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82화 (282/293)
  • 282.

    “헉, 이제 알겠군. 나를 겁박해 정보를 얻어 내려는 속셈이로구나. 내가 그런 수작에 굴복할 것 같으냐? 이미 너희는 끝났다. 에이드-코크의 연합 대군이 왕성으로 달려오고 있으니까…….”

    미셸은 어느 순간에도 떠들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기사였다.

    저 입만 다물면 덜 맞을 텐데.

    그러나 그를 때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의 말에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필리프 왕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제가 어째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셔벗에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힘이라고!”

    미셸이 선발대가 되어 왕성을 포위하는 동안 본대가 오는 작전이었던 모양이다. 포위되어 있는 동안 다른 곳에 소식을 전하기도 마땅치 않아서, 왕성은 고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저 하나를 잡아 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연합군이 왕성을 점령하면 포로 따위는 쓸모없어질 테니까요.”

    포로는 협상용이지만, 데리고 있는 쪽에서 곤란해지는 상황도 있었다. 포로 본인이 죽음을 각오할 때다.

    미셸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을까?

    모르겠지만, 반란군이 무시하고 왕성을 공격하면 이쪽이 곤란해진다. 이쪽은 포로를 함부로 죽일 수 없다. 협상의 여지조차 사라지니까.

    필리프 왕은 즉시 대처에 들어갔다. 미셸이 포로가 되었음을 알릴 사신을 정하고 성의 방비를 명령했다.

    그가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수성을 도와주겠소?”

    “예.”

    에드워드는 나를 보며 수락했다.

    그가 나를 너무 보고 있어서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만 봐.”

    “응.”

    그러면서도 에드워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도 상태가 좋지 않다. 이럴 때가 아닌데.

    “또 다쳤네.”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비난하는 투는 아닌데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또 이상한 재주를 익힌 모양이다.

    누구 때문인데. 네가 실종되지만 않았으면 난 멀쩡했어.

    속으로만 생각했다. 낯간지러운 소리인 것 같아서.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데도 이상하게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미셸이라는 협상 카드를 쥐고 있어서?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내게 가장 큰 적은 언제나 에드워드였다. 내가 죽는다면, 그건 에드워드의 손에 의해서다.

    그 에드워드가 곁에 있었다. 그가 나를 지키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근거 없는 예감.

    내 예감은 안 맞는 편인데, 이번만은 달랐다.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병사가 달려왔다.

    “전하! 명을 받고 적진으로 갔던 모리스 상송이 귀환했습니다. 전하께 성과를 보고하길 청합니다.”

    “오오, 조프리 왕자. 그런 일을 명령했느냐?”

    내가 명령한 건 아니었지만.

    “예, 폐하. 보고를 명해도 되겠습니까?”

    난 필리프 왕의 허락을 받고 모리스를 들였다.

    대전 안으로 모리스와 파벨레 상송이 들어왔다. 파벨은 필리프 왕과 내 얼굴이 보이는 거리에 도달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존귀하신 폐하, 그리고 존경하는 조프리 전하! 상송의 아들 파벨레가 죄를 청합니다!”

    파벨은 고개를 숙인 채로도 힐끔거리며 주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 발로 돌아왔으면서도 자기가 잘 돌아왔는지 헷갈려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바뀐 건 미셸 에이드를 발견한 직후였다.

    “파벨레 상송?”

    “미셸 에이드! 왜 저자가 여기에…….”

    미셸은 누가 봐도 잡힌 모양새다.

    파벨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외쳤다.

    “저 역적을 잡아들이셨군요! 역시 폐하이십니다! 협박을 받아 잠시 반란군에 협조했으나, 제 충심은 폐하의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 증거로 저는 반란군의 내부를 염탐해 왔습니다! 저들은 오합지졸입니다, 전하. 콜린 코크가 배신하려는 것을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에이드군은 보급이 끊길 겁니다! 코크 공작은 에이드가 왕성을 정복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 * *

    로웰 몽블랑은 조프리 왕자의 허락을 받고 성을 떠났다.

    추문은 익숙했다. 그의 행실 탓에 아버지 귀에는 많은 소문이 들어가곤 했다. 열다섯 살에 퍼진 에브니아 스프라우트와의 연애설은 그가 겪은 추문 중에 가장 황당한 것이었으나, 그는 그마저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언젠가 후회하게 될걸.’

    누가 한 말이었더라? 그런 말은 많은 사람에게 들었다. 아버지도 수백 번은 했을 것이다.

    로웰은 자신이 후회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귀한 것, 더 높은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웰은 장남이 아니었다. 그가 물려받을 것은 약간의 유산뿐이었다.

    첫째 형은 가문을 망하게 만들 수도 있겠으나, 아버지는 형에게 가문을 물려줄 것이다. 그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로웰이 좋은 평판을 얻고 명예를 관리한다고 귀한 것이 그의 손에 들어올 리 없다.

    그렇다면 좀 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았다. 그게 즐거우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버지의 말을 듣는 거였는데.

    어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아서, 로웰은 후회하고 있었다.

    조프리 왕자는 로웰의 수작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에게 로웰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가볍고,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 왕자는 그런 사람의 말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이제 로웰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스프라우트 공작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왕자를 도울 생각이었으나, 왕자가 자신과 딸을 농락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공작은 믿지 않을 것이다.

    로웰과 공작의 지원을 맞바꾸는 건 남는 장사다. 하지만 왕자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널 싸게 팔지 마.’

    어떻게 저런 말을 하실 수 있지. 가슴이 벅차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도.

    로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를 내주면 공작이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닐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공작이 ‘왕자가 같잖은 수작을 부린 주제에 로웰 따위를 내주고 입을 씻는다’고 판단한다면? 더욱 분노한다면?

    지원군은 없다. 오히려 왕자의 평판만 떨어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로웰은 소문을 정말 기정사실로 만들어 줄까 생각했다. 에브니아를 야반도주 시키면 스프라우트 공작은 그 수치를 참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에브니아와 로웰이 깊은 관계가 되어 버린다면, 공작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다.

    딸을 버리거나 로웰을 받아들이거나.

    에브니아를 버림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지키거나, 혹은 딸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발표하는 것이다.

    스프라우트 공작은 딸을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적 에브니아가 벌인 결혼 소동 때도, 딸을 내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방에 틀어박히자 딸을 달래려고 전전긍긍하며 파티를 열었을 뿐이다.

    에브니아가 다시 한번 로웰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면.

    “…….”

    로웰은 얼굴을 문질렀다.

    아무래도 그는 정말 충성심을 알아 버린 모양이다.

    ‘공작의 동맹과 교환하는 게 싼값이에요?’

    ‘응. 내가 한참 밑지는 장사지. 난 그런 장사 안 해.’

    왕자가 그렇게 말하면, 로웰은 자신을 싸게 넘길 수 없게 된다.

    전하께서 자신을 귀하게 여겨 주시니 귀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몽블랑 상단주는 아들의 연락을 받고 셔벗에 도착했다. 은밀하게 이동하는 데는 상단의 행렬에 끼어가는 것만 한 방법이 없었다.

    상단주는 막내아들의 최근 행보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적 적잖이 사고를 치고 다니던 애가 정신을 차렸는지 아니면 정신이 나갔는지 몰라도 조프리 왕자의 최측근이 되어 있지 않은가.

    조프리 왕자 전하는 사건 사고가 많아서, 상단주는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 실물을 보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왕족은 원한다고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분이 비스코티의 왕족은 아니라는 것 같지만.

    상단주는 아들에게 돌아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처음 왕자의 비밀이 밝혀지고 나라가 발칵 뒤집혔을 때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어쩌면 아들은 대단한 줄을 잡았는지도 모른다.

    요즘 정신을 차린 듯한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유산 지금 주세요.”

    “뭐?”

    “제 몫 떼어 두셨을 거 아니에요. 어차피 주실 거 지금 주세요. 생전에 주시면 제 입으로 감사 인사도 듣고 더 좋지 않아요?”

    “야, 이놈아! 너 저번에 유산 필요 없다며!”

    왜 이놈에게 기대했을까? 상단주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제 덕분에 전하도 이용하고 쏠쏠하셨잖아요. 상단 평판도 좋아졌던데요.”

    몽블랑 상단은 ‘조프리 왕자를 도운’ 상단으로 비스코티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상단주자 주춤하자, 로웰은 다시 말했다.

    “몽블랑 상단의 셔벗 지부, 제게 주세요. 어차피 토피넛에 눌려 키우지도 못하셨잖아요. 제가 키워 드릴게요.”

    “야! 그게 달라고 ‘어, 너 해라’ 하고 줄 수 있는 건 줄 알아?”

    “전하 팔아서 얻은 부만큼 전하께 돌려 달라는 거예요.”

    로웰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상단주는 아들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상인이 모험을 해야죠. 항상 투자할 곳을 잘 고르라고 직원들에게 말씀하셨잖아요. 전하께 건 투자가 성공하면 그분은 왕이 되세요. 비스코티에서의 불만이 걱정되시는 거예요? 어차피 셔벗에 있는 사람은 저잖아요. 비스코티의 귀족들이 분노한다 해도, 제 독단이라고 변명하시면 될 텐데요.”

    “야! 아버지보고 아들을 팔라는 놈이 어디 있어!”

    상단주는 화를 내려다 말았다. 말하는 꼴을 보니 아들은 비스코티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불만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지가 않고…….”

    “무슨 말씀이세요?”

    로웰이 인상을 썼다.

    상단주는 어깨를 들썩였다. 에드워드 왕자의 소식이 끊기고 조프리 왕자는 셔벗에 빼앗겼다.

    그런 상황에서도 귀족들은 서로 다투느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이 상황을 알고 있었는데, 조프리 왕자가 만들어 놓고 간 신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한번 귀족들을 뒤엎어 본 적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귀족들을 어떻게 재촉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분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 거냐?”

    상단주는 세상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리라 생각될 뿐이었다.

    조프리 왕자는 이를 의도했을까? 그렇다면 몽블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뒤에 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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