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제3장 전생과의 차이점(5)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것도 잔불이 아니라 거대한 산불이었다.
폐색전증 진단을 위해 동맥혈 채혈 검사를 하고 이동식 CT로 폐를 촬영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백경민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늘도 무시하시지, 어찌 이런 가혹한 시련을 내려 주신단 말인가.
하필이면 또 신수술을 참관할 때 말이다.
띠리리링~
얼어붙은 수술방 분위기를 한 통의 전화가 깨트렸다.
“제가 받겠습니…….”
“됐어, 내가 받을게.”
발신자를 알았기에 백경민은 통화를 자처했다. 예상했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민아,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냐.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 거 아니었니? 왜 갑자기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
과장 이동철이 영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답답한 사람은 백경민인데 말이다.
“환자 바이탈이 급속하게 악화되었습니다. 약물로 어찌저찌 버티고 있는데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왜!”
이동철의 목소리는 이제 답답함을 넘어 짜증의 단계로 들어섰다.
“수술상에 문제는 없어서 인공 심폐기와 항응고제 사용으로 인한 폐색전증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허…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경우를 봤나.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려도 유분수지.”
이동철이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참관하러 온 교수들 앞에서 날 망신 줄 생각은 아니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해. 알았지?
“네. 과장님.”
백경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통화를 끊었다.
환자는 죽고.
신수술은 실패하고.
과장까지 망신을 당하는 최악의 그림이 문득 상상이 되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찾아올 자괴감을 견딜 수 있을까.
백경민은 닥쳐올 재앙을 감당할 자신감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잠시 후 기다리고 기다리던 검사 결과가 나왔다.
폐CT 촬영 결과 환자의 폐동맥에 하얀 점 같은 것이 발견되었다.
공기가 단단하게 뭉친 색전이었다.
저 얄궂은 놈이 환자의 혈관을 막아서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ABGA 검사에서도 결과가 비슷했다.
색전증을 의심할 수 있는 d-dimer 수치가 평균을 훌쩍 넘어 있었다.
이믿음의 판단대로 환자는 폐색전증이 맞았다.
“하…….”
가슴 깊은 곳에서 시작된 탄식이 입 밖으로 나왔다.
솔직히 백경민은 이믿음의 판단이 틀리기를, 환자가 폐색전증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폐색전증이 아니라면 본인의 영역 안에서 환자를 커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자는 빼도 박도 못하는 폐색전증이었다.
심장 파트 전문인 백경민이 폐 수술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선생님, 스케줄표 확인하고 박 교수님께도 연락을 드려 봤습니다만…….”
구원 투수를 부르러 갔던 레지던트가 수술방으로 돌아왔다.
백경민의 눈치를 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수술 중이라서 당장 도와주실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적어도 1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고.”
레지던트의 말은 최후의 도끼질이 되었다.
쩌저적.
백경민은 마음속 깊이 품었던 희망의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환자가 폐색전증인데, 폐색전증을 수술할 수 있는 서전이 없다?
그럼 말 다 한 것 아닌가.
백경민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절망뿐이었다.
“형, 이 환자 내가 수술할게.”
“…….”
“형, 이 환자 내가 수술한다고.”
곁에 서 있던 이믿음이 거듭 되풀이하는 말을 듣고 백경민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 본인이 하는 말의 뜻을 알고나 하는 건가.
“네가 무슨 수로 폐색전증 수술을 해? 폐·식도 파트 팔로우 과정을 마쳐야 간신히 할 수 있는 수술을.”
“할 수 있어. 난 천재야.”
이믿음이 간략하게 근거를 댔다.
본인이 천재라서 의대 시절 폐·식도 파트의 대가인 양순재 교수에게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수료했다는 것이다.
물론 정식 수료는 아니었지만.
백경민도 이믿음이 천재라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끼진 않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믿음과 함께 수술을 해 보면 알 것이다.
이믿음이 얼마나 비범한 서전인지.
그렇다고 야매 폐·식도 펠로우에게 수술을 맡길 수는 없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집도의인 형이 결정해야 해. 나를 집도의로 세울지 말지를.”
이믿음의 재촉에 백경민은 즉답을 내렸다.
“안 돼.”
“환자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태극 병원 폐·식도 전문의가 오는 데 1시간이 걸린다잖아. 환자는 그때까지 못 버텨!”
수술 내내 고요하던 이믿음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격분에 휩싸였다.
“날 못 믿는 거지?”
“아니, 넌 믿어. 너를 믿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럼 안 되는 이유가 뭔데?”
“네가 욕먹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백경민은 힘겹게 말을 계속했다.
백경민이 두려워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만약 이믿음이 폐색전증 수술에 실패하고 환자가 죽는다면 말이다.
비난의 화살은 전부 이믿음에게 돌아갈 것이다.
-거, 젊은 사람이라서 그런가? 참을성도 지지리 없지. 폐식도 전문의가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해도 됐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약물만 잘 쓰면 괜찮았을 건데.
-저 친구는 자기 전공도 아닌데 왜 나대서 환자를 죽입니까?
참관용 수술실에서 떠돌 말들이 백경민의 귀에는 벌써부터 들리는 듯했다.
수술을 도와주러 온 이믿음이 자기 대신 상처받을 것이 백경민은 미치도록 두려웠다.
그래서 그 끔찍한 사태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었다.
“욕은 두렵지 않아. 예전에 배가 터지도록 먹어 봤으니까.”
“네가 욕을 먹었다고? 세상에 별일도 다 있네?”
“맞아, 별일이 다 있었지. 형은 상상도 못할.”
이믿음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형, 외과의는 환자를 책임지기 위해 수술방에 있는 거야. 그 책임을 회피해선 안 돼.”
“책임을 질 수 없는 일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건 문제겠지. 그건 미련한 거야.”
백경민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믿음이 불덩이로 뛰어드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수술을 못할 깜냥이었으면 애초에 나서지도 않았어. 제발, 내가 싸울 수 있게 기회를 줘. 형이.”
이믿음의 간절한 눈빛에 백경민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이믿음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후우~ 이젠 나도 모르겠다. 네가 어시스트를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극구 말렸어야 하는데.”
“…….”
“어쨌든 뒷감당할 준비는 되어 있다는 거지?”
“물론.”
백경민은 그 즉시 수술방 입구에 있는 내선 전화기로 향했다.
참관용 수술실로 전화를 걸자 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니?
“제1 어시스트가 응급으로 폐색전증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백경민, 너 미쳤어? 제정신이야? 폐색전증 수술이 소꿉놀이인 줄 알…….
뚝!
백경민이 중간에 통화를 끊었다.
과장이 다시 연락을 못하도록 수화기를 제자리에 두지도 않았다.
백경민은 이미 이믿음이라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호랑이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 * *
심장 수술을 할 때와 달리 긴장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은사인 양 교수님 밑에서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밟고 카데바로 다양한 임상을 경험했다.
하지만 환자에게 집도하는 것은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겪는 상황이 주는 압박감은 나조차 피할 수 없었다.
손목으로 원을 그리고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나는 잠깐 사이 굳어 버린 손의 감각을 깨웠다.
“일을 저지르고 나니까 속은 후련하디?”
“무척. 매우. 몹시.”
“못 말린다. 이믿음, 너는 진짜. 기왕 이렇게 된 거 밥이 되든 죽이 되든 우리끼리 환자를 살려 보자고.”
말을 마친 백경민이 제1 어시스트로 자리에 섰다.
나는 백경민의 맞은편인 집도의 자리에 섰다.
본래 폐색전증을 수술할 때는 인공 심폐기의 도움을 받는다.
수술 도중 출혈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심폐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색전증의 원인이 인공 심폐기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내 결정에 백경민은 토를 달지 않았는데, 내 뜻을 존중한다기보다는 폐색전증 수술에 대해서 잘 몰라서 수긍하는 듯했다.
「회귀를 경험한 너는 그 자체로 기적이야. 네가 기적이라면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네가 긴 시간 동안 쌓아 올린 실력을 이 자리에서 남김없이 보여 줘.」
가슴 깊은 곳에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응원하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흩어졌던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이이이잉.
갑자기 귓속에서 이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괴롭고 고통스러운 이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이명이었다.
이윽고 백색의 이명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처치들이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 길을 따라만 가도 수술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나는 내 직감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걷기 시작했다.
“폐색전증은 우폐동맥에 있습니다. 우선 우폐동맥에 시야를 가리는 대동맥과 상대정맥의 시야부터 정리할 겁니다.”
차분하게 오더를 내리고 나는 스태프들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폐 수술은 처음인 백경민이 끙끙대며 혈관들을 견인하고 박리해 나갔다.
심장 수술을 하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처음치고는 솜씨가 퍽 훌륭했다.
장장 20여 분에 걸친 대장정 끝에 모습을 드러낸 우폐동맥이 반가웠다.
달칵!
달칵!
색전이 박혀 있는 동맥의 위아래를 나는 헤모스탯(혈관 겸자)으로 잠가놓았다.
수술 도중 혈류가 혈관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10번 블레이드.”
나는 폐동맥을 조심스럽게 세로로 갈랐다.
힘 조절이 중요한 첫 단계.
잘못했다간 혈관의 앞뒷면이 다 잘려 나가는 재앙이 벌어질 수 있었다.
스으으윽.
손놀림이 매끄러웠던 만큼 절단면도 매끄러웠다.
절단된 폐동맥에서는 울컥하고 붉은 피가 토해졌다.
치이이익.
백경민의 썩션과 지혈로 다시 시야를 확보한 나는 색전을 찾아 방황했다.
광학안경의 배율을 높이고 눈이 빠져라 혈관을 살피다 보니 원수 같은 색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붉은빛을 띤 알갱이.
이것이 떡하니 혈관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색전이 폐동맥을 폐쇄해 버렸으니 혈류 순환이 제대로 될 리가…….
“드바키 포셉.”
나는 포셉의 끝으로 색전을 살살 굴려 가며 색전을 제거해 냈다.
원수를 처단했지만 할 일은 남아 있었다.
나는 손에 쥔 드바키 포셉으로 문제의 폐동맥 내막층을 떼어 냈다.
두꺼워진 내막층을 제거해야만 다음에도 같은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았다.
수술을 진행하는 동안 이명은 계속되었다. 긴장하고 조급해하는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덕분에 얻은 부동심으로 내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떨림이 없었고 주저도 없었다.
지금의 나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 얇기만큼의 손상도 없이 내막층을 박리한 나는 갈라놓은 폐동맥을 봉합해 나갔다.
폐색전증 수술의 마침표를 찍는 단계.
“6-0 prolene.”
니들홀더를 쥔 왼손과 포셉을 쥔 오른손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정교하게 움직였다.
혈관에 한 땀 한 땀 튼튼한 매듭이 지어져 갔다.
총 15개의 매듭을 나는 단 5분 만에 완성했다.
완성도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만족했다면 세상 그 어떤 외과의라도 만족할 수준이니까.
위이이잉.
수호신 같았던 이명이 꺼지면서 구름 위를 떠다니는 듯한 몽롱한 감각도 사라졌다.
달칵! 달칵!
폐동맥을 잠그고 있던 혈관 겸자를 풀면서 나는 확신했다.
생에 첫 폐색전증 수술은 대성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