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79화 (279/293)
  • 279.

    “공작의 동맹과 교환하는 게 싼값이에요?”

    로웰은 웃으며 말했다.

    “응. 내가 한참 밑지는 장사지.”

    “정말…….”

    나도 어이없는 소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신분이 깡패라 내가 우기면 로웰은 반박할 수 없었다.

    “난 그런 장사 안 해. 너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나갔다는 소리 들으면 화낼 테니까. 문제 안 일으킬 거라며?”

    “예. 제가 그렇게 말했죠.”

    그는 웃기만 했다.

    미심쩍어져서 난 다시 다짐받았다.

    “하지 마. 그거 말고 너 또 뭐 했어?”

    “토피넛 상단에서 용병을 고용하긴 했는데요……. 전하의 사재에 손댔어요. 허락 없이 사용해서 죄송해요.”

    “그건 상관없고.”

    로웰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단주는 물건을 팔았을 뿐이지만, 단순한 고객과 상단 관계라고 얘기해도 반란군 측이 믿어 줄 리 없으니까요. 음, 그래도……. 상단이 제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을 반란군에 먹여 뒀을지 모르니까요. 확실히 신뢰 관계를 끊으려면 용병을 이용해 반란군 측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두면 좋겠네요.”

    “…….”

    재주도 좋다.

    상단주가 목숨 걸고 누굴 도울 인물 같지는 않았는데 어떻게든 발을 담그게 만든 모양이다. 로웰은 그 발을 잡아당겨 같은 수렁에 빠뜨리자고 말하고 있었다.

    “좋은 계획이네. 폐하께 말씀드릴게.”

    로웰은 한참 동안 얼굴을 문지르더니,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다행이네요.”

    로웰을 보내자 다음 방문자가 들어왔다.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그레이와 이델라가 붙어서 온다고?

    이델라는 허락을 받듯 그레이를 쳐다봤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볼이 발그레해서 보기 좋았다.

    “제가 생각한 계획이 하나 있는데요, 말씀드려도 될까요?”

    “응. 뭔데?”

    이델라는 머뭇거렸다.

    “전하의 그……. 모리스 상송 님…… 상송 씨…… 그분 말인데요.”

    머뭇거릴 만한 주제 선정이었다.

    “그냥 편한 대로 불러.”

    “으음, 네! 상송 백작을 설득해 보면 어떨까 해서요.”

    “어떻게?”

    모리스 상송은 내 연락을 받고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병이 나서 외출이 불가능하다는데, 사실인지 변명인지 아무도 몰랐다. 둘 다일지도 모르고.

    상관없었다.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도 몰랐다. 내가 그에게 할 말이 있나?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냐거나, 당신이 정말 조프리의 친부냐거나, 그런 사실 확인을 제외하면 물어볼 것도 없었다.

    소문은 퍼졌고, 이미 사람들은 믿고 있다. 내 앞에서 말하지 않을 뿐이다. 기정사실이 된 후로는 그를 만날 필요도 사라졌다.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으면, 그건 진실이 된다.

    왕비님은 나를 언제나 조프리 왕자라고 불렀다. 비스코티 왕성에서 그건 진실이었다. 그렇게 불러 주는 사람이 떠난 뒤에 아니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리스 상송을 추궁할 것도 없었다.

    “상대가 친아들이든 누명을 쓴 외국의 왕자든 아파서 못 만날 정도라던데. 다시 부른다고 만나 줄까?”

    “제가 상송 백작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비슷한 유형의 분을 알고 있거든요.”

    이델라는 침을 삼키더니 힐끗 옆을 돌아봤다. 옆에 서 있던 그레이가 인상을 썼다.

    “…….”

    모리스 상송의 깐깐한 얼굴에서 나만 그레이를 떠올린 게 아닌 모양이다.

    “제가 알기로 그런 유형의 분들은 자신의 잘못을 못 견디시니까요.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앓아누우신 게 아닐까요? 정말 아픈 건지 모르겠지만요. 전하를 피한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그렇다면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델라가 의욕적으로 말했다.

    그레이가 자기 잘못을 못 견디나?

    쟨 잘못을 애초에 안 저지르면 되지 왜 저지르느냐고 할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애써서 만날 필요는 없어.”

    지금 당장은 모리스 상송의 가치가 크지 않다. 굳이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말해 놓고 아차 했다. 이델라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레이가 나섰다.

    “전하를 뵙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자에게 아들이 있잖아요.”

    “파벨레 상송?”

    “예. 그자가 반란군 진영에 있으니, 모리스 상송에게 끌고 오라고 하면 되겠죠.”

    아버지의 설득을 듣고 아들이 마음을 바꿔 먹는 그림을 그린 모양이다.

    난 회의적이었다.

    “파벨이 부모 말을 잘 듣는 자식인가?”

    아버지를 팔아 권력을 사려는 부류 같은데.

    모리스 상송의 편지는 유출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범인이 파벨이라는 사실은 간단한 추론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만한 짓을 저질러 놓고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할 것 같지 않다.

    “거기서 대우받고 있지도 않을걸요.”

    그레이가 단정했다.

    “그래? 공을 세웠잖아.”

    “가문을 등졌잖아요. 배경도 없는 귀족을 누가 대우하겠어요? 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전쟁이 반란군의 승리로 돌아가고 파벨레 상송이 가문의 주인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요. 전쟁이 길어진다면요? 가장 괴로운 사람은 그자일걸요.”

    그건 그렇다 치고.

    “데려와서 어쩌게?”

    그레이가 말했다.

    “두 공작이 당장은 연합했지만, 동등한 두 세력이 사이가 좋을 리 없겠죠. 파벨레 상송에게 아첨하는 재주는 있는 것 같더군요. 두 공자 곁에서 그자가 뭘 주워들었을지 전 궁금한데요.”

    “아는 걸 전부 털어놓게 할게요, 전하. 자신 있어요. 이미 한번 해 봤으니까요.”

    이델라가 자신했다.

    어쩌다가 그런 경험이 생겼는데? 어쨌든 두 사람은 합의된 모양이었다.

    이 계획의 문제는 모리스 상송이 수락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난 그가 수락할 것 같지 않았다.

    모리스가 아닌 어떤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고 반란군의 진영에 들어가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면.

    하지만 저렇게 의욕이 넘치는데 막기도 뭐했다.

    상송 저택은 왕성 근처였다. 위험한 곳도 아니라 다녀오라고 두 사람을 보냈다.

    그레이와 이델라는 마차를 타고 낮에 떠나서 저녁에 돌아왔다.

    “하겠대요!”

    이델라가 말했다.

    아, 정말?

    “파벨레 상송을 끌고 돌아와 전하께 죄를 갚겠다던데요!”

    반란군 내부 정보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모리스 상송이 적지로 떠났다.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얼마 후 왕성으로 지원을 오던 필리프 왕의 동맹들이 각개 격파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 백작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백작 본인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미셸 에이드의 활약이었다.

    그는 붉은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별동대의 가장 앞에서 싸웠다는 듯했다. 그 투구 장식이 흙먼지 가득한 전장에서도 눈에 띄어서, 그는 붉은 기사라는 명성까지 얻었다. 반란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왕에게 가세하려던 세력은 주춤했다. 그들은 왕의 승리를 바랐으나 자신을 희생해 결실을 이룩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필리프 왕은 미셸 에이드의 활약을 막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이 셔벗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가 누구인가? 저 오만한 미셸 에이드에게 누가 겸손을 알려 주겠는가?”

    그가 물었다.

    몇 명의 기사가 분연히 나섰으나 필리프 왕은 확신하지 못했다. 난 그의 표정에서 저 기사들이 이미 미셸에게 패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셸 에이드는 내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좋은 기사였다.

    그러나 내가 미셸을 하찮게 여기게 만든 기사가 곁에 있었다. 알렉스가 나를 바라봤다.

    “제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출전하겠습니다, 전하. 허락해 주십시오.”

    미셸 에이드 개인은 알렉스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렉스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출중했다. 그는 에드워드와 함께 비스코티에서 아무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낸 기사였다.

    내 옆에 있으라는 건 욕심이겠지.

    “다녀와.”

    알렉스는 바로 나서지 않았다. 잠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예. 전 아직도 욕심과 충심을 분별하기 힘들지만, 이 상황에서도 전하 곁에 남으려는 것은 저의 욕심인 듯합니다. 전하를 지키기 위해 출전하겠습니다.”

    명성 높은 바움쿠헨 경이 앞으로 나서자 대전은 활기를 띠었다. 필리프 왕은 크게 기뻐하며 정예병을 붙여 주겠노라 약속했다.

    알렉스는 날이 밝기 무섭게 출정했다.

    나는 국왕 부부와 함께 그를 배웅했다.

    먼 곳까지는 나갈 수 없었다. 부목을 댄 내 다리를 보면 구경꾼들의 반응이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출정하는 병사들을 시민들이 나와 구경했다. 더 멀어지기 전에, 알렉스는 말을 돌려 성을 바라봤다. 그의 뒤로 동이 트고 있었다.

    내가 지독하게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는 역할이 고작 멀쩡한 척하는 것뿐이라는 게.

    최소한의 병력만 남긴 채 왕성은 수성 태세에 들어갔다.

    성의 모든 사람이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식은땀을 흘리며 밤에 몇 번씩 깼다. 그때마다 무언가 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했지만, 창가에 날아든 매는 보이지 않았다. 도트를 덩달아 깨웠을 뿐이다.

    에드워드가 놓고 간 수면제는 금방 수명이 다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지만 효과가 없었다.

    난 잠이 부족한 몸을 끌고 대전 회의에 참석했다.

    승전보 대신 날아든 소식 때문에 왕성은 비상이 걸렸다.

    적의 병력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몇 개의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거나 항복했다. 선두에 선 기사는 미셸 에이드였다. 그는 예상한 경로를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왕성 앞에 도착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에이드의 본대는 칼라일에 주둔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나 저자는 미셸 에이드가 맞습니다, 폐하. 스스로를 셔벗 제일의 기사 미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칼라일 전투가 거짓 정보였던 게…….”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대전은 혼란에 빠졌다. 병사가 보고했다.

    “미셸 에이드는 병력을 이끌고 산을…… 칼라일산맥을 넘어서 왔다고 합니다!”

    제정신인 지휘관이라면 험준한 산맥으로 병사들을 이끌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는 건 소수의 병사를 빠르게 이동하고자 하는, 나 같은 멍청이밖에 없었다…….

    “…….”

    내가 이미 했기 때문에?

    그래서 미셸이 떠올렸다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미셸 에이드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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