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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8화 (18/122)

@18화

눈치 보던 알렉스가 주춤거리며 물었다.

“스테빈스 경께 서신을 보내시겠습니까?”

밀러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이대로 둬. 청포도, 아니 세르트 영애가 필요로 할 때 움직일 테다.”

“……예, 각하.”

알렉스는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예의를 차렸다. 그리고 집무실 밖으로 나서려던 찰나.

“미리안은?”

“아, 미리안 님 뒤로 붙은 첩자들은 이미 잘라냈습니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다음 주쯤 복귀하실 것 같습니다.”

밀러는 미리안의 아비를 떠올리며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리안의 아비를 죽이고 싶은데……. 차라리 그게 빠르지 않겠나? 언제까지 그녀에게 이 사실을 숨길 수도 없고.”

“언젠간 미리안 님도 알게 되시겠죠…. 하지만, 아직 명분이 없습니다.”

망할 명분.

아비란 자가 자신의 딸을 죽이기 위해 첩자를 붙였는데도? 명분이 없다고? 그저 살아 숨쉬기만 하겠다는데, 미리안의 아비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참에 미리안을 대공저에서 쭉 살도록 두고, 미리안의 가문을 멸문시키면…….’

그럼, 미리안의 오라비까지 죽여야겠지. 그럼 유약한 미리안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왜냐면 미리안은 자신의 오라비를 밀러보다도 믿고 의지하니까.

“그저 미리안이 평범하게 살길 바랄 뿐인데, 그걸 지켜 주기가 이토록 어렵나?”

밀러는 자조하며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 눌렀다. 그리고는 돌연 낯을 달리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말하도록 하고. 미리안의 첫 휴가 기념 선물을 준비하라.”

“…휴가가 선물 아니었습니까?”

“휴가는 휴가고. 선물은 선물이지.”

알렉스는 반쯤 굽힌 허리로 밀러를 빤히 올려다봤지만, 밀러는 차갑게 내려보며 명령했다.

“미리안이 돌아오는 날에 맞춰 세르트 자작가로 초대장 보내 둬라.”

굳어 있던 밀러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뭐든 필요할 때에 받아야 더 고마운 법이지.’

* * *

거대한 아치형 창문으로 햇살이 담뿍 들어와 살롱 분위기를 따스하게 데웠다

짤랑.

살롱 출입구에서는 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노을을 볼 수 있는 카페는 이곳이 유일하다. 특유의 분위기로 젊은 귀족들의 만남의 장이 형성됐다.

“이를 어쩌죠? 남은 자리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아, 네.”

자리를 구하지 못한 귀족들은 한숨을 내쉬며 살롱 밖으로 나섰다.

짤랑.

자리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살롱에서의 자리는 곧 체면이기도 했다.

따라서, 넓고 탁 트인 메인 중앙 자리를 차지한 귀족이 그날 살롱의 셀럽이 되곤 한다.

그리고 그 메인 중앙을 떡하니 차지한 건, 린느였다.

“세상에 그래서요!? 섀르넌 공작님과 춤을 추셨다구요!?”

린느는 자신을 둘러싼 영애들을 보며 콧대를 올렸다.

그러자, 그녀를 둘러싼 영애들이 탄성을 뱉으며 부러운 눈길로 호들갑을 떨었다.

“와…… 제 소원을 린느 님께서 이루셨네요.”

“이게 다 영애들께서 그날 연회장에 불참한 탓이에요! 저 혼자 얼마나 뻘쭘했는 줄 알아요?”

영애들은 눈동자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괜스레 찻잔을 만지작대며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요…. 사실 드뷔르 의상실에서 너무 무리하는 바람에 저희 아버지는 아직도 화가 덜 풀리셨어요.”

“전 그때 300 실버나 썼더라구요? 결혼 지참금에서 뺀다며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요.”

“아휴, 말도 마세요. 저는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맞았어요.”

린느는 영애들의 고충을 들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빗자루로 맞는 건 만국 공통인가……. 큼흠.’

린느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직이 일렀다.

“하긴요. 각자 사정이 있는데 제가 너무 배려심이 부족했어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영애들은 입을 다물고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영애들은 벙찐 표정으로 린느를 번갈아 봤고, 린느는 유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음 연회 땐 함께 가 주실 수 있는 거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애들이 한마음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럼요!!”

“다음 연회랄 것도 없어요! 당장 이번 주말에 함께 가자구요!”

“어쨌든 약속을 어긴 건 저희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린느 님.”

영애들은 한마디씩 거들며 린느를 위로했다.

린느는 입매를 느슨하게 올려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손을 펼쳐 나직이 말했다.

“그거 아세요? 제가 공작님의 발등을 어찌나 밟았는지, 구두를 갈아신고 오신 거 있죠?”

“어, 어머!”

“정말요!?”

영애들은 잘 익은 과실이 껍질을 터트리듯이 밝게 웃었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살롱을 잔잔히 울렸다.

린느는 만족스레 픽 웃으며,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주말에만 울리는 종소리처럼 통통 튀었다.

“하, 누구 목소리가 이렇게 크나 했더니. 또 세르트 영애입니까? 누가 보면 살롱에 혼자 있는 줄 알겠네요?”

퍽 날카로운 말투였다.

핀잔을 주던 영애가 린느를 둘러싼 영애들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린느에게 다가왔다.

린느는 입매를 호선으로 올린 채, 그 영애를 빤히 바라봤다.

“우리가 구면이던가요?”

순간, 영애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구면? 구며언?

“그런 말을 하시기엔 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세르트 영애, 그쪽 때문에 우린 그날 연회를 망쳤다구요.”

연회라는 단어에 린느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아! 샴페인?”

“샤, 샴페인?”

“네네. 샴페인이요. 그쪽이 손목에 힘 빼서 샴페인 쏟았잖아요? 그래서 드레스도 망치구?”

“하? 제가 드레스를 망쳤다구요? 망친 건 린느 님이겠죠!”

린느는 여유롭게 초승달처럼 눈매를 접어 웃었다.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 제대로 사과도 안 해 놓고선!”

호호 웃어 대던 린느가 순식간에 웃음기를 쏙 빼더니 찻잔을 날카롭게 툭 내려놨다.

지켜보던 영애들이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린느를 바라봤다.

“제가 작정하고 망치고자 했으면 모조리 망가트렸을 거예요. 알잖아요? 제가 망가트리는 데에 얼마나 일가견 있는지.”

린느는 입매를 서늘하게 끌어 올리자, 비아냥대던 영애의 입매가 굳었다.

그래, 린느 뷔 세르트가 누구던가!

‘대공저를 쑥대밭으로 만든 미친 영애! 불쌍한 미리안…….’

영애는 린느에게 괴롭힘당하던 미리안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린느는 그런 그녀의 낯빛을 읽고서 최대한 입매를 끌어 올려 싸늘하게 웃었다.

미친년에겐 미친년이 제격이지.

“저 마음이 바뀌었어요. 앞으론, 영애께 집착할까 봐요.”

“지, 집착이요? …그게 무슨 소리죠?”

린느는 시원스러운 입매를 잔뜩 끌어올린 채 나직이 말했다.

“영애가 궁금해졌어요. 자신이 망친 드레스를 내가 망쳤다 우기는 그 간땡이가 부럽달까요? 뻔뻔하기 그지없는 낯짝을 어떻게 그렇게 잘 들이밀며 다니는지 궁금해졌어요.”

숨도 쉬지 않고 와다다 뱉자, 영애는 희게 질린 얼굴로 숨마저 멈췄다.

린느는 영애의 표정을 먹이 삼아 달게 웃었다.

포갠 다리를 풀더니, 유연히 반대로 다리를 포개었다.

마지막으로 린느는 턱을 괴며 상체를 앞으로 숙여 영애를 빤히 응시했다.

“영애, 이름이 뭐였죠? 그대의 이름을 알려 주는 영광을 제게 주세요. 부디요.”

“…….”

영애는 살롱 간판처럼 자리에서 선 채로 굳었다.

간헐적으로 숨을 들이쉬긴 했지만,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그, 그만 가 봐야겠어요.”

잿빛으로 물든 얼굴로 영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린느는 쿨하게 납득하며 차게 식은 찻잔을 기울였다.

짤랑.

살롱 출입문에 달린 종이 짤랑 울리자, 린느는 실소를 뱉었다.

“이 정도면 다신 이상한 소리 안 하겠죠?”

“고작 그걸로 끝이겠어요? 제가 보기엔 앞으론 린느 님 피해 다니실 거 같은데.”

“얼굴이 아주 희게 질렸던데요? 이 새하얀 바닥처럼요.”

린느는 쿠키를 와작 씹으며 영애들의 말을 흘려들었다.

지켜보던 영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연회장에서 프레이 님과 언성 높이셨다는 게 진짜 사실이셨나 봐요.”

린느는 눈을 크게 떴다.

‘프레이라고? 방금 그 싹퉁바가지가 착한 그 프레이라고?!’

그렇다면, 프레이가 왜 그렇게 린느를 싫어하는지 단번에 이해됐다.

‘프레이는 미리안과 둘도 없는 친구니까 당연히 나랑 사이가 안 좋지!’

프레이는 미리안에게 끝도 없이 온정을 베푼 영애였다.

비록 신분 차이가 둘 사이를 떨어트려 놓기도 했지만, 프레이는 끝까지 미리안에게 뻗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 프레이가 무작정 린느를 싫어하는 이유야 뻔했다.

‘내가 프레이였어도 린느가 거슬렸을 테지.’

한마디로, 프레이 입장에서 린느는 그저 친구의 남자를 탐내는 스토커 꼴이란 소리였다.

‘하지만, 난 원작 린느가 아니라고.’

린느는 별일 아니란 듯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뭐, 언성 높일 것도 없었어요. 우르르 몰려와선 갑자기 샴페인을 제게 부으려 하더라구요?”

“어머.”

“그래서 전 피했죠? 아니, 상식적으로 누가 안 피하고 그대로 맞고만 있어요? 안 그래요?”

영애들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랬더니 저렇게 제게 화를 내는 거예요! 참나, 샴페인 피했다고 화내는 건 또 뭔 경우인지.”

“어머, 그렇게 경우 없는 분이실 줄이야……. 하지만, 프레이 님과 부딪치는 일은 피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맞아요. 긁어 부스럼이에요. 괜히 엮여 봐야 머리만 아파요.”

순간, 린느의 안색이 차게 식었다.

‘프레이가 그렇게 잘난 집 영애였나? 소설에선 딱히 그런 말 없었는데.’

나온 표현이라고는

[프레이는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 멋진 여성이었다.]

이 정도뿐이었던걸?

뒤늦게 덜컥 겁이 나 린느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왜, 왜죠?”

“왜라니요? 유명하잖아요? 약혼자는 백작가 영식이구, 프레이 님의 친조부께서도 백작님이시구요.”

진짜, 이 망할 신분 사회!

린느는 굳은 얼굴로 경악을 삼켰다.

‘그 중요한 걸 왜 이제 말해 주냐고오…! 아버지 미리 죄송해요.’

저택으로 돌아가면, 세르트 자작이 좋아하는 찻잎으로 홍차나 끓여 줘야겠다며 한숨을 삼켰다.

그때, 한 남자가 수줍은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저어, 영애?”

그의 말 한마디에 영애들의 시선이 영식에게로 쏠렸다.

한 명만 빼고.

‘그래도 부럽네. 백작저 영식과 약혼도 했다니……. 그런데, 약혼도 했으면서 살롱은 왜 온 거람? 참나.’

말싸움은 이겼을지 몰라도 의문의 1패였다.

린느는 빈 잔을 바라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영애?”

“네?”

린느는 단번에 고개를 들어,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수줍게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 드 마드렛입니다.”

남자는 갈색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소년처럼 쾌활한 미소였으며, 퍽 싱그러운 외모였다.

‘뉴페이스? 홀딱 벗고 다녀도 될 피지컬인데.’

린느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동시에 청록색 눈동자가 빠르게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번에 스쳤다.

‘체대생 재질에 얼굴은 상큼하고, 손은 엄청 크고. 대박, 이런 엑스트라가 있었어? 와, 이건 무조건 합격이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튀어나올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린느는 콧대를 적당히 추어올리며 느슨하게 입매를 올렸다.

“반가워요. 전 린느 뷔 세르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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