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제5장 40년 만의 귀환(1)
원무과의 전화를 받고 나는 별관 지하 강당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병원 월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병원의 특성상 모든 스태프가 한자리에 모일 수는 없으므로 과별로 회의 인원을 차출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 인원으로 내가 뽑혔던 것이다.
[선생님이 이번 달 우수 인턴 사원이에요. 회의에 꼭 참석하셔야 해요.]
원무과 직원은 내가 기억 상실증이라도 앓고 있는 줄 알았을까.
짧게 통화하는 와중에 회의에 꼭 와야 한다는 말을 서너 번 반복했다.
아마 우수 인턴 사원 표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 흑기사. 오랜만이다?”
낯익은 목소리와 낯익은 별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나의 의대 단짝이자 4차원 정신의 소유자인 신철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굴을 못 본 지는 50일 정도밖에 안 됐을 텐데…….
인턴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실제 시간보다 더 오랜만에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짜식, 진짜 오랜만이다. 잘 살아 있네?”
나는 신철우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초롱이한테 들었어. 첫 번째 달에 신경외과 픽스 박았다면서?”
“나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편단심 뇌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너는 인턴인데도 환타 끼는 여전하더라?”
“…….”
“건너 듣기로는 가는 곳마다 문제가 터진다던데? 최근엔 심장 이송할 때도 그랬다면서?”
신철우의 지적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분하게도 반박할 만한 근거나 예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터진다고 해서 꼭 나쁜 건 아니었다.
이번 심장 이송 사건만 해도 그랬다.
우리 의료진과 KTX역이 긴밀하게 협력해서 심장 이송을 성공적으로 마친 일이 얼마 전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5분의 기적.
1,000명의 배려가 사람을 살린다 등등.
감동 사연과 감동 실화로 많은 사람의 본보기와 귀감이 되었다.
내가 우수 인턴 사원으로 뽑혔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면서.
인간적으로 또는 기술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던 또한 매력이었다.
심장 이송 사건은 지나치게 급박하고 긴장감이 넘쳤던 게 탈이긴 했지만.
“부러운 것 같은데, 내 환타 기운 좀 나눠 줄까? 양은 넉넉해.”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그거까지 받으면 난 죽어.”
나는 신철우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강당으로 이동했다.
듣자 하니 신철우는 나만큼 힘든 인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경외과 역시 흉부외과 못지않은 험지이기 때문이다.
신경외과와 흉부외과.
이 두 과목의 경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수가에 묶여 제대로 된 물질적인 보상도 받지 못하는, 비운의 과였다.
강당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 틈바구니에 섞였다.
삼삼오오 모인 스태프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그러고 보니까 저번 달 우수 인턴 수상을 이민호가 했던가?”
“이민호?”
신철우의 말에 내가 반응을 보였다.
이민호는 의대에 다닐 때부터 내 주의를 확 잡아끄는 이름이었다. 언젠가 내게 불어닥칠 재앙 같아서.
“이민호가 무슨 건수로 우수 인턴 수상을 했어? 기준이 엄청 짠 걸로 아는데?”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벌써 잊었어?”
“그러니까 뭘?”
신철우는 대답 대신 검지로 강당 맨 앞줄에 앉아 중년 남자를 가리켰다.
신철우의 손가락질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대답을 얻었다.
신원대학교 진료 부원장 이강훈.
동시에 이민호의 큰아버지.
병원 3인자의 입김이 작용했다면 우수 인턴 사원을 수상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수련 내내 받는 인턴 성적도 보나 마나 전부 A겠지.
병원 권력의 비호를 받아 엘리트 길을 걷는 이민호가 나는 못마땅했다.
그런 식으로 성장하니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아니겠는가.
의료인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양심마저 거추장스럽다며 벗어던지는 것 아니겠는가.
비록 수련하는 과목은 달라도
언젠가 이민호에게 크게 한 방 먹여야 한다.
이민호에게 희생당해 눈물을 흘리는 환자들이 없도록.
나는 그런 결심을 이 자리에서 굳혔다.
잠시 후 원무과 직원이 월례 회의를 진행했다.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병원 소식 전달 등등.
월례 회의는 익숙하면서도 뻔한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얼마 전 우리 과에서 펼친 심장 이식 수술 또한 다시 한번 언급되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경험했던 사건이 소개되니 기분이 묘했다.
뿌듯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강새롬 선생님, 최태환 선생님, 이믿음 선생님 단상으로 올라와 주세요.”
우수 사원을 표창하는 순서가 되어 나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전생에서는 올라가 본 적이 없는 단상이었다.
전생의 이맘때쯤 나는 심리적 압박감으로 수전증에 시달렸다. 동기들에겐 따돌림을 당하고 후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힘겨웠던 내가 우수 인턴 사원으로 뽑히게 되다니…….
이 순간이 감개무량했지만 나는 그 감정에 취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오직 내가 잘났다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회귀라는 축복을 얻었다.
또한 양순재 교수, 김용 교수, 신철우, 남초롱 등등의 가깝고도 귀한 사람들의 도움도 받았다.
이런 중요한 요소들을 까맣게 잊는다면.
내가 잘났다는 오만함에 빠진다면 결국 나도 이민호와 같은 부류가 되지 않을까.
그런 끔찍한 일 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경계해야 했다.
“이믿음 인턴, 이번 심장 이식 수술에 큰 공헌을 했다고 들었어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사이 이강훈이 어느새 내 앞에 섰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민호가 날카롭고 냉정한 이미지라면 이강훈은 그 반대로 둥글둥글하고 친숙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나는 이강훈처럼 허허실실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더 무섭다는 걸 알았다.
이런 부류는 사람을 안심시켜 놓고 뒤통수를 치기 마련이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수련해서 훌륭한 흉부외과의가 되기를 바랄게요.”
“네, 감사합니다. 진료 부원장님.”
나는 상패를 전달받은 뒤 진료 부원장과 악수를 나눴다.
우수 사원 표창 후 월례 회의는 금방 종료되었다.
나는 묵직한 상패를 받아 들고 병동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막상 아까는 몰랐던, 소름 끼치는 정보가 새삼 나를 놀라게 했다.
이강훈은 내가 흉부외과의가 될 걸 어떻게 알았지?
* * *
병동으로 복귀하는 도중 이강훈을 향한 의혹은 깊어져만 갔다.
원래 꼼꼼하게 사람을 살피는 편인가?
그래서 수상 전에 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봤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민호가 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던 걸까.
생각의 가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금방 혼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찜찜하단 말이지.’
이강훈이 내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유쾌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때 우리는 주목받는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때 우리는 찍힌다는 표현을 쓴다.
이강훈에게 나는 후자일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예감이기에 근거는 없지만 불길한 예감만큼은 언제나 적중률이 높은 편이니까.
이강훈을 생각하면 볼일을 보고 뒤를 안 닦은 것처럼 찜찜했으나 나는 그를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우리 둘 사이에 체급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그의 진짜 의도를 떠보려면.
내가 성장해서 그와 어느 정도 체급을 맞춰야 했다.
드르르륵.
돌아온 병동 복도를 걸으며 나는 병실을 유심히 살폈다.
월례 회의를 다녀온 사이 오전 회진은 끝나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들은 자유롭게 복도를 거닐거나 침상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왔구나.’
나는 익숙한 이름을 보고 반색했다.
심정화.
새벽까지만 해도 중환자실에서 불안함에 떨던 정화가 일반 병실로 돌아온 것이다.
보호자가 곁에 있자 정화는 한결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외과의의 수술 솜씨는 꼭 수술방에 들어가야만 보이는 것이 아니란다.
그 외과의가 병실에서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지.
병실에서 하는 행동이 수술방에서 이어지는 건 아주 당연한 결과란다.
병실에서 환자를 귀찮게 여기는 외과의가 과연 수술방에서 꼼꼼하게 수술을 할까?」
전생의 멘토였던 서 교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나는 벌써 퍽 괜찮은 외과의가 된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야, 그게 말로만 듣던 우수 인턴 표창장이야? 어디 한번 만져나 보자.”
당직실로 들어가나 홍선아가 너스레를 떨었다.
“공짜로는 안 됩니다. 이거 만지려면 최소한 점심 간식은 사 주셔야 해요.”
“흐음…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난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하련다.”
“선배, 현대판 자린고비네요.”
홍선아와 농담을 주고받은 뒤 나는 상패를 사물함 안에 넣어 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전 수술 스케줄이 10시에 있었다.
그 전까지 검사 동의서를 받고 퇴원 처방을 넣을 생각이었다.
“믿음이 네가 들어오고 나서 우리 과 분위기가 진짜 많이 바뀐 것 같아.”
홍선아가 운을 뗐다.
“뭐랄까, 예전에 비해서 훨씬 활기찬 느낌? 네가 워낙 빠릿빠릿하게 일하다 보니까 다들 피곤해하는 것도 덜하고.”
“…….”
“정민 선배도 네 칭찬 많이 하더라. 대구에 내려갔을 때 너한테 의지를 많이 했다고.”
홍선아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로 작정했는지 한동안 내 칭찬을 콸콸 쏟아 냈다.
하지만 민망한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힘겹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천사처럼 보이고, 그 사람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을.
나 역시 전생에서 그런 사람이 존재했다.
위로는 멘토 서 교수님이 계셨고.
아래로는 2년 후배 조우진이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정말 소아 흉부외과에 남을 생각 없어?”
“…….”
“지금 과 분위기 그대로라면 모두가 행복할 거야. 그렇지 않아?”
홍선아의 달콤한 제안이 고막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소아 흉부외과의 분위기는 흉부외과보다 훨씬 끈끈하고 가족적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소아 흉부외과는 강태섭 같은 악당도 딱히 없었던 걸로 기억했다.
만약 내가 소아 흉부외과에 남는다면 말이다.
좋아하는 흉부외과 일을 하는 것과 동시에.
정치질을 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쫓아낼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행복 진료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제 발로 가시밭길을 가야 하나?
전생에서의 후회와 미련은 말끔하게 잊고 새로운 길을 택할 수는 없는 건가?
내 안의 내가 단단한 논리와 섬세한 감성으로 나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냥 소아 흉부외과에 남으라고.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도저히 전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후회와 미련으로 남은 과거를 바로잡지 못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힘겹게 홍선아에게 내 의견을 전했다.
“선배, 죄송한데 전 진짜 흉부외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너 쇠고집도 아니고 무쇠고집이야. 그거 알아?”
거절에 상처를 받은 홍선아가 토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알죠. 그런데요, 아주 나중에라도 제가 할 일을 다 마친다면 그땐 소아 흉부외과로 돌아오고 싶어요. 이건 진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