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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79화 (79/257)

79화 제1장 인턴을 향해서(4)

신원대학교 병원 지하 1층은 쇼핑몰 같았다.

세련된 느낌을 주는 복도 양옆으로 각종 음식점과 편의점,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복도를 걷는 사람들 또한 가지각색으로 보는 맛이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입원환자와 보호자.

수술 가운이나 명찰을 목에 건 병원 스태프.

나처럼 정장을 빼입은, 아마도 보험 회사 직원인 사람들 등등.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곳이기에 병원만큼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엮이는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묘하네.’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하면서 나는 전생의 추억들을 방울방울 떠올렸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추억들이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오겠지.

“오셨습니까?”

카페에 도착하니 창가에 앉은 양순재가 보였다.

의예과 2년과 본과 4년.

총 6년을 함께한 스승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설령 이 자리에 수만 명이 있다고 해도 나는 스승을 손쉽게 찾아냈을 것이다.

양순재라는 사람은 그만큼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장이 잘 어울리는구나. 의사가 아니라 배우를 해도 되겠는걸?”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 양순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양순재의 연구실을 찾아가 폐식도 파트 가르침을 달라고 사정하던 게 엊그제 같거늘…….

작년부로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비공식 폐·식도 파트 펠로우였다.

비공식 양순재의 수제자였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당장 수술실로 들어가서 폐암 수술까지 집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회귀한 나는 전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숙한 솜씨를 가진 서전이 되었다.

“내가 약속 날짜를 잘못 잡은 것 같아.”

양순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약속을 잡고 보니 오늘이 네 면접 날이더구나. 면접에 약속이 있으면 부담이 될 텐데 말이야.

“면접이야 교수님이 내 주셨던 숙제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

“그리고 고작 면접 전 미팅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질 저라면 애초에 교수님 밑에서 폐식도 파트를 배우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긴, 너 같은 수재가 면접에서 떨어지는 것도 우습겠구나.”

양순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스승이란 자고로 제자의 모든 것이 걱정되기 마련이란다. 그나저나 세월도 무상하지. 네가 벌써 인턴이라니…….”

추억에 젖는 양순재의 얼굴을 지켜보며 나 역시 감상에 젖었다.

6년 전만 해도 풍채가 좋고 정력이 넘치던 스승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스승은 왜소하고 활력이 없어 보였다.

내가 성장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세월에 흐름을 감당하지 못한 스승이 노화한 건지.

안타깝게도 나는 그 둘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온 뒤 스승과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미래를 의논하는 자리라기보다는 추억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쯤에서 슬슬 본론을 꺼내 볼까?”

스승의 말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오랜만에 만나서 추억을 나누는 게 본론이 아니었단 말인가.

또 다른 본론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나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스승의 고백을 기다렸다.

“믿음아.”

“네, 교수님.”

“나 말이다, 조만간 본원 흉부외과로 복직할 예정이란다.”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 귀도 의심되었다.

스승이 흉부외과로 복직한다고?

스승이 나를 걱정했던 것처럼 나도 스승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60대 초반의 나이인 스승이 고된 흉부외과 일을 견딜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복직을 할 거라면 더 이른 시기에 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대체 무엇이 스승을 복직의 길로 이끌었을까.

“정말이십니까?”

“너도 알잖니. 나는 농담을 못하는 위인이라는 거.”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 나이에 복직하는 거 솔직히 부담스럽긴 하단다. 몸도 마음도 많이 늙었으니까. 하지만…….”

뜸을 들였다가 말을 잇는 스승의 표정은 단호했다.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단 1, 2년이라도 네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뒤를 봐주고 싶구나. 네 재능이 꽃필 수 있도록.”

놀랍게도 스승은 아직까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천재인 내가 위계 서열이 심한 한국 의사 문화에서 살아남지 못할까 봐 불안해했던 것이다.

스승의 끝나지 않는 배려와 애정이 나는 그저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었다.

“저를 위해서라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혼자서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니까요.”

“암, 그 부분을 의심하는 건 아니란다. 단지 네 수련 생활이 좀 더 수월하길 바랄 뿐이지.”

확실히 스승이 현직 흉부외과의로 근무한다면 내게 큰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인턴과 레지던트와 펠로우가 미생이라면 교수는 완생이었다.

흉부외과의는 누구나 흉부외과 교수가 되길 꿈꾼다.

그런 교수가 뒤를 봐준다면 내 수련 생활은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내가 갈리는 지점이 이렇게 또 생길 줄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가르침을 받은 너와 함께 수술실에 서 보고 싶은 욕심도 있단다.”

“…….”

“어쩌면 이게 가장 큰 욕심인지도 모르지.”

진심이 느껴지는 스승의 말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미국으로 떠나지 않은 것.

양순재를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 내겐 축복이었다.

이 두 가지는 아마 내가 의대를 다니는 동안 한 선택 중에 가장 잘한 선택이 아닐까.

“교수님께서 저를 봐주신다면 저도 교수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넌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까.”

나와 스승은 서로를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스승과 나 사이에는 말하지 않고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 * *

스승과 헤어진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면접이 1시간 앞으로 다가온 시점.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면접 장소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흑기사, 왜 그쪽에서 오냐?”

1번역 출구에 서 있던 신철우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양 교수님하고 잠깐 약속이 있어서. 근데 난 아직도 흑기사냐?”

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흑기사가 이비듬보다 몇 배는 나은 별명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한 번 흑기사는 영원한 흑기사인 법이지. 교수님이랑 이야기는 잘했고?”

“아주 잘 끝났지.”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스승이 나를 위해 복직하겠다는 것과 조만간 스승과 함께 수술실에 설 수 있다는 건 분명 희소식이었다.

그래서일까.

빨리 인턴을 마치고 흉부외과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의대 다닐 때부터 교수님 빽도 만들어 놓고, 너 재주도 좋다?”

“제주도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뭐야? 그 썩은 개그는… 북극인 줄 알았네.”

“친구 좋다는 게 뭔데. 재미없는 농담도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신철우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전생을 생각하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인턴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신철우는 군 입대를 하겠다고 했다.

의사 면허를 따고 곧바로 군에 지원하면 거의 100퍼센트 공중 보건의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중 보건의와 군의관.

둘 중 어느 것이 낫냐고 하면 당연히 공중 보건의였다.

공중 보건의는 군의관처럼 군대라는 시스템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물론 전생의 나는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그러고 보니 군대에서도 내가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긴 했다.

“둘 다 먼저 와 있었네.”

“굿 애프터 눈.”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권아름과 남초롱이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의예과 1학년 때만 해도 앳된 대학생이던 두 사람은 이제 성숙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확실히 6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유치원생이었던 사랑이가 벌써 중학생이 됐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휴. 꽃가루 날리는 거 봐.”

우리 곁에 선 권아름이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다.

권아름의 말대로 민들레 홀씨 같은 것이 바람을 타고 거리를 활보 중이었다.

“아름아, 너 꽃가루 알레르기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옷에 달라붙는 게 싫어서. 검은색 정장을 입었는데 홀씨가 붙으면 도드라져 보이잖아.”

남초롱의 질문에 답하며 권아름은 연신 손으로 정장 상의를 털어 댔다.

“참고로 민들레 홀씨는 꽃가루가 아니라 꽃씨야. 알레르기랑은 상관없어.”

“진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가루는 눈에 안 보여. 2월 말부터 5월까지는 주로 나무 종류의 꽃가루고 많고.”

나는 막간을 이용해 지식을 뽐냈다.

어머니가 비염으로 고생을 하셨기에 나도 이쪽으로 공부를 많이 해 뒀기 때문이다.

우리는 코앞으로 다가온 면접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며 병원으로 향했다.

화제에 오른 것은 선배에게 들은 면접시험 질문 족보였다.

족보는 실기뿐만 아니라 면접에도 존재했다.

“너희는 먼저 들어가. 나는 잠깐 볼일이 남아서.”

“면접이 코앞인데 무슨 볼일? 우리 몰래 숨겨 둔 애인이라고 만나려고?”

내 말에 신철우가 익살맞은 농담을 섞어 가며 되물었다.

“애인은 무슨. 흑기사한테 무슨 애인이 있어.”

“흐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흑기사는 만인의 연인이니까 숨겨 둔 애인이 있을 리 없지.”

“너 이상한 데서 납득한다?”

“혹시라도 늦지 말고 제때 면접장으로 와.”

신철우와 달리 남초롱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챙겨 주었다.

이렇게 착하고 다정한 아이가 전생에서는 오리엔테이션에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니.

지금도 전생을 떠올리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친구들을 먼저 대강당으로 보낸 뒤 나는 병원 인근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정확한 시간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정확한 병명도 알지 못하지만

오늘 면접을 보는 응급의학의 교수의 아버지가 병원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구해야 했다.

내가 제때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는 후유증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병원 근처에서 쓰러져서

그나마 빨리 후송된 덕분에 죽는 것은 면했다고 들었는데…….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눈으로 나는 병원 주변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무려 30여 분을 헤맸음에도 쓰러진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쓰러질 시간대가 아닌 걸까.

아니면 벌써 쓰러져서 응급실에 가 있는 것일까.

면접 시간이 가까워지자 초조함이 밀려왔다.

사람은 사람대로 못 구하고 면접은 면접대로 못 보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죄송한데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1시간 내로 노인 환자분이 응급실을 찾은 적이 있나요?”

“아니요. 없는데요?”

급하게 찾아간 응급실 원무과 직원이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걸 어쩐다?

그냥 이대로 환자를 포기하고 면접을 보러 가야 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면접장인 대강당 건물로 향하는 발걸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한 줄기 섬광이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환자는 어떻게 병원으로 왔을까.

이동 수단을 고민하다 보니 해법이 나왔던 것이다.

환자가 만약 병원 야외나 병원 내부에서 쓰러졌다면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했을 것이다.

병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신고로 환자는 신속하게 응급 처치를 받고 후유증도 얻지 않았을 것이다.

환자의 발견이 늦었다는 점.

그 점은 환자가 사람들의 출입이 적은 장소에서 쓰러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비교적 사람들의 출입이 적은 장소는 어디일까.

생각을 전환하니 나아가야 할 길이 눈에 보였다.

나는 양복 상의와 셔츠를 휘날리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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