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00화 (200/257)

200화 제5장 발전(5)

지대장실.

이름만 들으면 퍽 거창해 보이지만 내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오래 누우면 허리가 아픈 딱딱한 원목 침대에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공간이었다.

GOP 대대의 지대장실은 특히 더 좁고 볼품이 없는데, 여기에 비하면 고시원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지대장실에서 깨어난 나는 평소처럼 세면하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병사들이 챙겨 온 군대리아로 끼니를 해결하고 책상에 앉았다.

딸칵, 딸칵.

전입할 때 챙겨 온 노트북으로 메일을 확인하니 백경민이 보낸 자료가 눈에 띄었다.

‘어지간히 열 받았나 본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메일을 보낸 시간이 밤 11시 30분이었다.

그러니까 백경민은 국밥집에서 나와 언쟁을 벌인 후 병원에 돌아가 곧바로 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나는 씩씩거리며 메일을 보냈을 백경민을 떠올렸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형, 오해는 하지 말라고. 이게 다 형을 위한 거니까. 나중에는 나한테 넙죽 엎드려 절하고 싶어질 때가 올 거야.

마우스 휠을 내리며 나는 꼼꼼하게 자료를 살폈다.

-3D 프린터를 이용한 환자 맞춤형 인공 판막 제작술.

확실히 혁신적인 수술이긴 했다.

3D 프린터를 외과 수술에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시기는 2010년 후반이다.

그런데 백경민은 2010년대 초반인 현시점에서 3D 프린터를 사용할 발상을 했다.

시대를 한참 앞서간 선구자였던 것이다.

문제는 선구자들의 최후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있었다.

타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다 보니 타인에게 공감을 살 수도, 이해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상하네? 뭐가 문제지?’

자료를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연구 자료에 허점은 없었다.

3D 프린터로 인공 판막을 만들어 내는 건 의공학자나 의료 업체의 영역이었다.

외과의는 완성된 인공 판막으로 기존의 노쇠한 판막을 대체해 주면 끝이었다.

백경민의 수술은 엄밀히 말하면 ‘수술’보다 ‘기술’이 중요하다고 해야 할까.

수술이야 기존 수술법을 따르니 흠잡을 곳이 없었고.

3D 프린터에 적용되는 기술에서 또한 큰 허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실패하기 힘든 수술의 실패.

나는 이 난제를 풀기 위해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봤다.

첫째, 3D 프린터로 제작한 인공 판막이 불완전했다. 연습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하필이면 참관 수술을 할 당시 기계에 미세한 오류가 존재했다.

둘째, 수술 도중 환자에게 급성 출혈이나 심장마비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응급 상황이 찾아왔다. 거기에 백경민이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범위는 크게 이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었다.

다만 이 둘 중에서 나는 전자에 더 큰 혐의를 두었다.

총상 환자를 함께 수술하면서 확인한 백경민은 유능한 흉부외과의였다.

그런 백경민이 OPCAB 같은 고난이도 수술도 아니고 판막 수술 도중 환자를 잃는다?

내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기술적인 문제가 먼저 발생하고 백경민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허둥지둥하다가 응급 상황이 터지면서 수술이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주어진 정보로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시나리오로 짜 봤다.

시나리오는 제법 탄탄했다.

이쯤 되면 허구의 시나리오가 아닌 예지 수준으로 봐도 좋을 정도로.

지이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백경민이 전화를 걸었다.

-야, 자료 봤지? 어때? 이 정도면 혁신 아니냐? 혁신?

백경민은 인사도 생략할 만큼 내 평가에 목말라 있었다.

신수술을 꽁꽁 감추고 있다가 내게 처음 보여 줘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이런 백경민이 전생에서 수술에 실패했을 때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었을까.

그 기분은 내가 강태섭에게 신수술을 도둑맞았을 때 못지않았을 것이다.

“형, 자료 잘 뽑았던데? 조금만 더 다듬으면 될 것 같아.”

-그치, 니가 보는 눈이 좀 있네. 3D 프린터 하는 업체랑 의공학 업체 쪽만 잘 연결하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라고 봐야지.

백경민은 한참 동안 흥분해서 떠들었다.

내 귀가 더워질 정도로.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던 나는 대화 말미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부터가 내 본론이었다.

“형, 중간중간에 수술 진행 상황 나한테 말해 줄 수 있어?”

-그건 왜?

백경민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가시가 돋쳤다.

필시 내가 수술을 빼돌리려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거겠지.

“혼자서 다 진행하다 보면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잖아. 옆에서 검수하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어?”

-뭐, 맞는 말이긴 한데… 좀 꺼림칙하다?

“형, 나 못 믿어?”

-물론 오빠보다는 믿을 만하겠지만 그래도 일일이 보고하는 건 거부감이 드네.

“…….”

-네가 좋은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그랬다가 수술이 통째로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니까.

정보 공유를 망설이는 백경민을 나는 전혀 답답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이게 정상적인 태도였다.

강태섭에게 수술을 통째로 갖다 바친 전생의 내가 바보 천치였고.

그렇다면 백경민이 안심하도록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볼까.

“그럼 형, 이건 어때? 수술을 완성하면 학계에 논문 게재하고 참관 수술할 거잖아.”

-당연히 그래야겠지?

“참관 수술하기 일주일 전에 나한테 연락해 주면 안 돼? 그 정도면 괜찮지?”

-그 정도면 나도 오케이지.

지금까지와 달리 백경민의 대답이 호쾌했다.

나도 협상으로 얻어 낸 결과에 만족했고.

수술 일주일 전이라면 내가 개입해서 전생의 비극을 되돌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백경민과 통화를 끊은 나는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댔다.

남은 건 기다림뿐이었다.

* * *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나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어제 외진 이후 생긴 새로운 숙제를 해결하는 중이었다.

바로 에세이 작업이었다.

아버지의 에세이를 읽고서 나는 잘 쓴 글이 사람에게 끼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잘 쓴 흉부외과 에세이 또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에세이를 본 사람들이 흉부외과의 열악한 환경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하고.

또 누군가는 흉부외과의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욕심으로 나는 에세이를 적고 있었다.

하지만 원대한 욕심과 달리 모니터에 떠오르는 글은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한 페이지를 쓰고 읽어 보니 단순히 하루 일과를 나열한 느낌이 강했다.

내 글은 딱딱했으며 재미나 감동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마치 주기율표를 건조하게 나열해 놓은 것처럼.

커서는 깜빡거리며 다음 단어와 문장을 재촉하는데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외과 수술을 할 때만 해도 화려했던 손목과 손가락조차 키보드 자판 위에만 올라가면 새색시마냥 수줍기만 했다.

문학가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절반은 물려받은 나인데 내 글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대략 2시간 정도 작업해서 나는 겨우 A4용지 한쪽 분량의 에세이를 완성했다.

에세이의 퀄리티에 대해서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굳이 의의를 찾자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똑. 똑. 똑.

“지대장님, 진수입니다.”

때마침 들리는 노크 소리, 나는 시원하게 노트북을 덮어 버리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이 빼꼼 열리고 강진수 일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는 떡볶이라고 불리는 활동복 상의를 입은 병사가 수줍게 서 있었다.

“진료 보게? 치료실로 가자.”

나는 지대장실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치료실로 이동했다.

치료실은 지대장실 만큼이나 단출했다.

각종 약들이 놓여 있는 약장.

드레싱 도구가 놓여 있는 드레싱 카트.

환자가 누울 수 있는 침상 한 개.

그 밖에 붕대나 거즈 등의 소모품을 보관할 수 있는 보관함 등등.

나는 두 개뿐인 진료용 의자 중 하나에 앉았고, 맞은편에 병사가 앉았다.

전투모를 보니 병사는 상병이었다.

주황색 활동복 왼쪽 가슴에는 양정훈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디가 불편해서 왔니?”

“왼쪽 발톱이 부었습니다. 걸을 때마다 시큰거려서 아픕니다.”

“전투화랑 양말 벗어 봐.”

전투화와 양말을 벗은 양정훈의 발을 확인하고 나는 쯧쯧 혀를 찼다.

양정훈의 말대로 발톱 양쪽 끝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해당 부위를 지그시 누르자 양정훈이 개구리처럼 팔짝 뛰며 고통을 호소했다.

“으으으으!”

“너 내성 발톱인 거 알고 있지?”

“네, 전에는 손으로 잘 뜯어냈는데 이번에는 그게 잘 안 돼서…….”

“잡아 뜯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근데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의무대에 안 왔어?”

“그게… 참을 만해서…….”

양정훈이 내 시선을 회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양정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양정훈은 결코 참을 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로 발가락이 부은 상태에서 전투화를 신은 채 작업을 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걷기만 해도 칼이 발톱을 찔러 대는 것만큼 아팠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양정훈은 군의관인 나를 불신하는 게 분명했다.

네가 나한테 뭘 해 주겠어?

설령 해 준다고 한들 그게 제대로 된 처치겠어?

분명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깔고 있지 않을까.

병사들에게 군의관이란 생에 처음 만나는 돌팔이 의사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래도 발톱 양 끝을 잘라야겠다. 진수야, 리도카인(국소 마취제) 재어 놓고 수쳐(suture, 봉합) 세트 챙겨 놓을래?”

“네, 지대장님.”

“저… 저… 수술받는 겁니까?”

잘라 낸다는 이야기에 겁을 먹었는지 양정훈이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사실 수술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지. 마취할 거니까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 거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아.”

“저 그냥 약이나 바르는 연고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나는 방긋 웃으며 양정훈의 부탁을 거절했다.

이럴 때는 군의관도 의외로 편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처치를 환자가 받게 할 수 있으니까.

반대로 병원에서는 내가 아무리 처치를 하려고 해도 환자가 거부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으아아악!”

내가 양정훈의 발톱을 다시 한번 누르자 양정훈이 자지러졌다.

새디스트 기질이 있는 건 아니었고, 일종의 충격 요법이었다.

“지대장님 너무 아픕니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이렇게 아픈데 약하고 연고만으로 나을 것 같니?”

“…….”

“그리고 내성 발톱 수술받으면 작업은 무조건 열외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걸?”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희 부소대장님이 워낙 FM이라서 말입니다.”

양정훈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부소대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소대장은 자신의 발톱이 부었음에도 활동화를 신지 못하게 했다.

그깟 발톱 부은 걸로 왜 그렇게 엄살을 떠냐고 핀잔을 주었다고도 말했다.

듣다 보니 울화통이 터졌다.

부대원이 아프면 안 아프게 해 줄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부사관의 역할 아닌가.

그런데 병사를 오히려 꾀병 환자 취급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보통 이런 인간들은 자기 손가락이 살짝만 베어도 큰 병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 마련인데…….

“내가 너희 부소대장한테 직접 이야기할 테니까 걱정 말고.”

양정훈을 안심시키는 사이 내성 발톱 제거 수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수술 장갑을 착용하고 양정훈의 왼쪽 발톱 양쪽을 마취시킨 후 잠시 대기했다.

“어때? 지금도 아파?”

포셉으로 양정훈의 발톱을 누르자 양정훈이 감촉만 있다고 했다.

마취는 잘된 모양이었다.

그럼 슬슬 땅바닥에 떨어진 군의관의 신뢰를 끌어 올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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