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60화 (60/257)

60화 제2장 선택의 기로 (5)

양순재의 특별 수업을 마치고 나는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그사이 해가 저물어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건물들마저 하나둘 불빛을 잃어 가는 가운데 도서관만이 등대처럼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캠퍼스를 걷는 학생들은 나 말고도 많았다.

대부분 취업 준비를 하는 고학년들이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었다.

낮보다는 분위기가 가라앉은, 쓸쓸한 느낌의 교정을 걸으며 나는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확실히 전생의 대학 생활과 지금의 대학 생활은 180도 달랐다.

전체 수석으로 입학.

오리엔테이션 당시 마주한 교통사고에서 뽐낸 의료 솜씨.

남초롱 대신 술을 마시며 얻은 흑기사라는 별명.

주점에서 벌어진 칼부림 사건의 응급처치 등등.

학교에서 나의 존재감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과장 하나 안 보태서 내가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지경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의학 천재임을 입증해 폐·식도 파트의 대가인 양순재의 일대일 가르침까지 받고 있었다.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면.

아마 나는 의대를 졸업하기도 전에 흉부외과 폐·식도 파트의 펠로우급 지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양순재를 스승으로 삼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의 한 수였다.

양순재는 내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스스로를 천재라고 일컫는, 무척 오만해 보이는 내 발언을 무시하지 않고 친히 테스트를 받게 해 주었다.

내 미래를 생각해서 미국행을 제안한 것과 기대를 뛰어넘는 양질의 교육을 시켜 주는 것은 보너스였다.

‘아직까지는 순조로운데…….’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전생에 허무하게 떠나보냈던 사람들을 살리고.

술집에서는 내가 몰랐던 인연의 목숨까지 살리는 등등.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나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이민호였다.

전생의 나는 이민호와 원수지간이 아니었다.

이민호가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다.

뒷배경이 든든한, 사이코패스 이민호가 적이라는 사실은 영 껄끄러웠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고난이나 갈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해 온 일들에 비하면, 이민호와 적이 된 것은 비교적 약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음 주까지 좌우명을 정해서 문자로 보내거라.

“갑자기 좌우명은 왜…….”

-외과의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네가 흔들릴 때 잡아 줄 너만의 한마디가 있어야 한다.

“…….”

-참고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좌우명을 문자로 보낸다면 퇴짜를 맞을 테니 잘 생각해서 보내야 한다.

불쑥 수업이 끝날 무렵, 양순재가 내주었던 숙제가 떠올랐다.

양순재의 숙제는 그의 수업 방식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세상에 좌우명을 제출하라는 숙제를 어떤 교수가 내준단 말인가.

물론 그런 독특한 수업 방식이 나는 좋았지만.

-모든 것은 환자를 위해서.

-포기하는 것은 선택이지 운명이 아니다.

-초심을 잃지 말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등등.

몇 가지 문장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전생의 내겐 나를 지탱해 주는 나만의 좌우명이 없었다는 것을.

만약 그런 좌우명이 있었다면 나는 강태섭에게 이용당하고 배신을 당했더라도 꿋꿋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나는 양순재 교수의 수업이 가면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양순재 교수와 함께라면 나는 단순히 지식이 풍부한 서전을 뛰어넘어 인간적으로도 성숙한 서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뜬금없이 몸을 떠는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니 신철우의 전화였다.

“어. 무슨 일인데?”

-섭섭하네.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하는 사이인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용건부터 말해.”

-매정한 놈, 너 아직 학교에 있지? 나 초롱이랑 아름이랑 같이 있거든? 저녁 안 먹었으면 이모네 밥상으로 와. 저녁이나 같이 먹자.

“오냐. 간다.”

나는 통화를 끊고 세 사람이 있다는 밥집으로 이동했다.

이모네 밥집은 4,000원을 내면 한식 뷔페를 즐길 수 있는 가성비 갑인 밥집이었다.

전생의 나도 자주 신세를 졌던 곳이었다.

“너희, 아직 집에 안 갔어?”

나는 세 사람이 착석한 테이블에 앉으며 물었다.

“가입할 동아리 좀 알아보느라. 대학에 들어왔는데 동아리 생활 한번 못 해 보면 아깝잖아?”

“맞아. 다들 본과 들어가기 전에 동아리 하나쯤은 꼭 가입하라고 하더라.”

권아름과 신철우가 한마디씩 하고 남초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입은 했어?”

“나는 농구 동아리, 초롱이랑 아름이는 독서 동아리. 너도 동아리 하나 들어야지.”

“동아리라…….”

나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전생의 나는 동아리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때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과외하기에 바빴다.

덕분에 조별 과제를 함께했던 친구들하고만 간신히 친분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도 같은 과정을 밟을 순 없었다.

가치관에 따라 판단은 다르겠지만, 의대 동아리는 무척 중요하다.

앞으로 평생 병원 생활을 같이할지도 모르는 선배들을 동아리에서 먼저 만나기 때문이다.

학연, 지연, 혈연.

악습이긴 하나, 이것들은 엄연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동아리 활동을 피해선 안 된다.

이 힘들을 정의롭게 이용해야 할 테니까.

“동아리 홍보 팸플릿 모아 놓은 거 있는데 줄까?”

“고맙지만 사양할게. 난 벌써 정해 놓은 데가 있어서.”

남초롱이 건네는 팸플릿을 나는 정중하게 밀어냈다.

“나랑 다닐 땐 동아리엔 전혀 관심 없는 척하더니… 벌써 정해 놓은 곳이 있다고?”

“…….”

“이래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는구먼. 거기가 어딘데?”

신철우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남초롱과 권아름도 내게 시선을 모았다.

“나는 심봉사.”

* * *

신원대학교 의과대학 건물 지하 2층.

이곳은 의대 소속 동아리의 동아리방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안녕하세요.”

복도를 지나가면서 나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전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기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다 내 선배들이기 때문이다.

“어. 그래. 네가 믿음이지? 너 벌써부터 유명 인사더라?”

“동아리 가입하려고?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

과연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선배였다.

놀랍게도 선배들은 내 이름과 내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 생에서 내 존재감은 그렇게 특별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나를 알아봐 준다는 사실은 의외로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선배들의 아는 체와 동아리 권유를 간신히 뿌리치고 나는 복도 끝 동아리방 앞에 섰다.

문 앞에 적힌 ‘심봉사’라는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봉사의 ‘심’은 마음 심(心)자인데, 마음으로 봉사를 하겠다는 봉사 동아리였다.

그러니까 회귀한 내가 선택한 동아리는 봉사 동아리였던 것이다.

내가 많고 많은 동아리 중에 굳이 심봉사를 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심봉사에 내가 인맥을 쌓고 싶은 인물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인물에게 조만간 불행이 닥치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닥칠 불행을 막고, 그 사람과 인맥을 쌓는 것.

이것은 당분간 내게 가장 중요한 숙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10평 남짓한 공간은 비좁고 어수선해 보였다. 캐비닛과 소파, 소형 냉장고, 컴퓨터 책상, 책장 등이 질서 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게 누구야? 전체 수석에 록발라드 가수 아니야?”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남학생이 나를 발견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이 인간이 봉사 동아리였구나. 그걸 잊고 있었네.’

2학년 선배 서영철을 발견한 순간, 나는 그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전생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불쾌한 감정이 무럭무럭 샘솟기 시작했다.

서영철은 전생에서 나를 폐급 인턴으로 만든 주범이었다.

당시 손재주가 모자랐던 레지던트 1년 차인 서영철.

그는 본인이 해야 할 요추천자를 나에게 맡겼고, 인턴이자 천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나는 당연히 요추천자에 실패했다.

다행히 레지던트 2년 차가 사태를 수습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만 나쁜 놈이 되었다.

전부 서영철의 간사한 혀 때문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내가 독단적으로 요추천자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으로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누명을 뒤집어쓴 것도 억울하건만 그날 이후로 내겐 이상한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선배를 개껌보다 못하게 보는 놈.

환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놈.

건방지게 자기가 잘난 줄 아는 놈.

사교적이고 말을 잘하는 서영철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내 흉을 보고 다녔던 것이다.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내 편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세간의 거짓을 진실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차차 호전되고 있던 수전증이 급속도로 재발한 것도 그때쯤이었고.

나는 불쑥 서영철의 주둥이와 주둥이 옆에 난 점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강태섭에게 배신당한 충격이 워낙 커서 묻혔을 뿐.

서영철도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간 중 하나였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이 기회에 전생의 빚을 제대로 갚아 주마.’

나는 속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야, 너 왜 나를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냐?”

서영철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합니다. 눈이 좀 빡빡해서.”

“싱겁기는. 우리 동아리 가입하러 왔어?”

“네.”

“거기 앉아 봐. 조금 있으면 동아리 회장 선배가 올 거니까. 이건 서비스~.”

서영철은 친한 척하며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서 건넸다.

나는 음료를 받아 들었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서영철이 주는 음료 따위는 마시고 싶지 않았으니까.

동아리 회장을 기다리는 동안, 서영철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타고난 입담꾼답게 서영철은 처음 본 나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내겐 그 모든 이야기가 가증스럽게 느껴질 따름이었지만.

서영철의 화술은 언뜻 비단처럼 부드러워 보여도 언제든지 독침으로 변할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동아리 방문이 열리고 키가 훤칠한 남학생이 교실로 들어왔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눈길을 사로잡는 패션 감각.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쾌활하고 활력이 넘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

심봉사의 동아리 회장이자 내가 인맥을 쌓고 싶은 사람.

곧 닥칠 불행을 막아 주고 싶은 사람.

안태환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아이고~! 선배님 오셨습니까?”

서영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알랑방귀를 뀌었다.

서영철의 전생은 분명 내시나 환관이 아니었을까.

“안녕하세요. 선배님.”

나도 안태환을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네가 소문의 1학년생 이믿음이지?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얼마 전에는 술집에서 칼에 찔린 환자도 치료했다고 하던데.”

“…….”

“아 참, 나는 안태환이라고 하고, 본과 1학년생에 동아리 회장이다. 만나서 반갑다.”

안태환은 내게 다가와 다짜고짜 악수를 청했다.

내 손을 잡는 악력, 위아래로 흔드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벌써 주점 사건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마당발인 것 같기도 했고.

“우리 동아리 들어올 거지?”

“네.”

“재미있는 동아리 많은데, 왜 우리 동아리를?”

“원래 봉사 활동에 취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미없는 걸 재미있어 하는 타입이라는 거지?”

안태환은 농담을 던지곤 피식 웃었다.

“가입 신청서 쓰고 다음 주부터 활동해. 넌 무조건 합격이니까.”

외모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안태환의 대답이 나는 반가웠다.

부디 조만간 안태환에게 닥칠 불행도 시원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