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61화 (61/257)

61화 제3장 막아야 한다 (1)

“야! 너 약 먹었어? 이 황금 같은 시간을 도서관 따위에서 보낸다고? 오, 마이 갓!”

전공 수업이 끝난 뒤 신철우가 나를 꾸짖듯이 한 말이었다.

그 전에 내가 한 말은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말이었고.

“배워서 남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 의사지. 내가 의사 노릇을 하겠다는데 꼽냐?”

나는 익살맞게 받아쳤다.

예과를 다니는 2년이 수능으로 피폐했던 시절을 보상받는 시간이라는 것.

본과에 들어가기 전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

그것을 전생의 흉부외과의였던 내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회귀한 나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원대한 꿈이 있었다.

예전보다 훌륭한 흉부외과의가 되고 싶었고, 전생에서 내 손을 허망하게 떠난 환자들을 살려 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천재라는 낯부끄러운 단어까지 꺼내며 양순재에게 폐·식도 파트의 가르침을 부탁했다.

바로 어제 양순재의 허락을 받아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됐으니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버인데… 너희 생각은 어때?”

신철우는 근처에 앉았던 남초롱과 권아름에게 의견을 구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거야 그런데… 사람이 여유도 좀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벌써부터 공부는 좀…….”

남초롱은 내 편이었고, 권아름은 신철우 편이었다.

두 사람은 나와 신철우처럼 성격이 전혀 달랐다.

과연 사람은 익숙한 것에만 끌리는 건 아닌 모양이다.

“지금부터 본과 들어갈 때까지 주구장창 공부만 하겠다는 건 아니야.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에 같이 다니면서 놀면 되지.”

나는 양순재 교수와 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설명한 뒤 세 사람과 작별했다.

도서관 인터넷실을 찾아 메일에 접속했는데, 오늘 아침 양순재 교수가 보낸 따끈따끈한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와, 나를 아예 묻어 죽일 셈인가?’

메일에 담긴 논문과 자료를 확인하고 나는 그만 혀를 찼다.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회귀를 한 나조차 3, 4일은 꼼짝없이 공부만 해야 할 정도였다.

[다음 주에 테스트가 있으니 설렁설렁 공부하지 말 것!]

메일에 적힌 단 한 문장이 공포 영화처럼 섬뜩했다.

하지만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내 업보였다.

양순재에게 나는 의대생인 주제에 전문의급 의학 지식을 갖춘 천재였으니까.

평범한 사람에게 내주는 숙제와 천재에게 내주는 숙제의 양이 같다면, 그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논문과 자료를 출력한 나는 곧바로 2층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깜지.

그러니까 배워야 하는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흉부외과 펠로우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심장 파트.

다른 하나는 내가 공부를 시작한 폐·식도 파트, 또는 일반 흉부 분야라고 불리는 파트였다.

일반 흉부 분야에 속한 수술 및 처치는 다음과 같았다.

폐암 및 폐 이식 수술.

식도암 및 다한증 수술.

흉부외상 및 종격동 질환 처치, 흉벽 종양 수술 등등.

본래 심장 전공이었던 내가 일반 흉부 분야까지 탐내고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흉부외과 특유의 인력난 때문이다.

흉부외과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줄어들게 된다.

일은 힘든 데다 월급은 박봉이고,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태롭고 긴장된 나날을 보내야 하니까.

전생에서 나는 일반 흉부 파트에 인력이 부족해 환자가 사망하는 케이스를 꽤 자주 접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내가 일반 흉부 분야까지 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왜?

아까 말했다시피 흉부외과의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까.

쉽게 말해서 이가 없으니 잇몸으로 때우는 작전인 셈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서글픈 마음이 들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회귀를 했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설령 내가 미국에서 수련하고 한국에 돌아와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먼 미래에 여러 의학 드라마에서 흉부외과의의 고된 숙명과 가치를 다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흉부외과의 지원이 늘지는 않았다.

의대생들은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 및 간극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의료계의 생태 자체를 바꾸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겠지.’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펜을 멈췄다.

내가 심봉사 동아리에 들고 안태환과 친해지려는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었다.

안태환.

그는 의사 출신으로 시작해서 잔뼈 굵은 정치인으로 거듭난다.

나중에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과감하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한다.

그런 안태환과 인맥을 쌓는다면 어떨까.

썩어 문드러진 의료계를 뿌리째 뽑아 새롭게 개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는 안태환을 다리 삼아 내친김에 의료계까지 개혁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자라나는 잡초를 백날 베어 내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잡초를 아예 뿌리째 뽑고 새로운 작물을 심어야지.

‘뭐,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나는 몰려드는 잡념을 물리치고 양순재가 보내 준 논문을 공부하는 데 집중했다.

먼 미래의 일을 굳이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을 하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올 테니까.

서걱. 서걱.

마음이 냉정해지면서 깜지를 작성하는 연필 소리도 서늘해졌다.

* * *

“다녀왔습니다.”

내가 집 현관에 들어선 시간은 무려 밤 11시였다.

오랜만에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시간이 늦었던지라 사랑이는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만이 현관으로 마중을 나왔다.

“큰아들, 오늘은 늦었구나.”

“친구들하고 한잔했니?”

“아. 네. 학기 초라서요. 동아리 활동도 있었고.”

나는 피 터지게 공부하고 왔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겼다.

사실을 말했다간 부모님은 내가 무리를 한다면 걱정하실 테니까.

“두 분은 별일 없으셨어요?”

“별일이야… 있었지.”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살짝 긴장했다.

별일이 있었다는 것은 보통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어디 아프세요?”

“그런 건 아니고 장난 좀 쳐 봤다. 사실 말이야… 오늘 신작이 출간됐거든.”

아버지는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안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에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가족의 재발견>

몇 년 전부터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여 집필하던,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각색했다던 소설이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선보인 것이다.

“축하드려요, 아버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책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표지는 파스텔 느낌의 풍경화였고, 제법 이름 있는 작가들의 추천사도 적혀 있었다.

“너희 아빠, 오늘 하루 종일 싱글벙글하더구나. 비록 출간 첫날이긴 하지만 판매량도 꽤 잘 나온 모양이야.”

“뭐. 더 두고 봐야 하긴 하겠지만.”

“내일 중으로 읽어 보고 꼭 독후감 작성할게요.”

“녀석, 너스레는. 독후감까지는 필요 없다.”

내 말에 아버지는 껄껄껄 웃었다.

사랑이가 자고 있었기에 나와 부모님은 거실로 이동해 좀 더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도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다.

부모님은 내 의대 생활을 궁금해했고, 나는 부모님의 오늘 하루에 대해 물었다.

오늘 식사는 어떻게 했는지.

만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어떤 사건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등등.

상대의 시시콜콜한 부분마저 궁금한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회귀를 한 나조차 부모님 앞에서는 아이였기 때문에.

나는 친구들에게 하지 않았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부모님께 전하기도 했다.

“밤이 늦었구나. 그만 들어가서 자거라. 이번 주 일요일에는 나들이 겸 외식을 할 거니까 시간 비워 두고.”

“좋은 꿈꾸렴. 큰아들.”

“네, 두 분도 편히 주무세요.”

부모님과 대화를 마친 나는 씻고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아버지의 소설을 펼쳤다.

맛만 볼 생각으로 펼쳤는데, 읽다 보니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달했다.

놀랍게도 소설 속 주인공은 나였다.

소설 속 줄거리도 내 경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시간을 거슬러 한 살이 된 중년인이 가족의 불행을 막는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내 회귀에 대해 알고 있을 리 만무했지만, 아버지의 상상력이 실제로 내게 닿았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었다.

아버지에게 신기라도 있는 걸까.

<행복은 추억이 되고, 불행은 경험이 됩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으니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작가 후기에 적힌 글귀를 확인하고 나는 전율마저 느꼈다.

아버지가 회귀한 나를 꿰뚫어 보고 해 준 말 같아서.

행복은 추억이 되고 불행은 경험이 된다라…….

나는 아버지의 후기를 곱씹으며 사색에 잠겼다.

양순재 교수의 또 다른 숙제인 좌우명 제출하기가 단번에 해결된 듯했다.

* * *

토요일 아침, 신원대학교 정문 앞은 한산했다.

수업이 없었으므로 학생들의 얼굴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는 계절.

아직은 쌀쌀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나는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오늘은 내가 심봉사 동아리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동아리 활동을 하는 날이었다.

목적지는 학교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노인복지센터.

노인복지센터에서 반나절 정도 봉사를 하는 것이 오늘의 스케줄이었다.

“이믿음, 일찍 왔네?”

나 다음으로 도착한 사람은 의외로 안태환이었다.

본과 1학년생이자 동아리 회장.

먼 미래에 정치인이 되는 의사.

조만간 다가올 불행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

“저는 약속 장소에 10분에서 20분 정도 일찍 안 오면 이상하게 불안하더라고요.”

“나랑 비슷하네. 나도 약속 시간 어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

우리는 서로의 닮은 점을 확인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선배는 활동적인 일을 좋아할 것 같은데, 봉사 동아리는 왜 가입하셨어요?”

미래에 유행할 언어로 소개하자면 안태환은 속칭 인싸였다.

그에게 봉사 동아리는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옷 같았다.

“다 경험이지. 기왕 태어난 김에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봐야 하지 않겠어?”

“…….”

“그리고 나 봉사 동아리만 든 거 아니다. 축구 동아리랑 공연 동아리에도 소속되어 있어.”

“그게 다 소화가 돼요? 본과까지 들어갔는데…….”

“활동이야 자연스럽게 줄겠지만 그래도 셋 다 소화해야지. 하려고 마음먹으면 못 할 것도 없어.”

전생에서 소문으로 듣던 대로 안태환은 활동적인 정력가였다.

타고난 활동성으로 인맥을 쌓으며 나중에는 정치까지 손을 대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안태환과 인연을 쌓는다면, 안태환의 인맥을 나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안태환과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약속 시간 20분 전에 도착했으므로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근데 선배는 가족 관계가 어떻게 돼요?”

잡담을 나누던 중 나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호구조사가 무슨 중요한 질문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안태환의 미래를 아는 내게 이것만큼 중요한 질문은 없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이번에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안태환이 아닌, 안태환의 여동생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말이다.

안태환의 여동생은 이번 달 중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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