니까 한번 잘 버텨 봐.”

    그럼, 선대 대공이 그대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기적을 보여 주실지 또 모르지! 락센은 복도가 울리도록 조소를 뱉었다. 한참이나 비웃던 그가,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대공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면 뭐든 다 털어놔. 그럼 이번엔 정말로 여동생과 만나게 해 주지.”

    락센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서 그녀를 밀쳤다. 불도 켜지지 않은 곳에서 라밀라는 입을 다물었고, 그는 그대로 문을 단단히 잠갔다. 어두운 곳에 홀로 남은 라밀라는 땅을 더듬으며, 자신을 향해 조소했다.

    ‘대공비 각하께 저지른 짓이 이렇게 돌아오나 봅니다, 각하….’

    라밀라가 흘린 눈물이 콧대를 타고 바닥에 젖어 들었다.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여동생을 위해 대공의 불안 증세를 말해 줘야 할까?

    ‘안 돼.’

    선대 대공비는 매정한 남편에게 매장당해, 참혹하게 죽는 와중에도 끝까지 대공자를 걱정했다. 어수룩하고 정 많은 하녀이자, 유일한 말동무라 여겼던 라밀라의 손을 마치, 신의 손처럼 꽉 잡고 그녀는 부탁하고 또 빌었다.

    「밀러…….」

    죽어가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라밀라는 바싹 마른 선대 대공비의 손을 잡고 홀로 맹세했다. 절대, 절대로 밀러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고작 그걸로, 선대 대공비에게 용서를 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라밀라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이는, 라밀라가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마지막 끈이다. 그런데, 그걸 놓으라니!

    ‘차라리 죽고 말지.’

    이 생지옥에서 더 버틸 이유가 없다. 이 상황에도 여동생의 얼굴을 끝까지 보여 주지 않는 걸 보아하니, 제 여동생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라밀라는 곰팡이 진 벽에 몸을 기대며 여동생의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콧잔등에 어린 주근깨에 환한 미소. 상상만으로도 벅차, 라밀라는 울며 웃었다.

    * * *

    린느는 윤기 나는 검은색 문에 금색으로 적힌 호실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어쩌자고 방 하나만 예약했을까? 차라리 불을 켜 놓고 잠을 설치는 게 낫지. 어쩌자고 집착남주 절륜남과 같은 방을 쓰겠다고 호기롭게 굴었냔 말이다.

    밀러는 능숙하게 한 손으로 열쇠를 열어 문을 열어젖혔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자, 그 금안으로 린느를 내려다봤다.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감사해요.”

    “불편한가?”

    그럼 불편하지 안 불편할까? 오늘 저녁의 달빛이 이상한 건지, 연회장에서 마신 와인이 이상한 건지. 밀러의 금안이 유독 색스럽게 보여, 린느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까지도 앞에 두고 잘만 졸았는데, 잠은 무슨! 피곤함이 싹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이를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밀러는 말없이 옅게 웃었다.

    “불 켜 줄 테니, 일단 들어와.”

    린느는 밀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꼭 붙었다. 그 탓에 그녀의 얇은 드레스 자락 하나만 두고, 그의 손에 맞닿았다. 고개만 돌리면 그의 가슴팍에 폭 안길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달칵.

    문을 닫는 동시에, 침실 불을 환히 밝히자 린느의 숨통이 탁 트였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함께 안도했다. 얼마나 두려우면 방을 하나만 잡아 달라 했을까. 그녀의 아픔이 꼭 제 아픔처럼 와닿아 속이 쓰렸다.

    밀러는 잘난 얼굴로 창가로 향했다. 가는 동안 코트를 벗어 팔뚝에 걸치고, 셔츠 소맷귀를 끌렀다. 널찍한 소파에 코트를 걸쳐 두더니, 린느를 바라봤다.

    “잠깐 소파에 앉아 있어.”

    밀러는 소맷귀를 거칠게 올리더니 욕실로 향했다. 말도 없이 먼저 씻으러 간 걸까, 린느는 고개를 빼꼼히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는 꽤 능숙하게 욕조를 씻었다. 비싼 정장에 물이 튀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욕조를 씻어 내더니, 한참 후에야 그 화려한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콸콸 쏟아지는 따듯한 물에서 김이 올라, 욕조를 따스하게 데웠다. 그제야, 밀러는 약간 흐트러진 머리칼을 무성의하게 넘기며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 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자, 밀러는 린느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왜, 배고픈가?”

    “네? 아니, 뭐…….”

    속을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할까. 린느는 민망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러자, 밀러는 소파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알렉스에게 말해 뒀어. 연회가 끝나고 나면 허기가 지기 마련이거든.”

    “연회에 자주 참석하지도 않으시면서 어떻게 아세요?”

    “자주는 아니지만, 몇 년 전까지는 자주 참석했으니까.”

    밀러의 표정에 약간의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욕실 문 너머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만이 들리자, 린느가 말문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요? 오늘은 어땠어요?”

    “보다시피.”

    밀러는 어깨를 으쓱하며 옅게 웃었다. 오히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건 밀러가 아니라 린느였다. 밀러는 이 상태로 연회장 서너 곳은 더 들를 수 있을 만큼 안색이 환했다. 살짝 붉게 달아오른 뺨은 흡혈귀처럼 창백하던 그의 안색을 생기롭게 바꿔 줬다. 그러다 보니, 평소보다도 그의 낯은 더더욱 잘나 보였다. 린느가 자신의 얼굴을 섬세히 뜯어 살피는 걸 느끼며, 밀러는 어서 말을 돌렸다.

    “그대는? 그대는 어땠는지가 더 궁금해.”

    “저야 뭐…… 보시다시피요.”

    린느는 밀러를 흉내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 린느의 낯은 평소보다 기가 죽어 보였다. 역시, 그 젠장 할 것들 때문일까? 락센에게 그들을 알아서 처리하라 으름장을 놓긴 했으나, 만족스럽지 않다. 그 자리에서 직접 처리했어야 했는데. 밀러의 우아한 이마에 핏줄이 섰다.

    “아까 그들은 신경 쓰지 마.”

    “네? 누구요?”

    린느의 물음에도 밀러는 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나직한 목소리로 조만간 알아서들 처리될 거라는 말만 읊조렸다. 린느는 알 수 없는 말에 그저 고개만 갸우뚱댔다.

    “피곤하긴 했어도, 딱히 기분 나쁜 건 없었어요. 아, 취향도 조금 안 맞긴 했죠.”

    “그런가. 난 조금 실망했어. 그대가 락센 경의 머리쯤은 쥐어뜯어 줄 거라 생각했거든.”

    린느는 이맛살을 접어가며 눈을 크게 떴다. 머리칼을 뜯는다고? 아니,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길래 초면인 사람의 머리카락을 뜯어? 린느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루텡라스는 그렇게 호되게 당해도 싸.”

    “제가 보기엔, 이미 호되게 당한 거 같던데요? 각하께서 아까 눈으로 잡아먹는 걸 제가 다 봤어요.”

    “고작 그거 가지고 잡아먹긴.”

    밀러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마치, 성난 흑표범이 먹잇감을 가지고 논 듯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대 덕분에 연회를 잘 마쳤어. 고맙다.”

    “제가 뭘 했다구요.”

    린느는 그의 칭찬을 어색해하면서도 부끄러워했다. 칭찬에 약한 편이기도 했으나, 밀러의 칭찬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밀러 역시 입매에 선명한 미소를 띤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느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어딜 가냔 듯이 바라봤다.

    “편히 있어. 난 저 소파면 충분해.”

    그는 방에서 가장 구석에 있는 싱글 소파를 가리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놨다. 다른 건 몰라도 상인은 못 해 먹겠다.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 기다란 다리로 저 자그마한 소파가 어떻게 편하다는 건지, 린느는 그만 픽 웃었다.

    그런데도 저 남자는 진중한 얼굴로 그 싱글 소파를 간단하게 옮겼다. 벽을 바라보게 만들고서, 싱글 소파에 몸을 기대기까지 했다. 딱 생각 의자에 앉은 고집불통 대공자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린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밀러는 옆태를 보이며 웃었다.

    “왜 웃지?”

    “여전히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으세요.”

    밀러는 입꼬리만 올려 웃더니, 다시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씻을 테면 씻고, 갈아입을 테면 갈아입고.”

    밀러는 말 끝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젠장이라며 욕지거리를 삼켰다. 마치, 질 나쁜 남자가 된 거 같은 말투가 아닌가. 그녀의 불안증 때문에 벌 받는 대공자 신세가 됐건만. 아무렴 어떠한가, 린느가 어둠 속에서 헤매지만 않으면 이런 벌은 벌도 아니다. 그때, 린느의 구두 굽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저어, 그…….”

    그녀의 걸음이 제게 향할 때마다 머릿속이 난장판으로 변해 갔다. 밀러는 굳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이 끈 죽어도 안 풀리는데요. 끈 좀 풀어 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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