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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28화 (28/257)

28화 제1장 시간을 달려서 (3)

한 주 만에 외조부모님 댁을 다시 찾게 되었다.

차에서 내려 웅장한 단독주택을 보고 있자니 지난 일주일이 엄청 길게만 느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꼽자면, 김지원 오빠의 기흉을 응급처치하고, 학급에선 반장이 되었으며 막 동생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민학생으로 겪을 수 있는 풍파란 풍파는 다 겪은 느낌.

사건이 나를 쫓는가.

내가 사건을 몰고 다니는 건가.

이제는 두 가지가 분간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믿음아, 가자.”

“네, 엄마.”

나는 어머니 곁에서 걸으며 어머니의 배를 바라보았다.

임신 초기라서 그런지 어머니의 배는 평상시와 똑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동생을 원했던 내게 드디어 동생이 생긴다라…….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지만, 이상하게도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다.

회귀 전에는 동생이 없었으므로 나는 동생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었다.

회귀의 이점 없이 형이나 또는 오빠로서 동생을 잘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회귀에만 의지해선 안 된다.

결국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가는 건 내 의지와 끈기 그리고 집중력이어야만 한다.

회귀는 한 번 더 주어진 기회일 뿐.

회귀 자체를 만능열쇠라고 착각하면 곤란했다.

나는 그렇게 마음먹으며 끈적하게 달라붙는 걱정들을 떨쳐 냈다.

“어서들 오렴.”

현관에 들어서자, 외할머니가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 뒤에서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

저번 주 살얼음 위를 걷는 듯했던 위태로움이 오늘은 전혀 없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할머니.”

“그래. 믿음이도 잘 지냈니? 엄마한테 들었다. 또 반장을 했다면서?”

“저는 하기 싫은데 자꾸 친구들이 추천해서요.”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걸 우리 믿음이는 척척 해내는구나.”

할머니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쓸어 주었다.

우리 세 가족은 부엌으로 이동해서 외조부모님과 점심 식사를 같이했다.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시간 속에 켜켜이 쌓였던 앙금과 오해를 푼 외가와 우리 가족은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 아직도 담배 피우세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노골적으로 물었다.

“요즘은 안 피운단다. 믿음이랑 담배 끊기로 약속했으니까.”

“할아버지, 최고예요!”

“할아버지도 담배 끊었으니까 믿음이도 꼭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네, 저도 꼭 약속 지킬게요.”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믿음이 덕분에 네 아빠가 기관지 확장증 진료 받았던 거 알지?”

할머니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박수를 치며 화제를 돌렸다.

“맞아. 저번에 통화했잖아.”

“단순히 금연하러 갔는데, 병을 발견할 줄 누가 알았겠니?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벌렁해.”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병원을 찾았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곤봉지와 가래.

잘 때 더 심해지는 기침.

이 세 가지로 할아버지의 기관지 확장증을 예상했던 내 진단이 딱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지금부터 금연을 하고 생활습관을 잘 관리하다면.

할아버지는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으리라.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나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이제 외가 쪽 숙제를 단 하나만 남겨 놓고 있었다.

먼 미래에 다가올 IMF에 외가의 사업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

“할아버지.”

“왜? 우리 강아지.”

“학교에서 직업에 대해 알아 오라는 숙제를 내줬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자세히 알고 싶어요.”

“그럼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안방으로 갈까?”

“좋아요!”

나는 할아버지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이 전쟁터처럼 보인 것은 아마 단순한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안방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다가올 사업의 망조와 혈투를 벌여야 했다.

서걱. 서걱.

미리 준비해 놓은 수첩에 메모하며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동근 전산.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할아버지의 회사였다.

증조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회사였으나 회사의 덩치를 키운 것 순전히 할아버지의 능력 덕분이었다.

“할아버지 회사에 일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어요?”

“한 팔십 명 정도 있단다.”

“와, 진짜 많네요?”

“믿음이도 커서 할아버지 회사 들어올래?”

“그러고 싶은데, 저는 의사 선생님이 되어야 해요.”

“아, 참 그걸 깜빡하고 있었구나.”

허허허, 웃는 할아버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나는 할아버지 회사에 대한 정보를 쏙쏙 빼냈다.

동근 전산은 은행권에 서버 제공 및 서버 관리를 하는 회사다.

그밖에도 홈페이지 제작 및 관리, 프로그래밍 개발, 서버 관리 등등의 일을 처리하는 제법 큰 규모의 중소기업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튼실한 회사가 IMF 때 쫄딱 망했을까.

할아버지와 대화를 계속하면서 나는 그 흐릿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천생 사업가였다.

도전을 좋아하고, 회사의 활동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을 보람으로 삼고 있었다.

아마 IMF 때쯤 대출을 받아서 크게 투자했다가 도산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불운하게도 시대의 역풍을 정통으로 맞아 버린 것이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앞으로 무슨 사업을 하고 싶으세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물었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병원 시스템 개발로 사업 방향을 돌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앞으로 몸담게 될 신원대학교 대학병원의 전자의무기록을 전담하기를 바랐다.

현시점은 EMR, 즉 전자의무기록의 태동기이자 군웅할 거의 시기였다.

병원들은 자체적으로 EMR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그 속도는 무척 더디기만 했다.

현직 의사들조차 키보드로 차트를 작성하는 것보다 수기 작성을 선호할 정도였고.

하지만 머지않아 시대의 흐름은 바뀐다.

종이는 사라지지만, 시스템과 서버는 영원히 남는다.

OCS(Order Communication System)로 인한 처방은 편리하고 간략해질 것이다.

PACS(Picture Archiving Communication System)로 인해 인턴들은 더 이상 엑스레이와 CT 사진을 들고 뛰지 않게 될 것이다.

때는 아직 늦지 않았다.

회사의 규모와 할아버지의 추진력,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학연까지.

신원대학교의 병원 시스템을 접수하기엔 충분한 조건들이 갖춰져 있었다.

만약 사업의 방향을 바꾸기만 한다면 할아버지는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가 없었다.

“글쎄, 지금은 생각 중이란다.”

“할아버지, 제가 병원에 견학 간 적이 있었는데요.”

“간 적이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들이 막 사진 같은 걸 들고 사슴처럼 뛰어다녔어요.”

나는 계속해서 순진한 아이 포지션을 잡았다.

내가 제아무리 전생에 흉부외과 교수였다고 한들 현재는 국민학생의 몸이었다.

설득이라는 방식으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동심과 상상으로 할아버지를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내 스토리텔링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음을 깨닫고 화룡점정을 찍을 준비를 했다.

“의사 선생님들이 고생 안 하게 모든 걸 컴퓨터로 처리하면 좋겠어요. 종이를 쓰면 그걸 보관하고 찾는 데 귀찮고 오래 걸리잖아요.”

“…….”

“기록이나 사진 같은 것도 그렇고요.”

“…….”

“병원 선생님들이 너무 불쌍하고 힘들어 보여요. 종이 나르는 시간에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봐야 하는데…….”

“…….”

“저도 의사가 되면 그래야겠죠?”

나는 최대한 시무룩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스토리텔링의 마침표를 연기로 찍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내 말에 꽤 영향을 받은 모양새였다.

최근 직접 병원에 다녀오시기도 했으니 사업가 마인드로 내 말에 사업성을 판단하고 계시지 않을까.

할아버지의 침묵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깨질지 나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 * *

“병원 시스템의 전산화라… 좋은 발상이긴 한데 말이야.”

“…….”

“할아버지는 병원 전산 시스템 쪽으로는 관심이 없단다. 지금 뛰어들기엔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고. 소문을 듣자 하니 대학 병원은 다 자체적으로 진행 중이라고 하던데…….”

할아버지가 턱을 쓸어내리며 길었던 침묵을 깨트렸다.

스토리텔링이 완벽했다고 믿었으나 할아버지는 호락호락하질 않았다.

하나도 안 늦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대학 병원들도 이제 막 EMR에 눈을 뜬 시기란 말입니다. 맨땅에 박치기를 하는 중이라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나는 간신히 참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설득은 나의 미덕이 아니었다.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래. 믿음이 네겐 어려운 이야기지.”

“종이 나르는 것도 의사 선생님이 해야 하는 일이면 해야죠. 저 잘할 수 있어요. 다리 튼튼해요.”

나는 재차 할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번 말은 꽤 효과가 좋았는지 할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할아버지가 연민을 느끼도록 하는 작전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눈치였다.

의사가 된 손자가 엑스레이 기록지 같은 걸 들고.

병원 계단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프긴 하실 테니까.

“하… 우리 강아지가 그렇게 말하면 할아비 마음이 너무 아픈데?”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어쩔 수 없다라… 그럼 할아버지가 한번 알아는 보마. 할아버지가 신원대학교 출신이니까 적어도 신원대학교 병원 시스템이라면 건드려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구나.”

“…….”

“이 기회에 사업 범위를 넓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할아버지가 기어이 백기를 들었다.

아직 사업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의 회사 정도면.

신원대학교 병원에서 지원을 탐낼 만했다.

나는 그제야 십 년 묶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럼 제가 의사 선생님이 됐을 때는 안 뛰어다녀도 되나요?”

“녀석도 참. 그새 표정이 밝아졌구나.”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어머니를 통해 할아버지의 사업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할아버지의 회사가 신원대학교 병원과 제휴를 맺고 EMR 및 차기 병원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 *

“하아아암.”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 새벽까지 영어 공부를 한 탓에 몸이 찌뿌드드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해 온 영어 말하기와 듣기가 슬슬 물이 올랐다.

요즘은 꿈속에서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잦았다.

내 발음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의사소통을 하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아주 먼 훗날이 되긴 하겠지만, 제임스 홉킨스 흉부외과에 갈 수 있는 2년짜리 연수는 내 것이 되리라.

전신 스트레칭을 하고 거실로 나왔다.

오전 6시.

가족들이 잠든 집 안에는 적막과 고요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조용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마주 본 거울 속에는 키 180센티에 피부가 곱고 인상이 좋은 남학생이 서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나는 전생과 달리 키도 크고 잘생긴 외모로 성장했다.

가정환경이 외모에 끼치는 영향이 이렇게 큰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런, 면도를 안 했네.

비누로 거품을 내고 면도칼로 수염을 살살 밀었다.

한층 더 깔끔해진 외모.

한동안 나는 거울 속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한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계절.

나는 어느새 수능을 두 달 앞둔 고3 수험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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