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스테빈스 백작저에서 온 남자가 세르트 자작을 보며 가볍게 묵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르트 경. 저는 스테빈스 경의 업무를 대리하는 얀 드 페트릭입니다.”
“반갑소, 페트릭 경.”
세르트 자작의 두껍고 커다란 손이 페트릭 경의 손을 단번에 휘어잡아 단호하고도 거칠게 악수했다.
페트릭 경은 잘 꾸민 자작저를 둘러보며, 실소를 숨겼다.
“스테빈스 백작저에서 여기까지 걸음 하신 겁니까? 하하, 먼 길인데 고생깨나 하셨겠소.”
“고생이라니요.”
“아, 어제 새로 들어온 찻잎이 있는데. 홍차로 하시겠소?”
페트릭 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세르트 자작은 위엄 있는 얼굴로 하인을 바라봤다.
“홍차로 두 잔.”
하인은 가볍게 묵례를 하며 응접실을 비웠다.
대기 중인 사용인들은 말없이 땅만 바라봤고, 페트릭 경은 눈동자를 굴려 응접실을 샅샅이 뒤졌다.
사치스러울 만큼 커다란 샹들리에부터 성인 남자 두 명 정도 길이의 커다란 창문까지.
웬만한 백작저만큼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세르트 자작은 능청맞게 페트릭 경의 자유분방한 시선을 잡아챘다.
“제가 궁금한 걸 못 참는 병이 있는지라.”
허허 웃음까지 곁들여 묻자, 페트릭 경이 뻐근하게 웃었다.
“소문대로 성정이 급하시군요. 본론부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편히 하시오.”
말은 여유로운 척 거만 떨었지만, 세르트 자작은 입 안을 꼬집듯 씹었다. 저 남자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직감적으로 알아챈 탓이다.
“근래에 세르트 영애께서 혼처를 찾는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혼처요? 딱히 그런 적은 없다만.”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스테빈스 백작님께서 세르트 영애의 혼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때, 준비된 홍차 두 잔이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놓였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세르트 자작의 마음을 대변했다.
‘망할 노친네가 뭐 한다고 남의 딸 혼사에 관심을 갖나? 하! 노망이군.’
세르트 자작은 입꼬리만 올려 웃더니, 찻잔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뜨거운 찻물을 한차례 들이켜더니 툭, 사납게 내려뒀다.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스테빈스 가문의 영식들은 모두 혼인한 거로 알고 있건만. 게다가 아이들까지 낳고 잘 살고 있지 않소?”
세르트 자작은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사나웠다.
원래에도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더 사나웠으니. 페트릭 경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아, 오해가 있으신 듯하군요.”
“부디 오해가 아니길. 아니, 제 딸의 나이는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올해로 스무 살이지요.”
“예. 스무 살이요, 스무 살. 잘 알고 계시니 퍽 다행입니다.”
세르트 자작은 어금니를 악물며 뻐근한 웃음을 내비쳤으나, 페트릭 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뗐다.
“도련님들이 아니라, 저희 주인님께서 세르트 영애께 관심이 있으십니다. 물론, 결혼 지참금은 받지 않으실 생각이시고요.”
“하, 무척이나 감사한 말씀이군요?”
“고깝게만 듣지 마십시오. 저희 주인님께서…….”
“결혼은 하셨소?”
갑작스러운 질문에 페트릭 경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세르트 자작은 그런 그를 벼랑 끝에 내몰 기세로 빤히 응시했다.
“아이는 있으십니까?”
“……아직 없습니다만.”
세르트 자작은 픽,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니 잘도 결혼 지참금이니 뭐니 떠드시는 게지요. 차라리 다행입니다. 아이 있는 부모가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떠든다면 그 얼마나 잔악한 일이겠소?”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돌연, 세르트 자작의 미간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이어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어깨너비 이상으로 넓혀 테이블을 부술 기세로 쿵 하며 짚었다.
세르트 자작은 상체를 위협적으로 페트릭 경에게로 기울더니 나직이 으르릉댔다.
“내 하고 싶은 말을 그쪽에게 다 퍼붓는다면, 그쪽은 내 저택에 발 들인 것부터 후회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결혼이니 뭐니 떠들 거 없이 나가시오! 당장.”
“감정적으로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스테빈스 백작가는 유서 깊은…….”
세르트 자작은 미간이 옴폭 패일 만큼 인상을 구겼다.
“감정적? 유서 깊은? 뭐 유서 깊은 가문이니, 내 딸을 돈 받고 팔라는 소리오? 망언도 적당히지!”
그의 고함이 응접실을 무겁게 울렸다.
세르트 자작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양새에 하인들은 입을 가로막았다.
“표현이 너무 과하십니다.”
“그럼, 댁이 직접 74세 노공과 혼인하시오! 그럼 되겠군!”
세르트 자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 밖으로 거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페트릭 경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언짢음을 감추지 않았으니, 간헐적으로 조소까지 뱉었다.
“…하! 품위 없이.”
“로비까지 안내해 드리지요, 페트릭 경.”
“필요 없어! 이깟 콩알만 한 저택 주제에 안내할 게 뭐 있다고!”
“아, 네.”
페트릭 경은 사용인의 불량한 태도에 헛웃음을 뱉더니, 사용인을 위아래로 치훑었다.
“하? 지금 그 태도 뭐지?”
“무슨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하나 같이 교양도 없군! 세르트 영애는 안 봐도 뻔할 테지.”
“그렇다 칩시다.”
하인은 ‘저놈의 주둥이를 확 칠까 보다’라며 빈정대며 자리를 옮겼다.
페트릭 경은 넋 나간 얼굴로 헛웃음을 뱉더니 주섬주섬 챙겨 떠났다.
‘근본 없는 졸부 같으니! 스테빈스 경께 낱낱이 다 고할 테다.’
그는 어금니를 잘근잘근 깨물더니, 몸을 틀어 자작저를 째려봤다.
눈으로 욕이라도 하듯 자작저를 바라보며 마차에 올라탔다.
“…….”
그가 마차에 올라타는 걸 확인하자마자, 이를 지켜보던 하녀가 쪼르르 계단으로 올랐다.
잘 닦인 대리석 계단을 까치발로 성큼성큼 올랐다.
2층 복도를 지나, 린느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달칵.
린느 방이 유연하게 열렸고, 하녀가 뛰어와 메리의 귀에 속삭였다.
“정말? 주인님께서 내쫓았다구?”
하녀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고, 메리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린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창밖만 바라봤다.
‘미친, 이건 아니야. 아무리 여기가 피폐물 소설이라지만, 내 나이 20살인데 74살 백작이라니. 이건 아니지!’
린느는 손톱을 까득까득 씹으며 불안에 떨었다.
지켜보던 메리가 무릎을 꿇어 린느를 올려다봤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께서 내쫓으셨대요! 네?”
“…….”
그래, 당장은 그럴지도 모르지.
이런 일이 생길까 미리 시간은 끌어 두긴 했지만.
만약, 스테빈스 백작이 넉넉하다 못해 넘치도록 지참금을 지급하면?
그때에도 세르트 자작이 거부할까?
‘글쎄, 잘 모르겠는걸.’
빙의 전 자신을 버리고 떠난 부모님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식을 버렸다.
그런데, 거기에 돈까지 얹겠다면, 또다시 버림당하지 않을까?
그때처럼? 린느는 쿵쿵 울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메, 메리. 불 좀 더 환하게 켜 줄래?”
어릴 적, 어둠에 갇힌 채로 부모님을 애타게 찾던 때가 떠올라 구역감이 치밀었다. 린느는 방에 있는 불을 모조리 켜 놓고서 무릎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밀러가 어서 혼처를 찾아 주든, 섀르넌과 자리를 마련해 주든 해야 해.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지?’
린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창밖만 바라봤다.
* * *
만년필이 질 좋은 종이를 긁으며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마침표를 쿡 찍으며 그의 커다란 손이 우뚝 멈췄다.
금빛 눈동자가 창밖의 달을 향했다.
“오늘도 달빛이 밝군. 알렉스?”
밀러는 마지막 남은 서류를 들며,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은 곁에서 조는 알렉스에게 닿았다.
“요즘 골 때리는 일이 꽤 자주 생기는군.”
밀러는 잠든 알렉스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며 들고 있는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혼처가 없을 줄은 알았다만, 이 정도인가?’
평균 연령 60대인 건 둘째치고, 스테빈스 백작이라니.
스테빈스 백작가의 셋째 영식이 올해로 43세가 아니었던가?
밀러는 더러운 꼴을 본 사람처럼 혀를 찼다.
“알렉스.”
짐승의 그르렁대는 소리처럼, 밀러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리자 알렉스의 어깨가 흠칫했다.
흐트러져 있던 몸을 단번에 일으켜 칼같이 각을 맞췄다.
“예! 가, 각하!!”
“이게 끝인가?”
밀러는 우아하게 집게로 서류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때마다 종이가 팔랑거리며 알렉스를 묘하게 압박했다.
알렉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뗐다.
“리스트에는 변동 사항이 없습니다만…….”
밀러의 짙은 눈썹이 꿈틀하며 미세하게 움직였다.
“페트릭 경이 세르트 자작저에 직접 찾아갔답니다.”
“페트릭?”
“네! 스테빈스 백작가의 가신이지요.”
“아아.”
이제야 알겠단 듯 밀러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머리칼이 그의 이마를 슬쩍 가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혼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세르트 영애께선 혼기가 차셨으니 말이죠.”
밀러는 흘러나온 머리칼을 뒤로 쓸어올리며 조소를 뱉었다.
“멀쩡한 부인 세 명이나 잡아먹고도 배가 덜 부르나 보군. 탐욕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그건 스테빈스 백작일 테지.”
밀러는 천천히 집무실을 거닐며 뒷짐을 졌다.
그때마다 고급스러운 구둣발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밀러의 오랜 버릇이었다.
“세르트 경은 뭐라던가?”
“학을 떼며 쫓아냈답니다. 아무리 돈 좋아하는 세르트 경이라지만, 그건 도리가 아니라 여겼겠지요.”
“고작 도리의 문제였겠나? 진심으로 화가 났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식을 건드렸으니.”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세르트 경께서요? 의외군요. 집안 문제에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 그만큼이나 세르트 자작은 귀족의 표상대로 사는 자다.
그래서 밀러와 딱히 만날 일도 없었고, 연결된 접점도 없었겠지. 두 사람의 유일한 접점이라곤, 세르트 영애뿐이니까. 그래서 관심조차 없었다.
귀족들이란 필요에 의해서 움직이는 동물들이니까.
‘나도 마찬가지이고.’
밀러는 나직이 조소했다.
그런 세르트 자작이 밀러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트린 건 한 달 전이었다.
「각하,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제 딸을 오냐오냐 키운 탓입니다. 빠른 시일 내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람 많은 연회장에서 그는 밀러에게 서슴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체면으로 먹고사는 귀족이, 그 이목 쏠린 곳에서 머리를 숙이는 건 쉽지 않았을 테지.
그래, 그때 세르트 자작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그 건방진 청포도가 날뛰도록 두지도 않았을 테고.’
밀러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기품 있는 콧대를 추어올리며 나직이 일렀다.
“내 밭에 난 과실을 좀먹는 해충이라면 잡아 죽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