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제1장 시간을 달려서 (4)
“큰아들, 일어났어?”
어머니가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과거 어머니는 항상 내 이름을 불렀지만, 동생이 태어난 후로는 큰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전생에는 듣지 못했던 큰아들이라는 호칭이 나는 아직도 어색하고 낯설기만 했다.
큰아들.
얼핏 들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속에서 나는 전생과 달라진 현생의 삶을 엿보았다.
“네, 더 주무세요. 피곤하실 텐데.”
“엄마가 아무리 피곤해야 고3 수험생만큼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겠니? 금방 아침 차려 줄게.”
어머니는 냉장고에 넣어 둔 반찬과 밥을 데우고 국을 끓이며 계란말이를 시작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생과는 다른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전생의 어머니는 이맘때쯤 편치 않는 몸으로 식당 일을 하셨다.
설거지로 늘 손이 부르텄고, 허리가 쑤신다며 파스를 달고 사셨다.
고2 때 내가 불량 학생들과 어울렸던 일 때문에 나를 차갑게 대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랐다.
어머니는 여전히 간호사로 일했으나 간호부로 부서를 이동한 덕분에.
3교대가 아닌 일반 직장인처럼 근무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리는 중이었고.
나는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했으며, 동생 사랑이는 아픈 곳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전생과는 180도 달라진 우리 네 가족의 삶에서 어두운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벌컥!
작은 방의 문이 열리며 쪼그만 남자아이가 거실로 나왔다.
이사랑.
전생에는 없었던 내 동생.
바지춤을 잡아당기며 화장실로 쫄랑쫄랑 걸어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형아, 일어났어?”
“그래, 사랑이 쉬야 마려워서 깼구나.”
“응. 엄마, 나 일어났어요.”
“사랑이, 좋은 아침.”
“네.”
붙임성 있게 나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사랑이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쪼르르르.
동생이 소변 보는 소리마저 귀엽게 들리는 나는 변태일까.
사랑이는 소변만 보고 제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서 아침을 먹었다.
“이번 모의고사는 어땠니?”
“잘 쳤어요. 한 문제도 안 틀린 것 같은데요?”
“와, 그 정도야?”
“엄마, 아빠 아들인데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웃음기 섞인 말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전생에도 원래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다. 고2 때 잠깐 일탈을 했던 때를 제외하면 전교 10등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거기다 나는 의대에서 이미 말도 안 되는 양의 공부를 했다.
의사가 되어서는 영어 논문을 읽고, 영어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때에 비하면 수능 공부를 하는 것은 사실 식은 죽 먹기였다.
오죽하면 몇 년 전부터 체력을 기르기 위해 주 2-3회 복싱 체육관을 다녔을까.
“무슨 일이든 너무 잘하려고 하면 빨리 지치는 법이란다. 인생은 마라톤이니까 적당히 열심히 하고 적당히 여유를 가지렴.”
“명심할게요.”
나는 계란말이를 오물오물 씹다가 화제를 돌렸다.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참, 할아버지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할아버지야 입이 귀에 걸리셨지. 얼마 전에 신원대학교 병원의 정식 파트너 계약이 연장됐으니까.”
“…….”
“근데 이번에 개발한 전자의무기록 소프트웨어 이름이 신원 뮤(MU)라고 하더라.”
“신원은 신원대학교에 신원일 테고, 뮤는 뭐예요?”
“뭐긴 뭐겠니. 큰아들 이름이지. 큰아들 이니셜을 딴 거야. M은 믿, U는 음.”
“그건 좀 충격적인데요?”
할아버지의 작명 센스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손주가 고맙고 사랑스러운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병원 소프트웨어에 내 이니셜을 박아 넣었을 줄이야.
그나저나 의대를 졸업하고 신원대학교 병원으로 들어가면.
EMR을 쓸 때마다 웃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었다.
작년에 터진 IMF 상황에서도 할아버지의 회사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
할아버지가 요즘 들어 부쩍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도.
“큰아들.”
“네.”
“엄마는 아직도 이 순간이 꿈만 같구나. 우리 셋이 헌책방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행복해질 줄은 몰랐는데.”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가에 행복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는 내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행복했다고 해서 우리 네 가족이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다.
고생 끝에 행복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이 닥쳐오더라도.
나는 그것들을 슬기롭게 이겨 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 이름은 믿음이고, 내 동생의 이름은 사랑이다.
나와 동생의 이름은 어쩌면 우리 가족의 미래를 상징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큰아들이 태어나면서 많은 게 바뀐 것 같다고 엄마는 생각하고 있단다.”
“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절 똑 부러지게 키워 주신 덕분이죠. 그 부모에 그 자식 아니겠어요?”
“하긴, 그것도 그렇지?”
어머니와 나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 나는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둘러맨 채 집을 나왔다.
목동은 초등학교 6학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번화해졌다.
아파트 단지가 우후죽순 들어서고, 상가도 꽤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목동의 집값이 앞으로도 꾸준히 더 오른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사 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 *
상가 앞 공터를 서성거리며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학창 시절을 그려 보았다.
얼마 전 전국모의고사를 치렀고, 수능이 2개월 앞으로 바짝 다가온 시점이었다.
요즘 내 목표라면 당연히 수능을 잘 쳐서.
신원대학교 의대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그리 어려운 목표도 아니었다.
수능 전에 교통사고를 당한다거나 특이한 질환에 걸리지 않는다면 무난하게 이룰 수 있는 목표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무사히 잘 왔구나.’
돌이켜 보면, 회귀한 후 1살부터 현재 고3까지 살아온 나날이 나는 퍽 마음에 들었다.
물론 회귀한 지식으로 대활약하며 승승장구를 할 기회는 몇 번이나 있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주변 환경과 내가 놓친 것들을 차근차근 되짚으며 바꿔 보고 싶었으니까.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전생의 삶과 속도를 맞춰야 회귀의 장점도 십분 활용할 수 있을 테고.
‘가만있어 보자.’
기억의 서랍을 다시 한번 뒤져 보았는데.
이쯤에서 특별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생이었다면 고2때 일탈을 했던 탓에 양아치 친구들이 나를 유혹했겠지만, 이번 생에서 나는 일탈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불량 학생들과 부대낄 일도 없었다.
‘방심하면 안 돼.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회귀를 하면서 내가 바꿔 놓은 상황과 인물들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 확률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본래 인생이란 인간이 좌절하고 실패하기를 기대하는 변태 같은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전생에서 별 사건이 없었다고 해서 이번 생에도 반드시 그러라는 법은 없으니까.
“좋은 아침.”
귀에 익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여고 하복을 입은 김지원이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연기 생활을 해 온 김지원은 고등학교에 올라와 미모에 부쩍 물이 올랐다.
주변 남고에서 김지원 원정대를 결성해서.
김지원을 보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다.
나야 거의 하루에 한 번씩 김지원을 봐서 별 감흥이 없었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푹푹 찌네.”
“그러게. 잠깐 걸었는데도 땀이 나.”
김지원이 상의 깃을 손으로 잡고 펄럭거렸다. 나는 김지원을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지원아,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뭔데?
“나랑 매일 같이 다녀도 괜찮아? 너 잘나가는 배우잖아. 소속사에서 뭐라고 안 해?”
“우리 믿음 씨,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속도가 아주 스포츠카급이야.”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요새 더 유명해져서 물어보는 거잖아.”
몇 주 전, 김지원이 촬영에 들어간 드라마 ‘폭풍의 바다.’
‘폭풍의 바다’에서 김지원은 여주인공의 고교 시절 배역을 맡아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야 배우로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별 이야기는 없던데? 사실… 시청률이 엄청나게 좋은 드라마도 아니고, 내가 단역이기도 했고.”
“그래도 요즘엔 알아보는 사람 꽤 있지 않아?”
“전에 비하면?”
김지원은 빙긋 웃었다.
국민학교 시절, 여장군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지원은 나이를 먹으면서 성질이(?) 꽤 죽었다.
천방지축, 말괄량이. 왈가닥.
이런 단어들은 이제 김지원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옛 기억 속의 김지원과 눈앞의 김지원을 겹쳐 보면 가끔 웃음이 났다.
“이리 와. 내가 선크림 발라 줄게.”
김지원이 가방에서 꺼낸 선크림을 발라 주는 동안, 나는 아기처럼 잠자코 있었다.
이것은 매일 아침 등교 시간에 펼쳐지는 의식과도 같았다.
우리는 계속 잡담을 나누며 등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관계에도 꽤 변화가 생겼다.
까불이와 김요한은 사이좋게 직업 전문학교로 갔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만나서 놀곤 했다.
기도 질식으로 죽을 뻔했던 손승우는 이사를 한 뒤 축구부가 딸린 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시작은 비슷했지만, 우리는 각자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아마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듯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리라.
“평일은 바빠서 못 볼 것 같은데, 대신 주말에 만나서 같이 영화 보자. 또 못 간다고 하면 알지?”
“당연하지. 우리 김 여사 괄괄한 성격을 내가 모를까 봐?”
내 농담에 김지원이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이따가 문자 할게.”
“그래. 스케줄 잘하고.”
김지원과 헤어져 재학 중인 고등학교로 향했다.
3학년 9반 교실은 조용했다.
일찍 온 학생 몇몇이 교과서를 펴 놓고 공부 중이었다.
고3 학급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이 교실 안에 흐르고 있었다.
“이비듬, 왔냐?”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 송윤호가 아는 척을 했다.
안타깝게도 내 별명은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부 이비듬으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회귀를 했음에도 이 유치한 별명의 마수에서는 절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친구들은 입을 모아서 이렇게 말했다.
이비듬이란 별명이 입에 착 붙어서 도저히 떼어 낼 수가 없다고.
“애들 공부하니까 나가서 이야기하자.”
“그러자.”
나는 가방을 자리에 놓고 복도로 나왔다.
“야, 근데 너 진짜 운동 제대로 하는 모양이다?”
“갑자기?”
“오늘따라 네 몸이 유독 좋아 보여서. 복싱 체육관을 다닌다고 하더니 설렁설렁하지는 않나 보네?”
“체력도 기르고 스트레스도 풀고 까부는 애들 있으면 혼내 줄 수도 있고. 일거삼득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영어 스피킹과 리스닝 공부가 일정 궤도에 오르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복싱 체육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많고 많은 운동 중에 복싱을 택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 중에는 완력으로 의사를 제압하고 윽박지르는 부류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진상을 적당히 제압하고 체력을 키우기엔 복싱만 한 운동이 없었다.
“범생이 친구, 일찍 나오셨네?”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복도 모퉁이에서 심병수가 튀어나왔다.
심병수의 등 뒤로는 학교에서 알아주는 일진 서너 명이 따라붙었다.
심병수.
국민학교 때부터 나를 미워하고 시기했던 아이.
전생에는 모난 곳 없는 우등생이었지만, 지금의 녀석은 타락해서 일진들과 어울리는 중이었다.
심병수가 술, 담배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최근에는 학급 친구들을 괴롭힌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심병수의 그런 최근 행보는 내 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너도 일찍 왔네. 일찍 일어난 인간이 일찍 담배를 피운다던데. 그 말이 진짜인가 보다?”
다가오는 심병수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은 내가 빈정거렸다.
그러자 심병수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새끼,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근데 내가 담배를 피워도 너보단 모의고사 성적이 좋을걸? 나 몇 달 전부터 신원대 의대 출신 선생님한테 과외 받는다.”
“…….”
“넌 이번에야말로 내 밑이야.”
“제발 그러기를 신께 기도할게.”
“재수 없는 새끼, 네가 언제까지 1등일 거라고 착각하지 마.”
심병수는 제 어깨로 내 어깨를 툭 치고 교실로 들어갔다.
나와 심병수가 만들어 낸 팽팽한 긴장감이 깨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쟤도 너한테 열등감이 어지간한가 봐. 2등도 잘한 건데.”
“살다 보니 남의 밑에 있는 걸 못 참는 인간이 꼭 있더라. 저런 애들은 보통 결말이 안 좋지.”
나는 심병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 고3 생활에 위협이 생긴다면 그건 아마 심병수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
문득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