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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34화 (234/257)

234화 제2장 출국(4)

욱신거리는 허리 통증에 윤정희는 잠에서 깼다.

보호자를 위한 간이침대는 잠을 잘 만한 곳이 아니었다.

너무 단단해서 등허리가 배겼고 너무 좁아서 몸을 옆으로 뉘일 수도 없었다.

잠버릇이 고약했던 윤정희는 몇 번 간이침대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다.

‘뭐, 이게 다 내 팔자지.’

윤정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병실은 대체적으로 고요한 편이었다. 건너편에 있는 환자가 코를 골았지만 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창가 너머의 하늘은 아직 깜깜했다. 천장에서는 수면등의 불빛이 은은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변을 인식하고 윤정희는 손등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방금 전까지 악몽을 꾸고 있었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사정없이 쫓기는 꿈이었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윤정희는 꿈속 희망이의 손을 꼭 붙잡고 냅다 뛰었다.

의식을 차린 지금 윤정희는 자신을 쫓아온 것이 돈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가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중증 다운 증후군을 앓는 아들과 살아가는 내내 윤정희는 빈곤에 시달렸다.

희망이가 여섯 살 때 남편이 공사장에서 추락해 사망한 이후로는 형편이 더 곤두박질쳤다.

마음 같아서야 24시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싶었지만 사정상 그럴 수도 없었다.

희망이를 봐 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친정 부모님은 아직 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시댁 식구들과도 연이 끊어졌다.

시댁 식구들은 희망이가 태어난 이후 윤정희를 멀리했다.

희망이가 다운 증후군을 앓는 게 마친 윤정희의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윤정희는 살금살금 병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정수기 물을 마셨다.

이 물은 병원에서 마시는 마지막 물이 될 것이다.

오늘은 희망이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윤정희는 퇴원 소식이 그리 달갑지 만은 않았다.

당장 병원 밖으로 나가서 부딪쳐야 하는 세상이 두려웠다.

적어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희망이는 세상의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았다.

환자였으므로 오히려 환자다운 대접을 받았다.

윤정희도 사정은 비슷했다.

식당 사장들의 폭언을 듣지 않아도 됐고 손님들의 진상을 견디지 않아도 됐다.

희망이가 수술받았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윤정희에게 병원 생활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네가 흔들리면 희망이는 어떻게 하고?’

윤정희는 스스로를 따끔하게 꾸짖고서 병실로 돌아왔다.

보호자용 간이 침대 다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보호자분, 혹시 통장 좀 복사해 주실 수 있나요?

천장 위로 잘생긴 주치의 이믿음이 떠올랐다. 이믿음은 나흘 전 찾아와 통장 복사본을 요청했다.

- 복사본은 왜요?

- 희망이 이름으로 후원 계좌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후원 단체에 연락은 해 놨고요, 보호자께서 허락만 하면 후원이 시작될 겁니다.

- 오늘 오후에 복사해서 드릴게요.

윤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었다.

후원 같은 거 의미 없다고.

괜히 번거로운 일을 벌이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희망이를 위해 뭐라도 해 주고 싶은 이믿음의 마음이 고마워서.

‘인간이란 참 간사하단 말이지.’

윤정희는 고개를 저어가며 잡념을 떨쳤다.

퇴원할 때쯤 돼서 돈이 급하니 내심 후원금을 기대하는 자신의 속물 근성이 부끄러웠다.

윤정희는 희망이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 * *

세상에 기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심지어 그 기적이 자신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윤정희는 머리털 나고 오늘에서야 처음 깨달았다.

퇴원을 위해 얼마 되지도 않던 짐을 꾸리던 때였다.

이믿음이 병실로 들어왔다.

이믿음의 손에는 커다란 레고 장난감 박스가 들려 있었다.

“퇴원 선물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고 선생님, 뭐 이런 것까지 챙겨 주시고.”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이믿음이 내민 장남감 박스를 받고 희망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들내미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윤정희는 기뻐하는 희망이 때문에 울컥했고.

저런 장난감 하나 사 주지 못해 아들을 웃게 만들지 못한 자신 때문에 한 번 더 울컥했다.

“희망아, 선생님한테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지.”

윤정희는 장난감 박스만 만지는 희망이를 점잖게 혼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 희망이 앞으로 어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네.”

희망이의 대답은 여전히 성의가 없었다. 녀석의 관심은 온통 장난감 박스에만 팔려 있었다.

“제가 희망이 선물만 챙겨 와서 섭섭하시죠?”

이믿음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희망이 선물이 제 선물이기도 한걸요.”

“사실 보호자분 선물도 챙겨 오긴 했습니다. 희망이는 제가 보고 있을 테니까 통장 한번 확인하고 오실래요?”

“통장을요?”

“네.”

이믿음의 눈빛에 떠밀려 윤정희는 간호사가 근무하는 스테이션 쪽으로 이동했다.

스테이션 근처에 ATM 기계가 있었다.

지이이잉.

통장이 삽입되면서 액정에 떠오른 잔고.

잔고를 확인한 순간 윤정희의 두 눈은 야밤의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졌다.

단돈 50만원이 있어야 할 통장에 무려 8천만 원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윤정희는 눈을 비비고 다시 액정을 살폈다.

신기루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장에는 분명 8천만 원이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목돈이라서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ATM 기계 앞에서 윤정희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서 있어야 했다.

“서… 선생님,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병실로 복귀한 윤정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믿음에게 물었다.

이믿음은 어떻게 8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후원금을 모집했을까.

“제가 최근에 책을 출판하고 사인회를 열었는데요. 사인을 받으러 온 독자들에게 희망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이 도움을 주시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윤정희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이만한 목돈이라면 희망이와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이 자신과 희망이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윤정희는 끝내 감격의 눈물을 터뜨렸다.

그런 윤정희를 이믿음은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었고.

“선생님, 오늘 받은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게요. 제가 나중에 성공하면 꼭 갚을게요.”

윤정희는 이믿음의 품에서 떨어져 굳은 각오로 말했다.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이믿음이 떠난 후 윤정희도 희망이를 데리고 병원을 나왔다.

정오가 가까운 시각, 중천에 뜻 태양빛이 따사로웠다.

삶의 2막을 시작하기에 딱 어울리는 날씨였다.

지이이잉.

병원 입구를 나서는 찰나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떨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경찰이었다.

- 윤정희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 동거하던 남자 분이 아드님을 폭행하고 도망쳤잖아요? 그분 지금 붙잡혔습니다. 서로 잠깐 와 주시겠어요?

윤정희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통화를 끊었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 * *

흉부외과 병동의 복도 쪽 창가.

나와 황은우는 믹스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오지랖이 너무 넓은 거 아니냐? 환자들 사연까지 일일이 다 신경 쓰다간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걸?”

황은우가 한마디 훈수를 두었다.

황은우는 내가 희망이 모자에게 했던 후원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뉴스 기사도 봤는데 너를 안 좋게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

“진짜요? 뭐라고 하는데요?”

“사인회를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사람도 있고. 희망이가 네 친척이나 지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순 없잖아요. 그러려니 해야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믹스 커피를 홀짝거렸다.

저번 주 토요일.

대형 서점에서 개최한 에세이의 사인회에서 나는 희망이의 사연을 알리는 유입물을 돌렸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홍보 수단이었다.

세상에는 후원이 필요한 많은 약자와 환자들이 있었으므로 후원 역시 어떻게 보면 경쟁 체제였다.

내가 보기엔 그 경쟁에서마저 희망이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손 놓고 후원만 기다렸다간 단돈 20만 원도 얻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가 소매를 걷고 나섰다.

사인회를 찾은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희망이의 후원 모금은 하루가 다르게 껑충 뛰어올랐다.

그 금액 중에는 내가 지원한 천만 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출판 선인세로 받은 돈에 내가 모아온 돈의 일부를 보탠 금액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욕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 거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

“힘이 닿는 데까지는… 그래야겠죠?”

“네 마음이 기특하고 예쁜 건 아는데 그것도 넓게 보면 오지랖이라니까?”

황은우가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에게 공감을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환자에게 지나치게 공감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세상에는 불행하고 힘든 사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너 혼자가 그 사람들을 다 끌어안을 순 없다고.”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순 없잖아요?”

“모른 척해야지. 수술로 환자를 보듬는 걸로 외과의의 역할은 끝난 거야. 그 뒤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어.”

황은우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복부 대동맥 파열 수술을 진행한 사람치고는 의외로 매정한 발언이네요?”

“그거랑은 궤가 다르니까. 하여간 너도 이런 쪽으로 철 좀 들어라. 지켜보는 내가 다 불안하다.”

황은우는 내가 사인회에서 희망이 후원을 홍보한 일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괜히 욕먹을 짓을 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언론에 물어뜯기지도 않았을 테고 에세이 판매량도 증가했을 것이라며.

황은우의 말이 맞는 건지 몰랐다.

나는 정말 철이 없는 건지 몰랐다.

수술 후 환자의 삶까지 챙길 정도로 여유와 형편이 되는 의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희망이를 돕 듯 다른 환자들을 돕는다면 나는 견디기 힘들만큼 피곤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멘토 양 교수의 말을 믿었다.

[진심으로 타인의 건강과 행복을 빌 때야말로 의사가 성장하는 법이란다.]

양 교수의 말이 옳다고 나는 생각했다.

의사의 휴식기라고 하는 군의관 시절.

나는 흉부외과의 인식 개선, 동료들의 처우 개선 등을 바라는 마음으로 에세이를 집필했다.

메스 대신 펜을 쥐는 일은 힘들었지만 극복했고 결국 에세이는 세상에 나와 빛을 보았다.

나만 생각했다면 에세이는 애초에 출간조차 되지 않았으리라.

타인의 건강과 회복을 바라는 마음 덕분에 나는 역설적으로 타인이 해내지 못한 성취를 거둔 셈이랄까.

“선배, 저는 고생해도 고생한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을래요.”

“이름값 하네. 누가 이믿음 아니랄까 봐.”

황은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잡담을 나누는데 가운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받았다.

- 이믿음 선생님 휴대폰 맞으시죠? 통화 괜찮으세요?

“네, 그런데 누구시죠?”

- 여기 원무과인데요. 해외 연수 수속 다 끝났거든요. 오셔서 서류 받아 가시면 될 것 같아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제임스 홉킨스 병원이 나를 부르고 있구나.

나는 통화를 끊고 원무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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