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제5장 한번 붙어 보자(3)
내내 앓던 이를 빼낸 것처럼 통쾌했다.
내게 성희롱을 유도하고 나와 1년 차 사이를 이간질하던 손태호에게 마침내 본때를 보여 주었다.
손태호가 급하게 찾아온 것을 보면 손태호와 이민호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뒤틀린 게 분명했다.
깨소금 맛이었다.
근데 둘 사이를 갈라놓은 게 무슨 큰 의미가 있어?
단순하게 친구 한 명과 손절한 것뿐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이민호는 손태호가 없어도 상관없지만 손태호는 이민호가 없으면 안 됐다.
손태호는 이민호의 비위를 맞추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동기와 선후배 중 손태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민호의 후광이 없는 손태호에게 병원이란 무인도와 다름없었다.
더불어 그토록 바라 왔던 성형외과 레지던트에 합격하는 일.
훗날 이민호가 개원하는 성형외과에서 돈을 쓸어 모으겠다는 야무진 계획.
이 두 개의 꿈마저 오늘로써 산산조각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일 중요한 게 남았구나.’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던 나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손태호를 물리쳤음에도 그 쾌감을 오래도록 음미할 수는 없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수술 걱정 때문이었다.
손태호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과장의 관상동맥 우회술에서 환자가 테이블 데스 한다는 비극을.
믿음아, 기억 속 서랍을 뒤져 보자.
CABG 도중에 환자를 위태롭게 할 위험 요소가 무엇 무엇이 있는지를.
지이이잉.
천장에서 분사되는 소독 가스를 맞으며 나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환자는 이미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병동 보호사가 환자를 이동시킨 것 같았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환한 무영등 불빛 아래.
환자의 피부는 유독 하얗고 차갑게 보였다.
핏기가 가셔 비현실적인 그 모습이 마치 환자에게 닥쳐올 불행을 암시하는 것 같아 불길했다.
“유정해 환자분 맞으세요?”
“네.”
“관상동맥 우회술 받는 환자분 맞으시죠?”
“네.”
“수술 시작까지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릴 겁니다. 긴장되실 텐데 크게 심호흡하세요. 뱉는 숨을 조금 더 길게 하시면 좋아요.”
나는 환자에게 심호흡해야 하는 이유를 추가로 덧붙였다.
심호흡이 심신을 안정시켜 준다는 것은 쓸데없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과학적인 근거가 뒷받침되는 말이었다.
특히 뱉는 호흡이 길면 부교감 신경을 항진시켜 혈압과 심박을 떨어트릴 수 있었다.
수술 환자를 확인하는 타임아웃을 실시한 후.
나는 스크럽 간호사와 수술 준비를 했다.
본래부터 탈 인턴이었던 데다가 인턴 생활도 마지막 달에 접어드니 수술 준비는 그야말로 삽시간에 끝났다.
그러나 수술 준비를 하면서 나는 내내 번뇌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 유정해를 테이블 데스로 이끄는지.
그 이유를 막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느라.
“역시 이믿음, 오면 끝내 놨을 줄 알았다.”
“선배 어시스트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나는 고개를 돌리며 수술대로 다가오는 3년 차 허성호에게 화답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허성호 옆에는 눈매가 날카로운 한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신창수.
레지던트 4년 차이자 의국장을 맡고 있는 선배.
전생에서 나와 신창수의 접점은 많지 않았다.
연차 차이가 많이 났고, 펠로우 과정을 마친 뒤에는 지방 분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신창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정치 역학적으로 봤을 때 신창수가 이 과장 라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창수는 이 과장이 본인에게 시킨 논문 정리를 허성호나 황은우에게 종종 떠넘기곤 했다.
레지던트가 된 후에는 나 역시 피해자가 되었고.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을 도구로 보는 못된 가치관을, 신창수는 가지고 있었다.
“이번 수술, 과장님이 집도하시는 거 알지?”
신창수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만약 모른다고 대답했다가는 한 대 칠 것 같은 사나운 기세였다.
“네, 압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시스트 잘해라. 졸다가 걸리면 대가리 깨지는 수가 있어.”
신창수의 살벌한 경고에 나는 잊었던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떠올렸다.
아, 맞다.
신창수는 후배들에게 기합을 주고 폭행까지 가하는 나쁜 놈이었다는 걸.
그러고 보니 언젠가 신창수에게 정강이를 얻어맞아 한동안 병동을 절뚝거리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이 워낙 생생해서 그럴까.
맞지도 않은 정강이가 벌써부터 얼얼한 느낌이었다.
‘손 봐줘야 할 인간이 하나 더 늘었네.’
나는 속으로 분을 시켰다.
전생에서야 어쩔 수 없이 당했다지만 신창수가 이번 생에도 손찌검이나 폭행을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신체적으로 봤을 때나.
의사로서의 솜씨로 봤을 때나 모든 면에서 내가 신창수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었으니까.
“야, 빠릿빠릿하게 대답 안 하냐?”
“알겠습니다.”
“허성호, 이 새끼 일 잘하는 거 맞아?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데?”
“치프, 초반부터 너무 잡으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애초에 질문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눈치가 있으면 대답을 해야지. 너, 꼼짝 말고 대기 해.”
신창수는 특유의 강압적인 태도를 선보이며 환자의 상태 및 처치, 수술 도구의 준비 상태를 살폈다.
‘백날 확인해 봐라, 네 눈만 아프지.’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신창수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신창수의 꼬투리를 잡으면 모를까.
신창수가 어찌 내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까.
나는 회귀한 흉부외과 부교수인 데다가 이번 생에는 심지어 폐·식도 파트의 펠로우급 지식까지 갖췄는데.
“뭐, 눈치는 느려도 일 처리는 나쁘지 않네.”
수술 전 점검을 마친 신창수가 내뱉듯이 한마디 했다.
“제가 오는 내내 이야기했잖아요. 믿음이가 흉부외과의 차세대 에이스가 될 거라고.”
허성호가 당당하게 가슴을 편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치프가 들들 볶으면 믿음이가 다른 과로 갈 수 있다는 거 아시죠?”
“지랄하네. 그럼 나보고 벌써부터 인턴 비위나 맞추라는 거야?”
신창수가 언성을 높이며 허성호를 노려보았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후배에게 패악질 부리는 건 여전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2년 차 황은우가 흉부외과에서 도망쳤던 게 온전히 나 때문은 아니었다.
신창수에게도 50퍼센트의 지분은 있었다.
펠로우가 된 신창수가 황은우에게 논문 폭탄을 떠넘겼으니까.
“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좀 더 소프트하게 다뤄 주시면 좋겠다는 말이죠.”
“웃기지 마. 이 정도도 못 견디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넌 어떻게 생각해, 인턴?”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기계적으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의 내게 신창수는 가소로운 인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 제멋대로 설치고 날뛰고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아 둬.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을 테니까.
“선생님, 마취 시작해 주세요.”
신창수의 부름에 마취의가 수술대로 다가왔다.
드디어 관상동맥 우회술의 막이 열렸다.
* * *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된 지 1시간 30분이 지났다.
그때까지도 이 과장은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았다.
레지던트들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것.
그것이 이 과장의 비열한 수술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장은 분명 협착된 관상동맥과 채취한 혈관을 연결할 때쯤 나타날 것이다.
수술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를 반짝 1시간 정도 처리한 후 다시 사라질 테고.
‘실력 없이 인맥으로만 올라왔으니까 그럴 수밖에……. 이러니까 밑에 사람들이 고생하지.’
나는 속으로 이 과장을 잘근잘근 씹었다.
전생의 나는 잘 몰랐지만 이번 생의 나는 너무나 잘 알았다.
이 과장이 사실상 의국에서 수술을 가장 못하는 외과의라는 것을.
이 과장의 수술은 달팽이처럼 굼떴다.
응급 상황이 생기면 빠르게 대처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처세술의 달인인 이 과장은 놀랍게도 그런 자신의 단점을 아가리로 승화시켰다.
느린 수술 속도는 원체 꼼꼼한 성격 때문이며.
응급 상황에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신중하게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하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포장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사람들은 그 허울뿐인 포장을 굳게 믿었다.
왜냐고?
실제로 이 과장의 수술 성적은 좋은 편에 속했으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과장 수술에 들어가는 어시스트들이 다 의국의 에이스들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은 채.
‘역시 이 과장 때문인가?’
제3보조로 수술을 돕던 나는 이번 CABG 실패의 원인을 이 과장으로 꼽았다.
이 과장 없이 신창수, 허성호, 나, 스크럽 간호사
이렇게 4인이 집도를 하고 있음에도 하등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중 흉골절개술과 수술 시야 확보.
관상동맥에 연결할 내흉동맥을 채취.
심정지액 투입과 인공심폐기 연결 등등.
현재까지 수술은 순조롭기만 했다.
“치프, 과장님은 언제 오신대요?”
“곧 오실 거야.”
신창수와 허성호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물끄러미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수술포가 덮여 있었기에 환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환자의 벌어진 가슴과 박동을 멈춘 심장뿐이었다.
‘어쩌면 수술법 자체가 잘못됐을지도 모르겠어.’
환자의 수술 중 사망 이유를 나는 다른 부분에서 찾아보았다.
유정해 환자는 다른 환자에 비해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등의 합병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체질이 허약한 편이었다.
이 경우 인공 심폐기를 사용하는 관상동맥 우회술보다 무인공 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을 펼치는 편이 더 유리했다.
인공 심폐기를 사용하는 것.
그동안 심장이 멈춰 있는 것.
이 두 가지 자체가 환자의 심장과 신체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작 인턴인 나였다.
이제 와서 수술 방법 바꿀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설령 이제 와서 수술법을 바꾼다고 해도 실력 없는 이 과장이 OPCAB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었다.
냉정하게 이 자리에서 OPCAB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의국을 통틀어도 OPCAB 집도가 가능한 교수는 2명이 채 되지 않을 테고.
어쩔 수 없지.
물이 엎질러졌으면 엎질러진 대로 수습하는 수밖에…….
지이이잉.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드디어 문제적 남자 이 과장이 수술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와 신창수, 허성호, 간호사의 인사를 받으며 거만하게 집도의 자리에 섰다.
덕분에 나는 환자에게서 가장 먼 자리로 밀리고 말았다.
현 상황에서는 오히려 기뻐할 일이었다.
자리가 멀어지면 필연적으로 내가 해야 할 처치가 줄어들고.
그 줄어든 시간에 환자 상태를 관찰하고 생각도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한편 집도의 자리에 선 이 과장이 눈을 빛내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의미를 아는 스태프들은 숨죽인 채 이 과장의 반응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이탈 관리가 잘되어 있고, 채취해 놓은 혈관은 탄력 있고, 훼손된 곳도 없어.”
“…….”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창수 네 실력도 제법 많이 늘었구나.”
“감사합니다, 과장님.”
“다른 스태프들도 고생했어.”
이 과장이 인자한 척 스태프들을 챙겨 주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LAD(좌전하행지)와 LCX(좌선회관상동맥)에 발생한 협착을 막기 위해 관상동맥 우회술을 실시하겠습니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이 과장의 목소리가 내겐 사형선고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