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26화 (26/257)

26화 제1장 시간을 달려서 (1)

“형! 형! 정신 차리세요.”

나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하며 김지용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김지용의 옷자락 상의를 슬며시 끌어내렸다.

제2늑간의 쇄골 중앙선.

천자를 해야 할 부위가 줌인한 것처럼 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흉관 삽관이나 천자(punction, 침이나 바늘로 찌르는 처치)는 질릴 만큼 많이 했지만, 볼펜으로 처치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치를 몰래 해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전직 흉부외과 교수였던 나조차 이런 상황은 긴장되고 떨렸다.

모든 환경이 매몰차게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해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생의 아버지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붙잡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닌가.

육신이 국민학생이라고 해서 그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한 번에 간다.

결연한 눈빛으로 천자 부위에 시선을 모으고

볼펜을 쥔 손에 가득 힘을 담은 나.

“형, 빨리 일어나요. 지원이가 걱정하잖아요. 빨리요!”

나는 오열하는 척하며 김지용의 상반신 위로 절을 하듯이 엎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내 처치를 못 알아보도록 하는 일종의 연막이었다.

또한 볼펜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가렸으니 위나 옆에서 보더라도 내 처치는 들키지 않으리라.

이제 남은 숙제는 오직 정확한 천자뿐이었다.

목표는 김지용의 오른쪽 제2늑간의 쇄골 중앙선.

김지용이 우측 가슴을 쥐고 실신했으니 기흉이 발생한 것도 우측 폐일 것이다.

푸우우욱!

날카로운 볼펜 끝이 살갗을 뚫으면서 톡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이 선명하면서도 청량한 느낌을 모를 리 없었다.

볼펜 끝이 늑막을 관통하며 구멍을 내는 느낌을.

검사할 필요도 없이 천자는 성공이었다.

‘역시, 제대로 뚫었다!’

볼펜을 쥔 오른손을 가리고 있던 왼손에서 희미한 바람이 느껴졌다.

늑막에 고여 있던 공기가 볼펜 자루를 통해 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자 손에 느껴지는 바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 처치로 인한 감염의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폐가 찌부러지는 것을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김지용이 119에 이송되어 병원에 가면 당직의가 처치를 해 줄 테고.

“어라? 저기 119 온 거 아니에요?”

쥐도 새도 모르게 천자를 마친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일행들의 시선을 유도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과연 일행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창가를 바라보았다.

기회는 바로 지금!

나는 다급하게 피 묻은 볼펜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흐트러졌던 김지용의 옷자락 상의를 추슬렀다.

천자를 시행한 부위에 맺힌 작은 구멍과 핏방울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것으로 완전 범죄가 아닌 완벽 처치가 이루어졌다.

그제야 길게 잡아당긴 것처럼 팽팽했던 긴장감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살다 보니 처치를 도둑처럼 몰래 해야 하는 일도 있구나.

“죄송해요. 제가 잘못 봤나 봐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소매로 식은땀을 닦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처치가 성공했으므로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천자를 통해 늑막에 고인 공기를 모두 빼냈다.

폐의 압박이 줄어들면서 긴장성 기흉은 안정성 기흉으로 변할 것이고.

이제 119가 도착해서 김지용을 병원에 싣고 가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역시 아무도 눈치 못 챈 모양이네.’

나는 김지원과 김지원의 어머니, 까불이와 김요한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들은 내 처치를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하긴 알았다면 벌써 나를 미친놈 취급을 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재치를 발휘하며 사람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

스스로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때마침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렌.

응급의학과 인턴일 때는 한숨부터 나오게 만들었던 소리가 지금은 구세주의 알람처럼 들렸다.

나는 누구보다 먼저 현관문을 열고 나간 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문을 열었다.

“아저씨! 이쪽으로 빨리요!”

* * *

목동 시가지에 위치한 100병상급의 재율 병원.

응급의학의 임태호는 흉관 삽관술을 마치고 침상에 누운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0분 전, 119에 이송되어 온 중학생은 한눈에 봐도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실신 상태였던 데다 극심한 저혈압에 저산소증으로 인한 청색증을 보였다.

거기에 10대에 마르고 키가 큰 용모까지.

모든 정보들이 단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급하고 초조해진 그는 청진기로 정확한 진단에 나섰다.

귓가에 들리는 선명한 공명음(tumpanic sound), 걱정했던 대로 긴장성 기흉이었다.

“이 선생님, 흉관 삽관 세트 챙겨 주시고 옆에서 어시스트 좀 해 주세요.”

“네, 선생님.”

긴장성 기흉을 확진한 그는 엑스레이 촬영 없이 흉관 삽관에 나섰다(긴장성 기흉은 응급의 경우 흉부 엑스레이를 건너뛰기도 한다. 진단보다 처치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건…….’

흉관 삽관을 준비하던 중 임태호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긴장성 기흉치고는 환자 상태가 너무 양호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우측 제2늑간의 쇄골 중앙선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 자리는 긴장성 기흉 환자의 늑막 압력을 줄이기 위해 천자하는 부위였다.

그러니까 중학생 환자가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저 사소해 보이는 구멍 때문이었던 셈이다.

그 구멍 덕분에 임태호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흉관 삽관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 저희 지용이는 어떤가요?”

환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보호자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처치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금방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혹시 아드님이 기흉인 걸 아셨나요?”

“기흉이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렇군요. 기흉은 평소에는 잘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발견되기도 하죠.”

임태호는 보호자에게 기흉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환자가 정상으로 돌아오더라도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혹시 집 안에 의사가 있었나요?”

“의사요? 저랑 아이들밖에 없었어요.”

“흐음… 이상한 일이네요. 제일 중요한 응급처치가 이미 되어 있었거든요. 아마 그 응급처치가 없었다면 아드님은 정말정말 위험했을 겁니다.”

긴장성 기흉은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응급 질환이었다.

오죽하면 진단에 꼭 필요한 흉부 엑스레이마저 생략할까.

“솔직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이가 쓰러지고 난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서…….”

보호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해서 임태호는 더 수수께끼에 빠졌다.

의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응급처치가 병원 이송 전에 이루어졌는데.

정작 그 처치를 한 사람이 없다니.

그의 시선은 곧 보호자에서 보호자 옆에 있는 아이들에게 머물렀다.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였는데 국민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의사 같은 처치를 할 리는 없었다.

그럼 처치를 한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임태호는 의문을 풀기 위해 아직 복귀하지 않은 구급 대원을 불렀다.

“저기, 혹시 선생님들이 환자 가슴에 구멍을 냈나요?”

“네? 그럴 리가요. 그건 저희가 하면 안 되는 처치잖아요.”

“그럼 누가 한 거죠?”

“저희도 모르겠어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니까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구급 대원.

임태호는 자신도 구급 대원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환자의 어머니를 불러 다시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똑같은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집 안에 있던 어른은 환자의 어머니 한 명뿐이었고.

환자의 어머니는 의료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가 아니면… 설마 집에 있던 국민학생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처치를 했으려고요.”

환자 어머니의 확신에 찬 말에 임태호는 더더욱 미궁에 빠졌다.

처치를 했는데, 처치한 사람이 없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마도 이번 사건은 그의 의사 인생에서 평생 남을 미스터리가 될 것 같았다.

* * *

흉관 삽관술을 받은 지 15분 만에 김지용은 의식을 되찾았다.

김지용은 병원에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했으며, 김지원과 김지원의 어머니는 그런 김지용을 보고 펑펑 울었다.

‘휴, 다행히 한고비 넘겼구나.’

평화를 되찾은 세 가족을 지켜보며 나는 그제야 안심했다.

12살이 된 지금까지 숱한 위기를 겪어 왔지만, 오늘만큼 위태로웠던 적은 없었다.

김요한 때만 해도 따지고 보면 내가 했던 처치는 심폐소생술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처치는 당시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설프게나마 진짜 의사들만이 할 수 있는 처치를 해냈다.

그것도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몰래.

김지용을 살리는 데 성공했지만, 나는 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천운이 따랐음에 감사했다.

볼펜을 찌른 깊이가 조금이라도 더 깊었다면.

볼펜의 방향이 조금이라도 틀어졌다면 나는 오히려 김지용의 저승사자가 됐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나는 처음으로 내가 국민학생이라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국민학생의 신분으로 병원 밖에서 몰래 치료하는 일은 한계가 명확했다.

오늘만 해도 청진기가 없어서, 흉관 삽관 세트가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던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누가 뭐래도 병원이었다.

병원에서 일할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괜히 놀러 온 믿음이한테 피해를 끼쳤구나. 미안하다. 다음에 놀러 오면 맛있는 거 잔뜩 사 줄게.”

김지원의 어머니가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까불이와 김요한은 119가 온 뒤 내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오직 나만이 응급실까지 따라왔던 것이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형이 무사해서 기뻐요.”

“우리 믿음이는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구나. 의사 선생님이 하루 동안 더 지켜보자고 하시는데… 믿음이도 피곤할 텐데 먼저 가 봐야겠는걸?”

“우리 아빠가 병원 근처에 도착했대. 아빠 차 타고 가면 돼.”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지용이 형이 앞으로도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고맙다. 믿음아.”

응급 상황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린 나는 김지원과 함께 병원을 나왔다.

“흐흐흐흑.”

병원 바깥으로 나온 김지원이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내색을 안 했을 뿐,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을 뿐.

김지용이 쓰러지고 난 다음부터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지원아, 괜찮아?”

나는 서럽게 우는 김지원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나야 볼 것, 못 볼 것 다 본 흉부외과의였지만 김지원은 그저 또래의 국민학생일 뿐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응. 미안. 갑자기 무섭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기분도 들어서.”

“가족이 갑자기 쓰러지면 누구라도 그럴 거야. 나라고 해도. 그러니까 눈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고마워. 근데 믿음이 너는 말을 참 잘하는 것 같아.”

“그걸 이제 알았어?”

내 농담에 김지원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도, 사람을 울게 만드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전생의 나는 내 어리석음으로 수많은 사람을 놓쳤지만.

이번 생의 나는 내가 놓쳤던 사람들을 내 손으로 붙잡을 것이다.

“지용이 형은 금방 좋아질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나도 믿을게. 저기 우리 아빠 차 온다. 아빠!”

김지원이 방금 막 주차장에 들어서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국민학생의 몸으로 흉강 천자를 한 스펙터클한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김지용이 긴장성 기흉으로 쓰러진 지 나흘이 지났다.

김지원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김지용은 이제 건강하다고 했다.

다만 기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평소보다 조심하면서 지내는 중이라고 전해 왔다.

그쯤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김지원이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된 이유는 아마 김지용이 긴장성 기흉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또한 김지용의 죽음은 김지원의 배우 생활과도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까지 김지원은 아역 배우로서 크고 작은 역할을 맡아 왔다.

하지만 전생에서의 그녀는 언젠가부터 TV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시작했다.

가족을 갑작스레 상실한 우울함 때문에.

제 꿈을 접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런 쪽으로도 충분히 추측을 해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김지용을 구하면서 김지용과 김지원, 그녀 부모의 인생은 전생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그 모든 게 나만 아는 이야기였으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인생이란 본디 나만 아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니까.

내가 알고 있으므로 미리 준비해 바꿔 나갈 운명들.

내가 알지 못함에도 순발력으로 바꿔 나갈 운명들.

내가 손을 대면서 바뀌어 나갈 운명들.

앞으로 수많은 운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그 운명들을 기꺼이 헤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십여 년의 질곡을 거슬러 한 살부터 새 삶을 시작해 온 나는 흉부외과 서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