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55화 (255/257)

255화 제1장 결자해지 (5)

- 과장님이 새로 보낸 이 교수 말입니다. 간이 콩알만 한데요? 이래서야 앞으로 우리랑 일하겠습니까?

강아람은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로 이믿음을 흉보았다.

이믿음이 병원에서는 수술도 잘하고 환자도 잘 챙길지 몰라도 바깥에서는 아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고 무엇보다 담력이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처음이라고 하잖아.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 주자고.”

오랜 통화로 귀가 뜨끈해지자 강태섭은 휴대폰을 든 손을 바꾸었다.

- 이시형 교수는 처음부터 잘하지 않았습니까?

“시형이가 특이 케이스지. 리베이트 제안을 처음 받았는데 고민 없이 얼씨구나 하는 의사가 몇이나 될 것 같나?”

- 듣고 보니 과장님 말씀이 맞는 것도 같습니다.

“맞는 것 같은 게 아니라 맞는 말일세.”

- 그건 그렇고 이시형 교수는 이제 버리시는 겁니까?

강아람이 노골적으로 물었다.

강태섭은 지금까지 이시형을 이용해 리베이트 현금을 전달해 왔다.

전달자가 이시형에서 이믿음으로 바뀌자 강아람이 이시형의 처분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둘 다 같이 가야지. 둘 다 필요한 재목들이니까.”

- 과장님은 참 욕심도 많으십니다.

“내 욕심으로 자네도 먹고 산다는 걸 잊지 말라고.”

- 하하하, 당연히 감사하다는 뜻이었죠. 어쨌거나 이믿음 교수 건은 제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겠습니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통화를 끊은 후 강태섭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현재 시간은 오후 8시.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간 아내는 10시쯤은 되어야 돌아올 것이다. 아직 출가를 못 한 둘째 아들은 야근 중일 테고.

덕분에 넓고 커다란 아파트는 온전히 강태섭의 차지였다.

고요하다 못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실.

그 삭막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싫어서 강태섭은 TV를 켜고 소리를 올렸다.

‘그 녀석,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군.’

강태섭은 물끄러미 올려다본 천장에 이믿음의 얼굴을 그렸다.

환자밖에 모르는 젊고 정의로운 의사는 과연 리베이트에게 어떻게 대처할까.

자신의 신념을 지킬까.

아니면 목돈에 흔들리며 지조를 잃어버릴까.

강태섭이 원하는 건 당연하게도 후자였다.

이믿음이 후자를 택한다면 이믿음은 강태섭과 한 배를 타게 될 것이다.

리베이트라는 배가 좌초하면 함께 익사하는 운명 공동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믿음이 전자를 택한다면?

리베이트를 거절하고 의술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다면?

강태섭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믿음을 적당히 이용하다가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강태섭의 리베이트를 알아 버린 이믿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뭐, 리베이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증거를 확보해 폭로까지 할 수 있는 건 아닐지라도 말이다.

‘내일이면 모든 게 결판나겠군.’

강태섭은 거실로 이동해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들이켰다.

딸칵!

캔 맥주는 씁쓸하고 톡 쏘고 시원했다.

* * *

다음 날 오전.

점심시간이 됐음에도 나는 진료실에 남아 있었다.

“교수님, 식사 안 하세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늘은 혼자 먹으렴.”

“알겠습니다, 과장님.”

최경훈을 먼저 식당으로 보내고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내가 전화를 건 사람은 강주현이었는데 강주현과의 인연은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전에 맺어졌다.

신원 대학교 본원에 인턴 시험을 보러 가던 날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전생에서 응급 의학과 과장 강만식의 아버지인 강주현이 발작으로 쓰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병원을 샅샅이 뒤지던 중 주차장에서 의식을 잃은 강주현을 천신만고 끝에 발견했다.

꼼꼼한 관찰을 통해 강주현이 천식 환자라는 사실을 파악한 후 응급 처치를 했고.

이후 부자와 식사를 함께 하면서 들은 충격적인 소식.

그것은 강주현이 은퇴한 경찰서장이라는 사실이었다.

‘부디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응답 없이 길어지는 통화음에 초조함이 깊어졌다.

이번 리베이트 폭로의 중요한 열쇠를 강주현이 쥐고 있었다.

강주현의 인맥을 통해 오늘 있을 사건 현장을 덮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 긴급 체포가 무슨 119 호출하는 것처럼 되는 줄 압니까? 사람 체포하는 일 쉽게 보지 마세요.

“…….”

- 제대로 고발하고 싶으면 제 눈이 확 트일 증거부터 가져오시라고요. 아셨죠?

며칠 전 리베이트 폭로를 위해 인근 경찰서를 찾아갔다가 나는 경찰서 직원에게 타박만 맞고 돌아왔다.

녹음 파일을 들려줘도 소용없었다.

직원은 녹음 파일의 신빙성을 믿지 않았다.

아는 지인하고 대충 말을 맞춘 것 아니냐며 직원은 도리어 나를 의심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맥을 동원하기로 했다.

- 콜록. 콜록. 여보세요?

연결을 포기하려던 찰나, 기침 소리와 함께 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강주현이 마침내 전화를 받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혹시 저 기억하십니까? 아주 오래전 일인데 그 병원 주차장에서…….”

- 알다마다. 내 휴대폰에 자네가 생명의 은인으로 저장되어 있는걸?

강주현이 껄껄 웃었다.

그새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기 때문일까.

강주현의 목소리는 가늘고 힘이 없었다.

나는 강주현과 5분 정도 근황을 주고받은 후 본론을 꺼냈다. 리베이트를 까발리고 싶은데 증거는 확보 못 했다.

그래서 현장을 덮칠 수 있게 어르신께서 힘을 써 주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강주현의 대답은 호탕했다.

- 은퇴한 지 오래됐다고 해도 설마 그 정도도 못 해 주겠어? 금방 사람 알아보고 연락 주지.

“감사합니다, 어르신!”

나는 강주현이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조아려 가며 감사를 표시했다.

리베이트를 찢어발길 창은 손에 넣었고.

다음은 내 퇴로를 확보할 차례인가.

* * *

병원 로비에 위치한 안내 데스크 앞에서 나는 이시형과 마주쳤다.

물론 우연은 아니었다.

내가 먼저 이시형에게 전화해서 점심이라도 한 끼 하자고 제안을 했으니까.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이 교수가 웬일로 나랑 점심을 먹자고 합니까?”

“예상은 하셨겠지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요.”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둘 사이의 갈등은 봉합하듯 쉽게 꿰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설픈 봉합을 시도했다간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었고.

그럴 바엔 차라리 냉전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으리라.

우리는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국밥집을 찾았다.

자리를 잡고 메뉴를 주문하자 찾아온 어색하고도 무거운 침묵.

주도권을 쥔 내가 선수를 쳤다.

“교수님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과장님이 말씀 안 하신 모양이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번에 수술용 로봇 도입이 확정된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압니다. 그게 왜요?”

“그런데 말입니다. 업체를 선정하고 과장님이 관례로 진행하는 그 일 있지 않습니까? 그 일 제가 맡게 됐어요.”

나는 말을 마치고 이시형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금시초문이었던 분위기였다.

내가 리베이트 운반책이 됐다는 사실에 이시형은 크게 당황한 듯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하겠지.

본인 밥그릇을 졸지에 내게 빼앗겨 버렸으니.

벌컥. 벌컥.

쾅!

찬물을 거칠게 쭉 들이켠 이시형이 큰 소리가 나게 컵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야수처럼 사나운 그의 눈빛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그 이야기를 굳이 나한테 전하는 까닭이 뭡니까? 내 속 뒤집어지는 꼴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전 그런 악취미는 없으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뭡니까?”

이시형의 감정이 크게 흔들린 것을 확인하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람을 조종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그것은 그 사람의 이성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는 것이었다.

강태섭이 애용하며 가장 잘 사용하는 수법.

나는 지금부터 그 수법을 이시형에게 사용할 작정이었다.

“솔직히 그런 생각 안 해 보셨나요? 강 과장님이 우리 둘 사이를 저울질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

“과장님은 어떤 때는 제 편을 드시고 어떤 때는 이 교수님 편을 들기도 하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시형은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심은 의혹의 씨앗이 이시형의 가슴에 무사히 자리 잡았음을 나는 알아차렸다.

“하지만 과장님이 계속 그런 식이라면 답답한 건 저와 이 교수님이겠죠.”

“빙빙 말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봐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오늘 저녁, 우리 둘이서 과장님 댁을 찾아가는 겁니다.”

“뭐, 찾아가서 양자택일이라도 받자는 거예요?”

“역시 이시형 교수님의 식견은 탁월하시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나는 이시형을 치켜세우며 계획을 설명했다.

우리 둘이서 불필요하게 다투며 피를 흘릴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이 기회에 누가 진짜 2인자인지 과장에게 간택을 받기로 하고 패자는 깔끔하게 물러나자고 했다.

이시형이 고민하는 사이 주문한 국밥이 식탁에 놓였다.

뚝배기에서 하얀 김이 아지랑이처럼 넘실넘실 올라오고 있었다.

이시형의 마음이 그 김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와 이 교수님이 다투는 근본적인 이유는 과장님에게 있습니다. 그건 이 교수님도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쓰읍… 따지고 보면 내가 이 교수와 앙숙으로 지낼 필요가 없는 것도 맞는데…….”

“…….”

“만약 과장님이 나를 선택한다면 말이에요. 이 교수는 깔끔하게 물러날 자신 있어요?”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그러는 이시형 교수님이야말로 각오는 되셨습니까?”

나는 얄미운 목소리로 이시형을 도발했다.

대화가 슬슬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최후의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서는 이시형을 조금 더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 교수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과장님이 근무한 지 세 달도 채 안 된 이 교수를 선택할 일은 없어요.”

“그럼 서로 합의 본 겁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이시형이 내 손을 잡았다.

이시형은 모든 게 본인 뜻대로 풀려 후련하다는 눈치였지만 내 계획은 사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나저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국밥에 새우젓으로 간을 하며 운을 뗐다.

“오늘 강 팀장하고 저녁 약속이 잡혔는데 그 자리, 이 교수님이 대신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죠?”

“친한 친구 부친상이 있어서 장례식장에 다녀와야 합니다. 조문을 끝내면 9시쯤 될 것 같은데 그때 과장님 댁에서 봬도 괜찮겠죠?”

“…….”

“이시형 교수님도 강 팀장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기도 하고요.”

잠시 고민하던 이시형은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이번 리베이트 운반책은 자기가 맡겠다.

대신 밤 9시까지 꼭 과장님 댁으로 오라고 강조했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만 해도 적개심과 분노로 가득 찼던 이시형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시형은 자기가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불쌍한 중생 같으니라고.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감정이 탐욕과 자만이라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뜨끈한 국밥을 한 숟가락 떠먹고 만족스런 미소를 띠었다.

필요한 관객과 배우들이 모두 모인 상황.

벌써부터 저녁에 펼쳐질 공연이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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