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제4장 마지막 숙제 (5)
국어 수업이 한창인 오후 시간.
창가로 따뜻하고 나른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운동장에 소복하게 쌓였던 눈은 포근한 날씨에 그만 녹아 흔적을 감추었다.
창가를 훔쳐보던 내 눈동자가 방향을 바꿔 김지원에게 머물렀다.
현생의 나는 김지원과 유치원 때부터 인연을 맺어 왔다.
하지만 전생의 나는 김지원과 손톱만큼의 인연도 없었다.
전생의 나에게 김지원은 빛나는 아이였다.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눈부신 존재였다.
외모는 예쁘장하고 성격은 활발했으며, 학생과 선생님 모두 김지원을 좋아했다.
나조차 김지원을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전생을 되짚어 보아도 이상하게 김지원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
그것은 그녀가 6학년이 끝날 때쯤 전학을 간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전학 가는 이유 따위는 몰랐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몰랐는데, 선생님은 집안일로 인한 전학이라고 얼버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육의 이유.
또는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 이유라면 막을 수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막아 주고 싶었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서 8년을 알고 지내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고 할까.
딩동댕동~.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믿음아, 오늘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며칠 전에 엄마, 아빠가 게임기 사 줬다.”
김지원이 자랑하듯 말했다.
오늘 등굣길에 김지원의 오빠를 만나서 이미 들은 이야기였다.
“와, 진짜 집에 게임기가 있어?”
앞자리에 앉았던 까불이가 번개처럼 몸을 돌려 물었다.
“응. 삼성 겜보이.”
“부럽다. 야, 이비듬. 나 데리고 갈 거지?”
“왜 나한테 부탁 안 하고 믿음이한테 부탁해?”
“내가 간다고 하면 싫다고 할 거잖아. 그러니까 믿음이를 꼬드겨야지. 넌 믿음이 말이라면 껌뻑 죽잖아?”
“꼭 그런 건 아니거든?”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겠지.”
어김없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나는 김지원의 집에 놀러 가겠다고 말했다.
영어 스피킹, 리스닝 공부에 신물이 나는 요즘이었다.
하루쯤은 일탈 아닌 일탈을 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놀지 않고 공부만 하면 바보가 된다.
그런 말이 언젠가부터 유행했는데, 전생의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놀 줄을 몰라서 매사에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했다.
“근데 요한이도 데려가도 돼?”
“요한이? 그래.”
김지원이 흔쾌히 허락했기에 나는 뒷자리에 앉은 김요한에게 다가갔다.
얼마 전 페이스메이커 삽입술을 받은 김요한은 그림을 그리며 주변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밝고 쾌활하고 건강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내가 원하던 또래 아이의 모습 그 자체였다.
김요한을 볼 때마다 나는 자긍심으로 뿌듯해졌다. 나는 의사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요한아, 수업 끝나고 지원이네 겜보이 하러 갈래?”
“게… 겜보이?”
김요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때만 해도 컴퓨터는 언감생심이고 집에 오락기를 가진 아이도 드물었기에 김요한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게임기 가격만 12만 원에 육박했고, 카트리지 팩 가격은 하나당 2만 원에서 5만 원에 육박했으니까.
“무조건 가야지.”
“그럴 줄 알았어. 나랑 까불이랑 같이 가자.”
“고마워.”
자리로 돌아온 나는 한 손으로 연필을 굴렸다. 오늘은 유난히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루했다.
* * *
수업이 끝난 후 까불이, 김요한과 함께 김지원의 집을 찾았다.
“우와, 너희 집 되게 좋다.”
“진짜 멋있고 화려하네.”
정원을 통과해 단독주택 현관에 들어서자, 까불이와 김요한이 감탄하며 입을 딱 벌렸다.
김지원의 집에 몇 번 놀러 갔던 나는 딱히 감탄할 이유가 없었다.
고풍스러운 외갓집도 이미 다녀왔고.
“다녀왔습니다. 엄마.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요.”
“그래, 어서들 오렴.”
김지원의 어머니가 현관에서 우리를 반겼다.
김지원의 어머니는 우아한 귀부인의 분위기를 풍겼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집에서 입기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했고, 착용하고 있는 귀걸이와 목걸이는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믿음이는 오랜만이네?”
“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얼마 전에 반 친구를 구했다고 기사에 나오던데. 못 보던 사이에 대견한 일을 했구나.”
“아니에요. 그냥 운이 좋아서…….”
“운이 좋다니 기특하기도 해라. 어쨌거나 앞으로는 자주 놀러 오렴. 사실은 말이야 게임기도 지원이가 너 때문…….”
“엄마!”
김지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호호호. 우리 딸, 그렇게 성낼 필요 없잖아? 엄마도 다 알아들었어. 다 같이 사이좋게 거실에서 놀고 있으렴. 간식 준비해 줄게.”
김지원의 어머니가 물러가고, 우리 셋은 거실에서 겜보이를 즐겼다.
까불이와 김요한이 특히 게임을 좋아했다.
까불이는 부모님께 게임기를 사 달라고 졸랐다가 크게 혼난 전적이 있었고.
김요한이야 형편이 어려워서 게임기는 꿈도 못 꾸었기 때문이다.
“믿음아, 게임 재밌어?”
게임을 하는 동안, 김지원은 내게 종종 이런 질문을 했다.
김지원 어머니의 말대로 정말 나와 같이 놀고 싶어서 게임기를 사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환생을 한 나는 여기저기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사랑을 준 적이 없으니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사랑을 받은 적이 없으니 사랑을 줄 수도 없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글귀가 뇌리를 스쳤다.
이에 따르면, 내가 이렇게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환생에서 얻은 지식으로 주변 사람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앞으로 나는 내 삶과 내 주변 사람을 어디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까.
내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나조차 궁금했다.
“어. 되게 재미있는데?”
“별로 재미없어 보여서.”
“내가 재밌다고 막 티를 내는 편은 아니니까.”
“그건 그러네. 어쨌든 네가 즐겁다면 나도 좋아.”
김지원이 배시시 웃었다.
게임을 즐기며 김지원의 어머니가 챙겨 준 과일 간식을 먹고 있는데, 김지원의 오빠 김지용이 하교했다.
김지용을 바라보는 나의 눈초리가 가자미처럼 가늘어졌다.
김지용을 보면 볼수록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
“지용이 왔니? 별일은 없었고?”
“오빠, 왔어?”
김지원과 김지원의 어머니가 현관으로 마중 나갔다.
나와 까불이, 김요한도 집으로 들어오는 김지용에게 인사를 했다.
“네, 별일 없었어요. 너희들도 재밌게들 놀아라.”
집에 돌아온 김지용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금방 집을 나갔다.
얼핏 듣기로는 운동을 나간다고 했던 것 같다.
“지원아.”
나는 자리로 돌아온 김지원에게 물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왜?”
“지용이 형, 건강해? 어디 아픈 데 없어? 숨이 찬다거나 가슴이 아프다거나.”
“우리 오빠 건강한데? 병원 한 번도 간 적 없어. 근데 그건 왜 물어?”
“아니. 그냥.”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전직 흉부외과의라는 직업병이 다시 한번 도져서 괜한 노파심에 물었던 것인데.
김지용의 외형과 체격은 기흉에 걸리기에 딱 좋았다.
만약 김지용이 기흉이거나 기흉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면 격한 운동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운동으로 인해 생기는 폐의 기압 차이가 기낭 손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 읽은 논문에 따르면, 온도 변화가 심할수록 기흉이 발병할 확률이 높다는 결과도 있었다.
바로 최근 요 며칠처럼 말이다.
김지용을 향해 무언가 기분 나쁜 조각들이 맞춰지는 느낌을 나는 애써 떨쳐 냈다.
* * *
즐겁고 행복한 예감은 왜 들어맞는 적이 없을까.
불길하고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을까.
쿵!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김지용이 현관 앞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나는 머리카락이 곤두선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오늘에서야 몸소 체험했다.
위기를 감지한 심장이 요동치고 입 안은 바싹 말라 갔다.
“오빠!”
“지용아!”
게임을 구경하던 김지원과 바느질을 하던 김지원의 어머니가 총알처럼 뛰쳐나갔고.
나와 까불이, 김요한이 그 뒤를 따랐다.
“가슴이… 너무… 아파요. 숨도 쉬기 힘들고…….”
김지용은 한 손으로 오른쪽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니? 빨리 병원 가자.”
김지원 어머니의 재촉에 김지용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주머니, 119에 전화부터 해 주세요.”
“으응? 그래, 그게 좋겠구나.”
내 지적에 김지원의 어머니가 거실에 있는 집 전화기를 들었다.
김지원은 김지용 곁에서 눈물을 글썽거렸고, 까불이와 김요한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난리 통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역시…….’
증상으로 놓고 보아도, 여러 정황을 조합해 보아도 김요한은 기흉이 확실해 보였다.
문제는 기흉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는 점이었다.
기흉은 자연성 기흉, 외상성 기흉, 긴장성 기흉으로 분류되며, 기흉의 분류에 따라 치료법이 미묘하게 달랐다.
“형, 괜찮아요?”
정확한 진단을 위해 나는 김지용에게 다가갔다.
청진기만 있으면 진단에 골머리를 썩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병원도 아닌 가정집에 청진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상태를 물으며 살핀 김지용의 가슴 앞섬은 멀쩡했다.
외상성 기흉, 나아가서 심장압전(심장눌림증) 정도는 배제해도 될 것 같았다.
경동맥을 촉진해 보니 맥박이 무척 약하게 뛰었다.
김지용의 얼굴은 갈수록 퍼렇게 질려 갔으며 거칠었던 숨소리가 차차 꺼져 갔다.
김지용의 예후는 분초를 다투며 심각해지고 있었다.
“형, 형. 정신 차려요!”
내가 어깨를 흔들어 보아도 김지용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예 실신해 버린 것이다.
내가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국민학생의 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마냥 원망스러웠다.
“믿음아, 나한테 했던 것처럼 가슴을 누르면 안 돼?”
잠자코 있던 김요한이 한마디 했다.
나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쓰러진 사람의 의식이 없다고 다짜고짜 흉부 압박을 하는 건 세상 미련한 행동이었다.
흉부 압박은 심장이 뛰지 않을 때.
그러니까 맥박이 촉지되지 않을 때만 펼쳐야 하는 것이다.
심장이 멀쩡하게 뛰는 사람에게 흉부 압박으로 심장을 짓누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의식을 잃을 정도면 긴장성 기흉이 제일 의심이 가는데…….’
나는 평정심을 되찾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긴장성 기흉이란 기흉 중에서도 예후가 가장 안 좋은 기흉이었다.
늑막 사이를 오가야 하는 공기가 늑막에 머물면서 폐를 찌그러트리는 기흉이었다.
김지용이 긴장성 기흉이라면 설령 119가 도착한다고 해도 그를 살리진 못할 것이다.
도착 전에 김지용의 폐는 이미 짜부라져 있을 테니까.
똑딱. 똑딱. 똑딱.
머릿속에서 급박한 시계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김지용의 생명이 줄어드는, 나의 응급처치를 재촉하는 소리가.
‘의식을 잃고 실신할 정도면 긴장성 기흉이 맞을 텐데…….’
나는 초조함에 다리를 떨었다.
이곳이 병원이고 내가 의사라면 나는 김지용을 어렵지 않게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흉관 삽입술로 늑막에 고인 공기를 빼 주면 되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국민학생이고, 이곳은 가정집이며.
주변에는 김지원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
무언가를 시도해 보기엔 상황이 너무 열약했다.
-그래서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만 있겠다고? 몸만 국민학생이지 넌 엄연한 흉부외과 교수잖아. 무슨 수라도 써야지. 네가 되고 싶었던 의사가 환자를 포기하는 의사였던 거야?
내면의 자아가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김지원의 방으로 이동해 볼펜을 손에 쥐었다.
볼펜 속을 제거한 뒤 안간힘을 써서 볼펜을 반으로 쪼갰다.
뽀각.
손가락으로 쪼개진 불펜 끝을 만져 보니 뾰족하기 그지없었다.
‘잘 해내야 할 텐데…….’
긴장성 기흉의 응급 처치법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제2늑간의 쇄골 중앙선을 날카로운 물건으로 찌른다.
그 구멍을 통해 늑막에 고인 공기를 빼내 폐의 압력을 줄여 준다.
문제는 그런 처치를 하도록 주변에서 나를 가만히 놔둘 것이냐는 것이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볼펜 끝으로 냅다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국민학생을 누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그런 우려와 걱정은 일단 뒤로 미뤄 두기로 했다.
우선 사람을 살리고 볼 일이었다.
‘망설일 시간도 부족하다. 무조건 그리고 빨리 해내야만 해.’
각오를 굳힌 나는 김지용에게 접근했다.
볼펜으로 완벽하게 천자를 성공시킬 것.
동시에 그 천자를 주변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것.
내겐 풀어야 할, 힘겨운 숙제가 두 가지나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