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제2장 나는 인턴이다(2)
‘바쁘구나, 바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신촌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각각 점심 무렵과 저녁 무렵에 약속이 잡혀 있었다.
점심에 잡힌 약속은 새로운 인연과 관련된 약속이었고, 저녁에 있는 약속은 옛 인연과 관련된 약속이었다.
둘 다 내겐 중요하고 소중한 약속이었다.
빡빡한 일정이 나는 퍽 마음에 들었다.
인턴 면접까지 성공적으로 치렀으니 의사 생활이 코앞이었다.
앞으로 내가 지낼 곳은 집이 아닌 병원이었고, 내가 만날 사람들은 환자 아니면 병원 스태프들이었다.
생로병사가 교차하고 뒤섞이는 전쟁터.
그 전쟁터에 입장하기 전, 일상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은 아마 근래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순간을 최대한 즐길 필요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약속 장소인 중국 요리집으로 향하는 도중 나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남초롱의 집에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 일이었다.
자기 집이라서 편했을까.
남초롱은 평소 잘하지 않던 본인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남초롱은 나를 동경하고 있다고 했다.
“동경? 사랑이 아니고?”
“놀리지 마. 연애 감정하고는 좀 다르단 말이야.”
권아름이 놀리자 남초롱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나도 믿음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곁에 있으면 누군가가 의지하고 싶어지는 사람. 마음이 든든해지는 사람.”
“…….”
“난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한테 의지하면서 살았거든. 가족들한테도 그렇고 친구들한테도 그렇고.”
남초롱은 스스로를 수동적인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의대에 입학한 것도 순전히 부모님의 추천이었으며 취미나 자취 생활 같은 부분도 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들어가 있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지금까지 남초롱이 퍽 야무진 아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녀가 수동적인 성격이 고민이라고 했으므로 나는 주제넘게 한마디 조언을 했다.
“내 생각에 초롱이 넌 좀 이기적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이기적?”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하니까 내 의견이나 주장을 잘 표현 못하는 게 아닐까?”
“…….”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너만을 위한 선택을 해 봐. 네가 너다워야 다른 사람도 네게 기대고 싶을 테니까.”
훈수를 두고 나니 나도 살짝 쑥스러워졌다.
회귀라는 기적을 통해 간신히 사람이 된 나였다.
본래의 나는 이런 훈수를 둘 만큼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라… 그럼 너희 셋 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
“나 오늘은 너희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셨으면 좋겠어.”
남초롱이 배운 걸 그대로 써 먹었기에 나와 신철우, 권아름은 킬킬 웃었다.
정말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다가 다음 날 오후 남초롱의 집을 떠났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적당히 이기적일 필요가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약속 장소.
나는 종업원에게 룸에 약속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종업원은 별 말없이 앞장섰다.
드르르륵.
미닫이문이 열리자 먼저 도착한, 익숙한 남성 두 명이 나를 쳐다보았다.
한 명은 응급의학과 교수 강민식.
다른 한 명은 강민식의 아버지이자 내가 응급 처치를 한 어르신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첫 번째 스케줄부터 상쾌하게 처리해 볼까.
* * *
두 사람과 점심 약속이 잡힌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천식 발작으로 쓰러진 강주현에게 응급 처치를 한 것이 고마워 강민식이 보답을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강민식의 주문으로 평소에는 먹기는커녕 구경하기도 힘든 고급 요리들이 빼곡하게 테이블을 채웠다.
음식에 고량주가 곁들여지면서 우리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문 친구란 말이지. 면접 코앞인데도 나를 구하기 위해서 시간을 쏟다니 말이야.”
“나도 아버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네 이야기가 핑계인 줄 만 알았는데 설마 네가 아버님을 구했을 줄은…….”
대화를 하면서 두 사람은 반말을 하며 나를 편하게 대했다.
또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를 치켜세우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격세지감이구나.’
전생의 나는 칭찬이 고픈 나머지 강태섭의 설탕 발린 말에 홀라당 넘어갔는데 이번 생은 아니었다.
요즘의 나는 칭찬을 하도 먹어서 배가 불렀다.
칭찬을 듣다 보면 괜히 쑥스럽기도 했다.
“어르신 몸은 완전히 회복되셨습니까?”
“물론이지.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는데 별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
강주현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 자네 덕분이야. 덕분에 며칠 전 은퇴식도 무사히 치렀고.”
“은퇴식이라 하심은…….”
나는 은퇴식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느꼈다.
은퇴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퍽 거창하게 느껴졌던 데다가 생각해 보니 강주현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경찰서장이었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순경부터 시작해서 서장까지 오른 몇 안 되는 간부 중 하나지.”
“와, 대단하십니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경찰 쪽은 잘 모르지만 순경에서 서장까지 승진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는 수준이라고 알고 있었다.
강주현은 그만큼 수완이 출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그런데, 잠깐 내 이야기 좀 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저도 듣고 싶습니다.”
나는 하얀 거짓말을 하며 강주현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강주현이 은퇴한 경찰서장이라…….
새롭게 얻은 정보와 인연에서 나는 나중에 닥칠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흉부외과 레지던트 2, 3년 차 때쯤일 것이다.
벌건 대낮에 병원 홀에서 칼부림 사건이 벌어져 사람이 사망한다.
스토킹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었다.
강주현의 힘을 빌린다면 미리 경찰 병력을 배치해 그 사건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강주현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더 있었다.
지금도 의심스러운 의문사 사건.
한 남편이 아내에게 30억 상당의 보험금을 들어 놓았는데, 보험 가입 세 달 만에 아내는 급성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당시 아내에게 사망선고를 내린 사람은 나였다.
그런데 내게 사망선고를 듣던 남편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 것을 나는 잊지 못했다.
이 사건은 매스컴을 통해 크게 알려지지만 남편은 결국 무죄로 풀려나고 만다.
‘도움받을 수 있는 영역이 의외로 많겠어.’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단지 질병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사고와 상해.
마지막으로 범죄까지도 인간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은퇴한 경찰서장 강주현은 앞으로 내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했다.
특히 범죄의 희생양이 된 환자들을 보살필 때 말이다.
전생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그러니 나는 앞으로 내가 살린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더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다.
이런 선순환이 반복된다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의료 개혁까지 이뤄 낼 수 있지 않을까.
“나이를 먹으면 주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헛소리가 너무 길었군.”
“그런 말씀 마세요.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이제 보니 자네는 사람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기분을 맞춰 주는 능력까지 갖췄군.”
강주현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결론은 이거야. 경찰 쪽으로 도움을 받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내게 연락하라는 거지.”
“…….”
“은퇴를 했다고 해도 충분히 힘을 써 줄 수 있으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잠자코 있던 강민식이 운을 뗐다.
“내가 당장 네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딱 하나뿐인 것 같구나.”
“어르신께서 해 주신 말로도 이미 충분한 보답은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지.”
강민식의 제안 역시 꽤 파격적이었다.
인턴 수련 도중 내가 원하는 과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인턴이란 말 그대로 In-turn.
정해진 과 없이 병원 내부를 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인턴은 한 달에 한 번씩 과를 옮기며 수련하고, 1년이 지나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다.
그런데 강민식은 내가 돌 인턴 로테이션 과목을 원하는 대로 조정해 주겠다고 했다.
매력적인 제안인 것이 분명했다.
음식으로 따지면 남들은 급식을 받아먹는데 나는 혼자서 뷔페를 즐기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게 가능하려면 물론 믿음이 네가 입단속을 잘해야겠지. 네가 떠벌리고 다니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입단속은 자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교수님이 곤란해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쥐가 고양이 생각을 하는구나.”
피식 웃고 마는 강민식.
“올해 인턴 교육 수련 부장이 나다. 누구한테 부탁할 필요 없이 내 손으로 처리하면 되는 일이야.”
“…….”
“그러니 원하는 과가 있다면 부담 없이 말해 보거라.”
강민식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나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었으며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포용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보같이 사양하면서 굴러들어 온 복을 차 버릴 순 없었다.
심장 내과와 호흡기 내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소화기 외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등등.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나는 순식간에 원하는 과를 이야기했다.
능력 있는 흉부외과의가 목표였던 만큼 내과 계통은 심장 내과와 호흡기 내과만 선택했다.
나머지는 전부 외과로 돌렸다.
전생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기억하며 돌아야 할 과의 순서까지 완벽하게 짰다.
“별생각이 없는 것처럼 하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 내는구나.”
“제 나름대로 미리 짜 놓은 계획이 있어서… 부끄럽습니다.”
“책망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의 그런 태도가 더 마음에 드는구나.”
달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강민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질문에 즉답이 나온다는 것은 네가 그만큼 생각이 깊다는 뜻이겠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
“나는 너처럼 진취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감사합니다.”
“방금 말한 내용을 문자로 보내 놓거라. 그대로 스케줄 표를 맞춰 줄 테니…….”
“네, 교수님.”
강 씨 부자와의 대화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들과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음에도 배가 든든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얻은 것이 너무 많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오후 11시 신원대학교 병원 홈페이지에 접속한 나는 인턴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의사 면허증은 진작 땄지만 이제야말로 병원에서 일하는 진짜 의사가 된 것이다.
1살 때부터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합격 통보를 받은 그 주에 나는 인턴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
같이 합격한 신철우, 남초롱, 권아름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은 1박 2일의 일정으로 진행됐으며 각종 실기를 복습하는 형태였다.
ABGA(arterial blood gas analysis, 동맥혈 체혈).
비위관 삽관과 기관 삽관.
ACLS(Advanced Cardiovascular Life Support, 전문 심폐소생술) 등등.
인턴 오리엔테이션까지 마치니 이제 남은 일은 정말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