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84화 (284/293)
  • 284.

    “하지만 조프리. 네가 이상하잖아.”

    “뭐가?”

    되묻고 후회했다. 나한테 안 좋은 대답이 나올 것 같다.

    “나를 의식하는 것 같아. 내가 어리석은 희망을 품게 만들어.”

    “…….”

    “그럴 리가 없는데.”

    “왜 그럴 리가 없어?”

    뭘 묻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넌 눈이 없어?

    멀쩡히 달린 눈 두고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설령 눈을 감고 있대도 손을 맞잡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다.

    온몸이 뜨겁고 피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멋대로 손끝이 떨려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신경 쓰이면 다들 이런 기분일까? 상대를 보고 항상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물었다.

    “셔벗 왕에게 뭘 약속했어?”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에드워드에게 비스코티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필리프 왕에게 그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둘 다 말했을 때는 진심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뿐이다.

    하지만 내뱉기엔 치졸한 말이었다.

    다들 변명은 그렇게 한다.

    셔벗의 병사들은 내 명령에 따랐다. 내가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도 나를 가로막거나 통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반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내가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셔벗인들은 반란군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인정받았고, 후계자를 앞세운 필리프 왕 아래로 동맹군은 모여들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왕성에 도착한 이래 나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지만 실은 눈치가 비상했다. 금방 상황을 알아챘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수 없다.

    “약속을 어기려던 건 아니었어.”

    변명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변명부터 나왔다. 에드워드의 표정을 보니 입이 절로 움직였다.

    “내가 비스코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상황은 다급했고…….”

    “네가 왜 비스코티로 돌아갈 수 없어?”

    몰라서 묻는 건가?

    “왕자 사칭한 사람을 어디서 받아 준대?”

    에드워드는 조용히 물었다.

    “내가 네 자리 하나도 만들지 못할 사람으로 보였어?”

    “그게 아니라…….”

    “내가 아니라도, 넌 얼마든지 사람들이 너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비스코티인들은 너를 좋아해.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일단 네 편을 들겠지. 넌 언제든 돌아올 수 있어.”

    그 말은 듣기 좋았다.

    난 이미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에드워드는 사실로 만들려고 하겠지. 그에겐 그럴 힘도 있었다. 사람들의 입을 강제로 닫고 불만을 억누를 힘이.

    저런 건 어디서 배운 걸까? 파이 공작이 가르치지 않은 건 분명한데.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거겠지. 셔벗 왕이 널 보호하는 걸 봤어. 그 사람에게 널 보호할 권리를 줬어?”

    에드워드는 계속 물었다.

    자기 것을 빼앗아서 남에게 주기라도 했다는 투다. 이 와중에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날 구한 건 너고…….

    필리프 왕은 날 꾸짖었다.

    “대체 뭘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내게서 널 보호했잖아.”

    “…….”

    네가 미친 사람처럼 미셸을 걷어차고 있을 때?

    그건 너 때문이잖아.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을 위해 폭력을 사용한 게 아니다. 파이 공작은 그를 폭군이라고 비난했지만, 실은 그가 폭압적으로 군 것도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셔벗 왕은 널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 그래서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널 잘 모르겠어.”

    그가 내 손을 만졌다. 엄지로 손등을 쓸었을 뿐인데 나는 깜짝 놀랐다.

    에드워드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나를 쳐다봤다.

    “이렇게 있으면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너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착각하게 돼. 내가 너무 간절히 원해서 잘못된 신호를 해석하는 건지…….”

    귀가 화끈거렸다.

    나야말로 모르겠다. 이 자식 알고 이러는 거 아니야?

    “지금 너는 내가 같이 비스코티로 돌아가자고 하면 ‘응’이라고 대답해 줄 것 같아.”

    “그건 아니지.”

    “응.”

    에드워드는 낙담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완전히 가라앉아서, 난 속이 뜨끔거렸다.

    아, 진짜…….

    “왜? 왜 그냥 내가 널 지키면 안 돼?”

    그가 물었다. 이야기가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가 절박해 보여서 화도 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왜 모르는 걸까?

    “너 바보야? 내가 누굴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누굴 걱정해서…….”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엉망으로 만들었다.

    올 리가 없는데, 그가 온다는 생각만으로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가서, 계속 뛰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맹목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물었다.

    “날 기다렸어?”

    당연하잖아…….

    “계속 기다렸어.”

    그의 눈이 커졌다.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의 얼굴이 비스듬히 다가왔다.

    난 숨도 못 쉬고 얼어붙었다. 반사적으로 눈이 질끈 감겼다.

    움츠러든 게 무색하게, 간지러운 감촉이 내 뺨에 닿았다. 에드워드의 숨이 가볍게 피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을 떴다. 에드워드의 푸른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의 눈이 바다처럼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것처럼. 눈이 부신 듯이. 기대도 하지 않던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에드워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

    에드워드가 내 손을 놓지 않아서 그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사실은 누구의 심장 박동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온몸이 고동치고 있었다.

    * * *

    하지만 현실에 엔딩 크레디트는 없어서 문제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필리프 왕의 시종이 에드워드를 부르러 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와 대화 중이셨습니까? 기다리겠습니다.”

    필리프 왕의 시종은 처음부터 내게 정중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손님을 대하는 태도였고, 지금은 명백히 내 명령에 따르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다음 주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다.

    돌아보니 에드워드가 시종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뭘 신경 쓰는지 알고 있었다.

    필리프 왕이 그를 부르는 이유도.

    “먼저 가. 손님은 내가 안내할게.”

    “전하께서 직접?”

    시종은 당황했으나 곧 수긍하고 사라졌다.

    에드워드는 이제 나를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왜 그렇게 봐?”

    “내가 손님이야?”

    “이 성에서는 손님이잖아.”

    “너는 주인이고?”

    불만이 많다.

    에드워드의 손을 다시 잡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약간 삐친 것 같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필리프 왕은 에드워드에게 도움의 대가를 물을 것이다. 내전이 종식되면 무엇을 받고 싶은지.

    전쟁이 끝나면 에드워드는 돌아가겠지.

    끝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에드워드는 비스코티의 반란을 잠재우고 왔지만, 왕국에 결정권자가 없는데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에드워드는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왜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걸음을 멈추고 에드워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도 나를 보고 있어서, 갑자기 복도에 멈춰서 서로를 보는 모양새였다.

    그가 물었다.

    “조프리. 내전이 끝나면, 같이 비스코티로 돌아갈래?”

    기대하지 않는다는 어투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내가 좋다고 대답하면 에드워드는 정말로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데리고 돌아가겠지만.

    그래서야 납치가 된다. 셔벗 병사들이 에드워드를 쫓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에드워드는 돌아가면 영웅이 되겠지. 이미 국경 전쟁을 막은 영웅이다. 비스코티인들은 젊은 왕자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신들도 에드워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에드워드는 더는 폭군처럼 굴지 않아도 되겠지.

    거기에 나라는 부담을 지울 필요는 없다.

    사실은, 날 좋아해 주던 사람들에게 욕먹으며 버틸 자신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호의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돌이라도 던지면 아프겠지.

    “셔벗 왕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것도 그렇고.”

    날 데려가면 너도 좋은 꼴은 못 볼걸.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그 안 좋은 상황을 막으려고 할 테니까. 그 방법은 폭력적일 것이다. 에드워드의 폭군 타이틀을 내가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조프리, 그거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잖아.”

    뭔데?

    올려다보는데 에드워드가 갑자기 고민에 잠겼다. 그러더니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쟤는 저러고 있으면 자기가 얼마나 수상해 보이는지 알까? 모르니까 저러는 거겠지.

    그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조프리, 약혼은 왜 안 했어?”

    저건 왜 묻는 걸까?

    “결혼하기 싫어서.”

    일반적인 이유를 말해 봤다.

    “네 비서를 이용하면 되잖아. 형식상의 약혼녀를 세워 뒀다면 스프라우트 공작과 관계도 악화되지 않았을 텐데.”

    남 이용하라는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마. 나쁜 사람 같잖아.

    “하지만 그러면 너한테까지 약혼 소식이 가잖아.”

    “……나한테 약혼 소식을 들려주기 싫었어? 왜?”

    “그야 이렇게 신경 쓸 테니까…….”

    “…….”

    그랬나? 나도 모르는 이유를 방금 알았다.

    에드워드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프리, 그럼. 나랑 결혼할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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