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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45화 (245/257)

245화 제4장 귀국(5)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흉부외과 제1진료실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최경훈은 환자들로 가득 찬 흉부외과 대기석을 응시했다.

환자들의 나이는 4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했는데 가뭄에 콩 나듯 20대 청년들이 껴 있었다.

여기서 통탄할 만한 사실.

진료를 받고 싶은 환자는 이렇게 많은데 정작 이믿음에게 진료받고 싶은 환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우상이 느끼고 있을 자괴감을 헤아리다 보니 최경훈은 문득 우울해졌다.

“강 선생님.”

그는 데스크에 앉아 있는 외래 간호사 강효진을 불렀다.

“표정이 비장하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당연히 무슨 일이 있죠. 혹시 오늘 신환(병원에 처음 진료 보러 오는 환자) 몇 명이나 돼요?”

“잠시만요.”

강효진이 뜸을 들였다가 스무 명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신환이 20명인데 그중에 이 교수님 환자는 3명밖에 없는 거죠?”

“네, 오히려 편해서 좋지 않아요?”

“전혀 좋지 않은데요. 오히려 불쾌할 정도에요. 환자들이 이 교수님의 진가를 못 알아보고 있으니까요.”

“제 생각에 이 교수님은 자리를 잡는 데 다른 교수님보다 더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강효진은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하긴 강효진의 외래 간호사 짬밥은 10년이 넘었다. 남다른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럼 이 기회에 천기누설 한번 해 주시죠.”

“푸훗, 천기누설까지야. 이유는 간단해요.”

강효진이 밝히는 이믿음이 고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이믿음의 나이와 외모였다.

흉부외과 진료를 받는 환자들은 주로 중년에서 노년층이었다.

이 환자층에게 이믿음은 너무 어리고 젊어 보였다.

그리고 이는 이믿음의 경험과 경력이 부족하다는 쪽으로 해석될 여지가 높다는 것이다.

순간 최경훈은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건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죠. 능력이 출중하니까 젊은 나이에 부교수까지 된 건데.”

“최 선생님 마음은 이해하는데 진정하세요.”

발끈한 최경훈을 강효진이 어르고 달래며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환자들은 최 선생님처럼 생각 안 해요. 머리 아프게 의사 경력 같은 건 안 본다고요. 사람들이 보는 건 저거예요.”

강효진의 손끝이 외래 진료실 기둥에 부착된 전광판을 향했다.

진료실 앞 전광판에는 외래 교수들의 증명사진이 번갈아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전광판 속 이믿음을 확인한 후에야 최경훈은 강효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전광판 속 이믿음은 어려 보였다.

30대 후반인 이믿음은 너그럽게 본다면 20대 후반으로도 보였다.

워낙 출중한 외모 탓에 의사가 아니라 의사 가운을 걸친 모델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생긴 것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최경훈은 머리털이 나고 처음 깨달았다.

“씁쓸하네요. 이 교수님이 잘되기를 바라는 입장에선. 강 선생님은 꿀 빨아서 좋죠?”

평소 강효진과 친분이 있던지라 최경훈이 농담조로 말했다.

“솔직히 달달하네요. 다른 외래 간호사들도 절 부러워하거든요.”

“꿀 빨 수 있을 때 열심히 빨아 두세요. 조만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최경훈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지고 진료실로 복귀했다.

* * *

화장실에 다녀온 최경훈이 말했다.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외래 환자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심드렁하게 알고 있었노라고 대답했다.

환자들이 의사의 인상과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은 전생에서도 이미 깨우친 바였다.

다만 동안인 외모는 어떻게 건드릴 있는 부분이 아니라 손을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어려 보여도 설마 이렇게까지 환자가 없을 거라고 예상 못 한 점도 있고.

‘뭐, 의학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어느 정도 해소가 되겠지.’

TV에 출연하게 되면 나는 천재 이미지를 연출할 생각이었다.

원숙해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 천재 이미지였으니까.

“우리도 슬슬 밥값 좀 해 볼까?”

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 있는 외래 환자 3명은 전부 오후 시간에 집중되었다.

똑. 똑. 똑.

때마침 기다리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유우진 환자분 진료실로 들어가세요’라는 외래 간호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수줍게 들어선 유우진은 29세의 청년이었다.

내게 목례를 하고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대망의 외래 첫 환자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20대 청년이 앓을 만한 심장 질환은 뭐가 있을까.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숨쉬기가 힘듭니다. 식은땀이 날 때도 있고요.”

“언제부터 아프셨죠?”

“한 달 전부터 그랬는데 이번 주부터 유독 증상이 심해져서요.”

“가족 중에 심장 질환이나 다른 질환을 앓고 계신 분이 있나요?”

“어머님이 협심증 때문에 풍선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질환으로 드시고 있는 약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나는 꼼꼼한 질문으로 유우진의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 갔다. 하지만 의미 있는 정보라고는 가족력뿐이었다.

일단 유우진의 증상이 너무 광범위했다.

흉통과 호흡 곤란은 거의 모든 심장 질환에서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예를 들어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다는 호소를 했다면 대동맥 박리를 의심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외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료 전 측정한 혈압도 정상이라서 딱히 의심가는 질환이 없었다.

“특이 사항은 없어 보이는데 일단 간단한 검사부터 해 볼게요. 최 선생님, ECG(심전도)랑 흉부 엑스레이, 혈액 검사 오더 내 주세요.”

지시를 내리면서 나는 문득 최경훈과 눈이 마주쳤다.

최경훈이 급하게 좌우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며 ‘검사 더’라고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최경훈의 메시지를 읽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환자분은 검사 끝나고 다시 진료실로 오시죠.”

“아, 네.”

환자가 떠나자 최경훈이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 했다.

“교수님, 아까 초진 환자 루틴 말씀드렸는데요. 심전도, 흉부 엑스레이, 피 검사에 심초음파, 운동 부하 검사, 24시간 감시 심전도 검사까지라고.”

“나도 다 알아.”

“루틴을 안 따르면 나중에 과장님이 한 소리 하실 텐데요.”

“과장님께 욕을 먹어도 저 친구 피를 빨 수는 없단다.”

누가 강태섭이 과장이 아니랄까 봐, 부산 분원 흉부외과의 초진 검사 루틴은 흉악했다.

루틴 검사를 다 실시하면 환자는 무려 30만원 돈을 지불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건 안 봐도 비디오였다.

“기본적인 검사 결과도 안 보고 심초음파니 뭐니 때려 박으면 안 되지. 저 나이에 심각한 질환이 있을 확률도 지극히 드문데.”

“불이익을 당하실 수 있는데도 교수님은 환자를 생각하시네요.”

“환자를 생각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불이익을 당하진 않을 거란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대로 검사 루틴을 무시한다면 나는 분명 강태섭에게 찍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은 이미 다 세워 놓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환자들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수익을 내는 방법.

동시에 강태섭을 과장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는 꿩 먹고 알 먹는 방법 말이다.

“그런 방법이 정말 있을까요?”

“물론이지. 기대하렴.”

대략 40분이 지난 후 검사를 마친 환자가 진료실로 돌아왔다.

당연하게도 흉부 엑스레이, 피 검사, 심전도 모두 정상이었다.

“검사 결과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현재로서 환자분에게 특별한 심장 질환은 없어 보입니다.”

“그럼 저는 왜 이렇게 힘든 거죠?”

환자가 따지듯이 물었다.

마치 정상으로 나온 검사 결과가 비정상이라는 것처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정신적인 문제가 가장 의심됩니다. 혹시 최근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지 않았나요?”

“취업이 잘 안 돼서…… 심적으로 많이 괴롭기는 해요.”

환자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강하게 받다 보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돼서 흉통, 호흡 곤란이 일어날 수 있다.

공황 장애 또한 증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나는 환자에게 전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심장보다는 심리적인 문제가 더 컸던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료실을 떠나는 환자의 뒷모습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음의 병은 우습게 볼 것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환자가 심리적인 고통에 휩싸였을 때.

환자의 뇌에서는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즉 뇌는 심리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저 환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환자의 주머니 사정을 덜어 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만족했다.

“교수님, 다음 환자가 만만치 않은데요?”

“왜?”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나는 최경훈이 띄운 차트를 유심히 살폈다.

환자의 이름은 손대범.

나이는 60세로 두 달 전 혈관 조영술을 통해 관상 동맥 협착증 진단을 받았다.

특이한 이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흉부외과 환자였다.

‘드디어 첫 수술 환자를 받는 건가?’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차트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크롤이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미간.

환자는 본래 내게 깐족거리던 이시형 교수가 담당하는 외래 환자였다.

그런데 이시형은 웬일인지 환자를 입원시키지도, 수술 시키지도 않았다.

2주 전을 기준으로 환자의 외래 진료까지 뚝 끊어 버렸다.

이시형과 환자가 심하게 다투기라도 한 걸까.

호기심과 의문이 짙어질 무렵, 나는 결정적인 문구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환자가 일반 수술 거부. 무수혈 수술 요청했으나 거절.]

한마디로 환자는 무수혈 수술을 원했다.

반면 이시형은 무수혈 수술이 부담스러워서 수술을 거부했던 것이고.

“이 환자, 교수님께도 무수혈 수술을 해 달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 골치 아프게 됐네.”

수술을 하면 결국 내가 할 텐데 어째 최경훈이 나보다 더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귀여운 녀석이란 말이지.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외과의 입장에서 무수혈 수술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피부를 째고 혈관을 꿰매고 장기를 다루다 보면 출혈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런 상황에서 수혈을 할 수 없다면 팔다리가 묶이게 된다.

물론 수술의 위험성 때문에 보통 각서를 미리 받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짐을 완전히 덜 수는 없었다.

수술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하는 것이었으니까.

수술 중 환자가 죽으면 그 데미지는 고스란히 외과의에게 남는다.

‘그러고 보니…….’

전생을 찬찬히 돌아보던 나는 과거 무수혈 수술을 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환자가 수술을 원했으나 내가 거부한 것은 아니었고 나를 찾은 그 종교인이 없었을 따름이었다.

“지금은 환자 한 명 한 명이 중요한 시점인데 왠지 이상한 환자가 꼬였네요.”

최경훈이 한탄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교수님, 이 환자 수술하실 건가요?”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진료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깐깐한 외모의 노인이 앞장섰고 두 딸이 그 뒤를 따랐다. 진료 의자에 앉은 노인은 다짜고짜 자기 할 말부터 꺼냈다.

“의사 양반, 수혈 없이 나 수술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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