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81화 (281/293)
  • 281

    매의 다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심장이 뛰었다.

    “에드워드가 널 보냈어?”

    매가 대답할 리 없다. 그런데도 난 물었다.

    “에드워드는 무사해?”

    매는 내 손을 가볍게 쪼았다. 배가 고픈 것 같다.

    대충 먹을 걸 찾아서 주는데 마음이 초조했다. 손이 떨려서 물을 바닥에 쏟을 뻔했다.

    매가 먹이를 쪼아 먹었다. 매끄러운 날개나 움찔거리는 움직임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날아왔어? 에드워드가 보낸 게 맞아?

    에드워드는…….

    무언가 툭 창가를 치더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 날씨에 매를 날리면 편지가 젖겠지.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다음 날 공성은 어려울 것이라든가. 비가 더 내리면 양쪽 다 힘들어질 것이라든가. 에드워드가 올 것이라든가…….

    비에 젖은 채 창 너머에서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벌떡 일어나서 창을 있는 대로 열어 놓았다.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비가 안으로 들어올 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로 둔 채 새벽을 맞았다. 도트가 들어와서 깜짝 놀랄 때까지.

    공기가 차가워서 소름이 돋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늘이 푸르게 밝아 오며 밖에서는 다시 고함이 들렸다. 미셸 에이드는 새벽부터 공격을 감행했다. 날씨가 젖고 꿉꿉해서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성벽 위로 욕설이 오갔다. 공격하는 쪽이 배는 더 힘들 테지만 병사들은 그렇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적은 수로 다수의 공세를 막아 내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잔 병사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초조하기는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밤새 상대가 준비한 것이 있었다.

    활을 막을 수 있게 설계된 거대한 나무 벽 같은 것을 앞세운 채 적병들은 거리를 좁혔다. 아래에서 쏘아 대는 화살이 성벽 위의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그 틈을 타 성벽에 사다리가 걸쳐졌다. 적병들이 기어올랐다. 성벽 위는 비명으로 덮였다.

    입이 바짝 말랐다. 나는 돌계단을 오르다가 몇 번 미끄러질 뻔했다.

    “전하?”

    “조프리 전하!”

    지휘관이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나는 기어 올라온 적병을 찔러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쪽을 보지 않고 소리쳤다.

    “괜찮아! 조금만 버텨! 지원군이 곧 온다. 얼마 남지 않았어!”

    “전하!”

    “전하, 내려가 계십시오!”

    “화살은?”

    “예?”

    “화살!”

    지휘관에게 화살을 받아 지원 사격 했다. 갈고리를 걸고 올라오는 적병을 쏘아 추락시켰다.

    “전하!”

    “조프리 전하께서 함께하신다!”

    병사들이 외쳤다. 한두 명이 외치는가 싶더니 수가 불었다.

    그 함성은 필리프 왕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적병들의 이목도 끌어모았다.

    “조프리 왕자!”

    성벽 아래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화살 다발이 된 나무 방패 뒤에서 미셸 에이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성벽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가 활시위를 당겼다. 몸이 곧게 펴지고 화살촉은 정확히 나를 겨눴다. 교본에 나올 것처럼 완벽한 자세였다.

    “전하!”

    누군가 나를 밀쳤다. 동시에 화살이 뒷벽에 박혔다.

    “이제야 나를 보는군! 조프리 왕자!”

    미셸이 희열에 차 외쳤다. 그는 방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다음 화살을 내게 겨누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나?

    순간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의 병력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미셸 에이드의 진영 뒤에서 기병 수백 기가 달려오고 있었다. 말발굽이 땅을 짓밟고 기병들은 함성을 질렀다.

    에이드군의 후미가 한순간 혼란스러워졌다. 기마대는 거대한 창처럼 에이드군의 한가운데를 꿰뚫고 돌파했다.

    그 끝에는 미셸 에이드가 있었다.

    기마대의 선두에 선 기사가 미셸 에이드와 맞붙었다. 첫 충돌만으로 미셸 에이드의 창이 날아갔다. 말발굽이 전선을 짓밟는 진동이 온몸을 울렸다.

    “지원군! 지원군이다!”

    “원군이 왔다! 우린 살았어!”

    눈꺼풀 위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와서 흙먼지는 거의 피어오르지 않았다.

    미셸 에이드는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혼란통에 대피로를 찾지 못했다. 기사는 단번에 미셸을 낙마시켰다. 그가 바닥을 구르는 미셸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게 보였다.

    심장이 너무 뛰어 숨이 막혔다. 주변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전하, 전하의 은덕입니다!”

    지휘관이 외쳤다.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게 명령권이 있던가?

    “성문을 열어! 나가서 호응해!”

    “예, 전하!”

    어쨌든 지휘관은 응했다.

    “성문을 열어라! 적병을 몰아내!”

    난 따라서 나가려다가 한 걸음도 못 가고 막혔다. 도트와 그레이가 나를 양쪽에서 붙잡고 있었다.

    “언제 왔어?”

    놀라서 묻자 그레이가 되물었다.

    “대답은 잘하시더니 ‘언제 왔냐’고요?”

    아까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나를 부축해서 몸에 힘이 빠졌다. 다리는 아까부터 풀려 있었다. 의외로 그레이는 나를 지탱하고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서로에게 기댄 채로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미셸을 잡은 기사가 그를 질질 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성 밖으로 달려 나갔다. 미셸 에이드의 병력이 도주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이곳으로 말을 달려오는 기사만이 보였다.

    투구를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알 수 있었다.

    “에드워드.”

    그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고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부축을 받은 채 기사에게 다가가는 데만 집중했다. 체면이나 사기, 내가 고려하던 모든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셸을 사로잡은 기사가 투구를 벗었다. 땀방울이 떨어지고 눈부신 금발이 흩날렸다.

    머리를 털어 낸 에드워드가 나를 봤다. 푸른 눈에 내가 담겼다.

    “조프리. 도우러 왔어.”

    숨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아냐?”

    셔벗의 구원자가 내 침묵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주위가 조용했다. 난 곧바로 걸어가 그를 끌어안았다.

    “기다렸잖아!”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에드워드의 손은 잠시 헤매다 내 등을 감쌌다.

    “응. 내가 미안해.”

    “…….”

    “내가 잘못했어.”

    거대한 안도감이 나를 덮쳤다. 무언에 안도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온몸의 피가 아래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일고, 심장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두근거렸다.

    내가 나를 지탱할 수 없대도 상관없었다. 에드워드는 나를 놓지 않을 것 같았다.

    난 이런 감각을 알지 못했다.

    * * *

    필리프 왕은 내가 성벽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엄하게 말했다.

    “왕족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다! 주인 없는 나라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느냐?”

    왕정 국가의 왕 같은 소리였다.

    “주인은 폐하시잖아요.”

    “다음 대 주인으로서 자각이 없어! 너를 혼내는 건 아니야. 병사들을 독려한 행동은 훌륭했다. 하지만 너는 지휘관이 아니야. 네 역할이 무엇인지 기억해라!”

    혼났다. 전처럼 싫은 말을 한 뒤에 내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필리프 왕은 정말 화난 듯했다.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는데, 필리프 왕이 나를 그의 뒤에 세우려했다. 그걸 가로막은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 왕자. 도움에 감사드리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어. 양국의 우애가 흔들리는 이러한 시기에, 그대가 이렇게 먼저 나서 도움을 주니 내 마음이 부끄럽군.”

    “동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오. 미셸 에이드는 반란군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리 쉽게 잡을 수 없었겠지. 이대로 내전이 끝난다면 이 전쟁의 최대 수훈자는 그대가 틀림없소. 비스코티의 기사들은 전부 그대와 같이 뛰어나오?”

    필리프 왕이 감탄했다. 그럴 만한 활약이었다.

    에드워드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예. 비스코티의 기사들은 천성이 강맹한 데다 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 그 무예가 빼어납니다. 함께 온 기사들도 그 용맹을 따를 자들이 없으니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못 보던 사이에 사람 상대하는 능력이 늘었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이 눈부셔서,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에드워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보탠 건 없지만 뿌듯하긴 했다.

    미셸 에이드는 에드워드의 발치에 묶여 있었다. 에드워드가 필요 이상으로 반짝여서 그는 더욱 초라해 보였다.

    “이자가 에드워드 왕자? 왜 여기에? ……설마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인가!”

    갑자기 미셸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에드워드가 그를 내려다보자, 그는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자는 사생아다! 비스코티와 셔벗의 고귀한 사람들을 속이고 왕자 행세를 하고 있던 자야. 그대의 형제가 아니란 말이다. 저 간악한 사생아를 구하기 위해 출전하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순간 미셸의 고개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에드워드가 그의 뒤통수를 찼다.

    아니…….

    “…….”

    대전이 침묵에 잠겼다. 사태를 이해하지 못해 대신들이 침묵하는 동안, 에드워드는 다시 다리를 들어 미셸의 배를 걷어찼다.

    퍽!

    “콜록, 콜록! 저, 정신 나갔나? 사생아는 내가 아니라 저쪽…….”

    미셸은 입도 못 열고 맞았다. 사람을 때리는데 무슨 북 치는 소리가 나고 있다.

    필리프 왕이 나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에드워드 곁에서 떼어 놓으려는 듯했다.

    “…….”

    “…….”

    “……에드워드 전하, 저자는 포로입니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그레이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붙잡고 뜯어말리는 건 아니었다. 저런다고 멈출까?

    에드워드는 멈췄다. 그가 나를 보더니 변명했다.

    “발이 미끄러졌어.”

    “…….”

    웃기지 마. 힘줘서 찼잖아.

    하지만 그의 눈을 보고 있으려니 화가 안 났다. 뭐 나쁜 뜻으로 걷어찬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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