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85화 (285/293)
  • 285.

    필리프 왕은 에드워드를 맞으러 일어났다가 뒤따라오는 나를 보고 놀랐다.

    내 존재 때문은 아니었고, 얼굴 때문인 것 같았다. 아마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조프리? 무슨 일이 있었니?”

    “아니요, 그냥 좀 황당한 일을 겪어서…….”

    “성안에서? 누가 그런 짓을 했지? 여기 앉으렴. 차를 내오라고 하마. 아, 에드워드 왕자.”

    왕은 한발 늦게 에드워드를 발견했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에드워드가 신경 쓸 성격도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알아서 의자에 잘 챙겨 앉았다. 내가 그 옆에 앉자, 필리프 왕은 내게 쿠션도 하나 줬다.

    이걸 뭐 어쩌라는 걸까?

    옆에 놓고 차를 받아 마셨다. 그러는 동안 대화가 시작됐다.

    “왕자의 도움에 감사하오. 이 도움이 비스코티의 우애에서 비롯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어찌 우애가 일방으로 향할 수 있겠소? 셔벗이 왕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듣고 싶소.”

    필리프 왕은 전쟁이 끝나면 셔벗에 무엇을 청구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의 물음이 호의적이라 에드워드도 부드럽게 대꾸했다.

    “다만 양국의 항구적인 평화를 원할 뿐입니다.”

    “물론이오. 여부가 있겠소?”

    “또한 그 평화를 보장받고 싶습니다. 셔벗과의 우애를 지키기 위해, 또 감히 모시는 주인에게 불충한 죄인들을 처단해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출전했으나, 전쟁이 길어지는 것은 비스코티의 훌륭한 시민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의심과 유언비어로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동맹은 원치 않습니다.”

    보장을 어떻게 받겠다는 거지?

    필리프 왕은 난처한 듯 턱을 만졌다. 나는 의아해서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에드워드가 방긋 웃었다.

    귀엽다. 아니, 너 무슨 생각이야?

    “안타까운 일이군. 내게 딸이 있었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그대와 같은 영웅과 맺어 주었겠지만, 왕실에 그대의 지위에 맞는 혈족이 없소.”

    필리프 왕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는 결혼 동맹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까운 왕실 가족이라면 스프라우트 공녀가 있었지만,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비스코티 왕실과 사돈 맺을 기회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되물었다.

    “있지 않습니까?”

    그가 나를 쳐다봤다.

    어?

    필리프 왕의 눈이 커졌다.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친 걸까?

    필리프 왕은 이성적으로 대답했다.

    “비스코티 왕실에도 공주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군. 방계라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파이 공작에 의한 반란이 있었습니다. 반역자의 딸을 동맹의 증표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비스코티인들은 어떤 훌륭한 공녀와 맺어지더라도 환영하지 않을 겁니다. 시민들을 안심시키기는커녕 불만만 팽배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안 좋은 예시가 있기 때문이다.

    필리프 왕이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어 놓고, 에드워드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라면 다릅니다. 조프리가 비스코티 왕실 가족이 된다면 시민들의 불안도 진정될 테니까요.”

    아니…….

    필리프 왕이 얼빠진 어조로 말했다.

    “비스코티인들이 왕자를 환영하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데.”

    “폐하의 믿음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사실이니까요.”

    “…….”

    아니!

    에드워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조프리. 간지러워.”

    좀 조용히 말해!

    “내가 청혼하겠다고 했잖아.”

    “네가 언제 그랬어?”

    그가 눈을 깜빡였다.

    “맞아. 하겠다고는 안 했네. 청혼했지.”

    “…….”

    청혼은…… 했지만!

    그걸 청혼이라고 말해야 하나?

    에드워드는 이제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조프리, 나랑 결혼하면 좋은 점이 많아.”

    “뭔데?”

    “언제든 이혼할 수 있어.”

    “…….”

    그게 뭐가 좋은 점이야?

    청혼하면서 ‘이혼할 수 있다’를 장점으로 드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야 보통 왕족은 이혼이 힘들지만. 내가 이혼을 원하면 뭘 어떻게 해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방에 공기가 부족한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난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안 하잖아. 이제는 못 해.”

    “…….”

    짠하게 그런 소리를 해도…….

    “……조프리?”

    맞은편을 보니 필리프 왕이 넋을 놓고 있었다. 내가 어디 앉아 있었는지 자각되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에드워드가 그를 향해 말했다.

    “셔벗과 비스코티 양국은 내란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고, 무엇보다 믿을 만한 동맹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비스코티에 셔벗을 도울 명분을 만들어 주시길 청합니다.”

    “고려해 보겠소.”

    “예.”

    그리고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따라서 일어날 수 없었는데, 필리프 왕이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조프리, 잠깐 대화 좀 하겠니?”

    “네…….”

    에드워드는 한시도 나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이번에는 그냥 나가 버렸다. 쟤는 문제를 일으키면 일단 사람 얼굴을 안 보려고 한다.

    내가 일으킨 문제도 아닌데 필리프 왕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조프리, 괜찮니?”

    뭐가 괜찮으냐는 건지 모르겠다. 내 정신머리가?

    반쯤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긴 했다.

    “에드워드 왕자 말이다. 너와 형제처럼 자라 왔다는 건 알고 있어. 소문대로 대단한 기사더구나.”

    “네…….”

    “그리고 소문대로 폭력적이야.”

    어?

    좋은 평가가 아니다.

    그야 에드워드가 외부에 좋은 인상만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명색이 셔벗의 구원자 아닌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에드워드 왕자가 야심만만한 폭군이라는 얘기를 들었단다. 그래서 너를 셔벗에서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괜찮니?”

    괜찮으냐는 건 내 상태를 묻는 게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괜찮은 인간이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저렇게 경계를 살 만큼 에드워드가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포로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부류의 사람이야. 믿을 만한 상대인지 모르겠구나.”

    결혼 동맹 상대가 동성이라는 것보다 에드워드라는 게 더 문제라는 투였다.

    에드워드가 그렇게 문제가 있나?

    사실 결혼 시장에서 에드워드는 더 바랄 데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조프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신분을 떼고 봐도 에드워드는 눈에 띄는 장점이 많았다. 입을 열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하긴 해도,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웬만한 헛소리는 용납 가능하지 않나…….

    “에드워드는 약속은 잘 지켜요.”

    “그러니?”

    “에드워드가 여기까지 온 것도 약속 때문이에요. 제가 필요로 할 때 돕겠다고 했거든요.”

    “그래…….”

    “포로를 때린 건 잘못했지만, 폭력적이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성격이 솔직하거든요. 착해서 제가 욕먹는 건 못 보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천성이 나쁜 애는 아니에요.”

    변명이 됐나?

    필리프 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조프리. 그러니까, 네가 누구랑 연애하든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알고 있지?”

    어?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성품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아니란다. 그래……. 나가 보렴. 나는 좀 더 생각을…….”

    “…….”

    내 변명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깨달았을 땐 늦었다. 복도로 나가니 에드워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프리.”

    그가 손을 내밀었다.

    무시하고 혼자 걸으려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뿌리칠 수는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는데 화는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였다. 난 얘한테 왜 이렇게 약할까?

    에드워드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물었다.

    “화났어?”

    내가 화나지 않았다고 했나?

    에드워드의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불끈했다.

    “왜 그랬어?”

    “…….”

    에드워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허공을 보는 게 보였다.

    “거짓말하지 말고.”

    “말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거짓말 생각하고 있었냐?

    “뭐에 좋은데?”

    “셔벗 왕이 네 결혼 상대를 안 찾게 만들 수 있고. 널 쓸데없는 무도회에 내보여서 네게 반한 사람들이 네 주위를 맴도는 모습 안 볼 수 있고…….”

    기다렸다는 듯 이유가 줄줄 나온다.

    더 있어?

    “……어쩌면 네가 수락해 줄지도 모르고.”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화났어?”

    “어.”

    “…….”

    에드워드는 눈을 피하더니 앞만 보고 걸었다. 내가 화난 건 그가 필리프 왕 앞에서 헛소리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왜 저렇게 자신이 없을까?

    보통 사람은 상대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청혼하지 않는다. 그보다, 누구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반란군을 토벌한다거나 다른 나라 전쟁에 끼어드는 일도 안 한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처럼 굴면서 내 앞에선 왜 자꾸 불안해하는지 모르겠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든다.

    에드워드는 나를 꽤 좋은 사람처럼 착각하지만, 확실히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마 이기적이고 대책 없는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손을 뻗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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