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제1장 결자해지 (4)
1층 외래 진료실로 내려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무겁기만 했다.
강태섭과 나눈 대화는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꼴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켜 두었건만 강태섭은 리베이트라는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뇌물이라든가, 보상이라든가 하는 리베이트를 연상케 하는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녹음 중이라는 사실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 내가 미리 알아봐 둔 수술용 로봇 전문 생산 업체가 있어. 자, 이게 명함이야.
강태섭이 테이블 위에 명함을 내려놓고 내 쪽으로 밀었다.
- 빠른 시일 내에 이 사람을 한번 만나 봐.
- 만나서 뭘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명함을 챙기며 두 번째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속으로 간절하게 되뇌었다.
제발 말해, 리베이트를 챙기면 된다고.
뒷돈을 받으면 된다고.
- 별거 없어. 커피라도 한잔 나누면서 이야기하면 돼.
- 정말 그게 다입니까?
나도 모르게 실망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뭐야, 지금 뭔가를 밝히는 눈치였는데? 이 교수한테 내가 모르는 면모가 숨어 있었나 봐?
강태섭이 희죽희죽 웃었다.
내가 리베이트를 원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웃기지 마, 내가 당신처럼 속물인 줄 알아?
- 그런 게 아닙니다. 만나서 대화만 하는 거면 일이 너무 쉬워서요. 가격 협상이라든가. 좀 더 복잡한 이야기가 오고 갈 줄 알았거든요.
- 구체적인 협상은 나나 다른 윗사람들이 해. 이 교수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강태섭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일은 그쪽에서 알아서 진행할 테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고. 일 끝나면 잠깐 우리 집 들르고.
- 알겠습니다, 과장님.
강태섭과의 면담은 그렇게 소득 없이 종료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면담을 마치고 외래 진료실로 향하면서 내 생각은 180도 달라졌다.
나는 소득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반대로 막대한 손해를 입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번 대화에서 강태섭은 리베이트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리베이트를 받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검은 뒷돈은 반드시 거래될 것이다.
내가 전생부터 알아 왔던 강태섭을 생각하면.
대화 중에 은근히 풍겼던 구린내를 생각하면 말이다.
다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리베이트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점이었다.
강태섭은 나를 리베이트 운반책으로 낙점했다.
나와 업체 담당자와의 미팅을 주선했고 미팅 후 본인의 집으로 찾아오라고도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업체 사람에게 돈을 받아서 본인에게 직접 배달하라는 뜻 아니겠는가.
내 입장에선 실로 황당무계한 전개였다.
리베이트를 폭로해야 할 내가 오히려 리베이트 관계자가 되어 버린 꼴이니까.
‘어쩔 수 없이 거절해야 하나?’
범죄와 엮이고 싶지 않으므로 강태섭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옳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 보니 그 방법도 썩 훌륭해 보이지는 않았다.
리베이트 얽힌 이해 관계자가 아니라면 리베이트를 폭로할 내부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리베이트는 항상 음지에서 은밀하게 이뤄지기 마련이기에.
거절의 타이밍도 애매했다.
제안을 받은 즉시 거절했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 거절 의사를 밝히면 강태섭이 내 진의를 의심할 확률이 높았다.
최악의 경우 리베이트를 포기할 확률도 존재했다.
강태섭은 강력한 물욕만큼이나 강력한 조심성도 가졌는데 리베이트가 함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 즉시 발을 뺄 것이다.
그러면 소아 흉부외과 수술까지 해 가며 마련한 기회는 허무하게 날아가겠지.
하… 이제 어쩐다?
리베이트 판에 발을 담그자니 범죄자가 될 판이고.
그렇다고 발을 빼자니 리베이트 수법을 알아내기 힘든 데다가 강태섭의 의심을 살까 두렵고.
함정에 빠진 건 강태섭이 아니라 반대로 나인 것만 같았다.
* * *
이틀 뒤 저녁.
외래 진료 스케줄을 마친 나는 해운대 번화가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거리는 청년들과 퇴근한 직장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도로 옆에 늘어선 가게들의 간판과 네온사인은 눈부셨으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 가요가 떠들썩하게 고막을 때렸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심각한 사람은 나 혼자뿐인 듯했다.
지이이잉.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꺼내서 번호를 확인해 보니 동생 사랑이의 전화였다.
어느새 법대를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 취직한 자랑스러운 내 동생.
이번 리베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나는 사랑이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어, 사랑아. 통화 괜찮아?”
- 형, 그거 내가 해야 하는 소리 아니야?
사랑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전화 바로 못 받아서 미안해. 선배랑 이번에 맡은 케이스 토론하느라 답신이 늦었어.
“괜찮아. 취직하고 한창 바쁠 때인 거 다 아는데. 내가 법률 쪽으로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다.”
- 얼마든지. 내가 아는 건 아는 대로, 모르는 건 선배한테 물어봐서 알려 줄게.
“우리 동생, 듬직하네. 포켓몬 마스터가 되겠다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 놀랍게도 그 꿈은 아직 안 버렸어.
우스갯소리를 곁들이며 이어진 대화.
나는 사랑이에게 의료 리베이트에 관한 법률을 이모저모 물었다.
사랑이의 말에 따르면 첫째로 리베이트 법은 쌍벌제라고 했다.
돈을 준 사람이나, 돈을 받은 사람이나, 돈을 운반한 사람이나 똑같이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리베이트로 적발되더라도 처벌 수위는 그리 높지 않다고 했다.
실형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집행 유예.
몇 개월 동안 의사 면허 정지가 되는 수준이라고 했다.
처벌이 약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강태섭을 내쫓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사건이 폭로되면 강태섭의 평판은 뉴스에 오르내리며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의사 면허가 정지되면 과장 자리 또한 내놓아야 할 테고.
이후 강태섭이 재기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설령 재기한다고 해도 신원 대학교 병원 계열에는 감히 발을 못 디디겠지.
- 그리고 리베이트와 관련해서 최근에 적용하고 있는 법이 있어.”
“무슨 법인데?”
- 긴급 체포라고 구속 영장이 없어도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단 말이지.
“증거만 충분하면 바로 현장을 덮칠 수 있다는 거네?”
- 맞아. 근데 형… 혹시… 아니지?
사랑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라도 내가 리베이트에 엮인 건 아닐까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걱정 말라고 사랑이를 다독이며 통화를 끊었지만 시름은 한층 깊어졌다.
리베이트 운반책이 되면 나 역시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혹시 강태섭은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나를 끌어들인 게 아닐까.
의도한 거라면 실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 * *
그 날 저녁, 나는 해운대 번화가에 위치한 카페에서 의료 기기 업체 팀장을 만났다.
팀장의 이름은 강아람.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웃는 낯이 자연스러운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 과장님께 이 교수님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미남이시라 그런지 한 번에 알아보겠던걸요?”
강아람이 넉살을 떨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강아람과 악수를 나눴다.
“너무 얼어 계신 것 아닙니까? 후배 의사들 다루듯 편하게 대해 주세요.”
“하하하,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요. 원체 쑥맥이기도 하고.”
나는 일부러 순진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야 원하는 정보를 쏙쏙 뽑아낼 수 있을 테니까.
강아람이 음료를 주문하는 동안, 나는 휴대폰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부디 이번에는 쓸 만한 증거를 많이 녹취해야 할 텐데…….
우리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서 한동안 쓸데없는 소리를 주고받았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네.
해운다 번화가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네 등등.
본론에 들어가기 전 입과 머리를 예열하는 단계였다.
“그… 제가 잘 몰라서 여쭙는 건데요. 리베이트는 팀장이 직접 처리하시나요?”
대화가 잠시 끊어졌을 때, 나는 노골적으로 물었다.
“네, 제가 담당입니다. 앞으로 저를 자주 보실 거예요.”
“과장님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셨나 보죠?”
“그럼요. 막역하다면 나름 막역하다고 볼 수 있는 사이죠. 저희는 공생하고 있으니까요.”
리베이트라는 범죄를 공생에 빗대다니…….
강아람의 사고방식을 나는 알 것도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강아람은 강태섭과 리베이트 사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빈손으로 돌아갈 일은 없겠다 싶었다.
“저는 괜히 긴장이 되네요. 뭔가 큰 범죄를 앞둔 기분이랄까요?”
“아휴, 범죄라니.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세요. 이건 관행입니다, 관행. 다른 의사분들이나 약사분들도 다 하는 거예요.”
강아람은 능숙하게 나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죠? 죄가 없는 자라면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라고. 이 바닥에 리베이트로 다른 의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의사는 극소수입니다.”
성경까지 들먹이는 강아람의 화술에 나는 혀를 찼다.
강아람은 확실히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인 게 분명했다.
그래서 강태섭의 간택을 받았겠지만.
“말씀을 듣고 보니 죄책감은 많이 가시네요. 그런데 혹시 보건 당국에 걸리면 어떻게 하죠?”
나는 겁먹은 척 또 다시 연기를 펼쳤다.
그래, 어디 한번 또 나불거려 봐.
다 녹음해 줄 테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절대 걸릴 일 없으니까.”
“왜죠?”
“저희는 시원하게 현금 거래만 합니다. 리베이트 비용을 골프 회원권이나 회식비로 돌려 치지 않아요. 원무과를 껴서 얄팍한 기부 형식도 쓰지 않고요. 현금 거래만 하는데 무슨 수로 적발합니까?”
확실히 현금 거래만 한다면 적발당할 가능성이 낮긴 했다.
리베이트 법이 쌍벌제로 운용되기에 내부 고발을 하더라도 내부 고발자 또한 처벌을 받을 테고.
내 예상과 달리 업체와 의사 간의 리베이트는 철옹성이었다.
무너트리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다.
“이제 걱정은 다 해결되셨습니까?”
강아람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정도 설득했으면 알아 듣었지?’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었음에도 나는 섣불리 리베이트를 승낙하지 못했다.
승낙 즉시 나 또한 처벌 대상이 될 테니까.
이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을까.
“팀장님.”
“네, 말씀하세요.”
“하루만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워낙 새가슴이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요.”
“이시형 교수님은 처음부터 잘 처리하시던데. 이믿음 교수님은 조금 우유부단하시네요?”
강아람은 이시형을 언급하며 나를 돌려 깠다.
그런데 이번 건 퍽 유용한 정보였다.
나 이전에는 이시형이 리베이트를 처리했다 이거지?
찰나의 순간 나는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묘수를 떠올렸다.
그 방법이라면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강태섭과 이시형과 강아람을 한 번에 보낼 수 있었다.
왜 지금까지 그 단순한 생각을 못 했을까.
속내를 숨긴 채 나는 결정을 빨리 못 해서 미안하다고 강아람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내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내일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아마 많은 것이 변화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