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로잘린 왕비는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난 밖으로 나가려다가 그녀와 부딪힐 뻔했다.
“어, 어떻게 됐나요!”
그녀는 대뜸 물었다. 나는 그녀가 필리프 왕과 나를 헷갈린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더니 안색이 변했다.
“잘 되지 않았군요. 폐하께서는 이 나라를 위해 생각할 것이 많으시죠……. 걱정 마세요, 전하.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요.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발칙한 사신에게 죄를 묻겠어요.”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복수가 이루어질 듯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도량이 넓군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하의 넓은 아량을 이해하지는 못할 거예요. 스스로 지켜야만 하는 명예도 있는 법이에요.”
그녀가 충고했다. 없는 걸 이해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그 사신에게 죄를 물을 필요는 없어요. 그 주인이 사죄하게 될 테니까요.”
“어머나.”
로잘린 왕비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그녀는 조금 놀라는 듯했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무서운 표정이 사라져서, 그녀는 다시 자애로운 왕비처럼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요?”
방에서 나온 필리프 왕이 그녀의 곁에 섰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폐하, 제가 방금 들은 말이……. 조프리 왕자가…….”
“셔벗에 남을 거예요. 왕자가 약속했어요.”
“어머나.”
로잘린 왕비는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기뻐하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당혹스러워해서 필리프 왕도 당황했다.
“부인?”
“저, 왕자 전하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요.”
뭘까? 이 시점에 꼭 해야 할 말이.
사실 내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당장 셔벗에서 떠나 줬으면 좋겠다거나, 내가 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린 사람이 자신이라거나 하는 고백이 떠올랐다. 굳이 말해서 좋은 거 없는 고백이긴 한데.
“궁에 전하에 대한 칭찬을 퍼뜨린 사람은 저예요.”
“…….”
이게 무슨 말이지.
“제 시녀들이 저를 따라 비스코티의 신문을 읽기 시작해서……. 금방 유행이 되어 있더군요. 전하에 대한 기대는 제가 퍼뜨렸어요. 제가 아니었다면 전하께선 이렇게 견제를 받지 않으셨을 거예요.”
견제라고 완곡히 말했지만, 그녀는 내 혈통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필리프 왕이 주장했다.
“아니에요. 신문은 내가 먼저 읽었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신문물 같은 건 잘 알지도 못하시잖아요. 제가 먼저였어요. 외국의 새로운 유행은 제 궁에 가장 먼저 찾아오잖아요.”
서로 자기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지만.
그 신문이라면 헛소리가 대부분인데 뭘 칭찬했다는 걸까? 좋은 말만 빼서 과장 광고를 한 것 같긴 했다.
내 칭찬을 하고 다녔다는데 화낼 수도 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그녀 때문에 내가 견제받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될 일이었다. 필리프 왕이 나를 안 불렀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비스코티에 남았다면 그것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셔벗의 내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있든 말든 일어났을 일이다. 지금과 양상은 달랐겠지만.
필리프 왕이 내전 중에 대안으로 나를 떠올렸다면, 상황은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으로 가도 내가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헛짓을 한 것부터 문제였다.
대체 사업은 왜 벌였을까? 성공할 줄 몰랐으니까 그랬지만. 따져 보면 로웰이 투자의 천재인 줄 몰랐다는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원인을 찾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왕비 전하께서 저를 그렇게 띄워 주셨다면, 셔벗의 귀족들도 제가 성공할 일에만 투자한다는 걸 알겠네요.”
“물론 그렇겠지만…….”
로잘린 왕비가 수긍했다. 진짜 저런 소릴 퍼뜨린 건가?
“친구분들께 알려 주세요. 지금 합류하면 실패한 적 없는 제 투자 사업에 발을 걸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하겠어요.”
그녀는 대답하더니 한 발 물러나서 나를 쳐다봤다.
“왕자 전하께서는 정말 공주님을 닮으셨군요.”
칭찬인가?
“어마마마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왜 그런 생각을 했나요?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로잘린 왕비가 놀랐다. 필리프 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마마마께서 이혼을 원하셨으니까…….”
설마 로잘린 왕비는 모르는 일인가? 괜히 입을 열었는지도 모른다.
“공주님은 공주님의 의무를 다하셨어요. 왕실의 가족이 후계를 걱정하는 건 당연했어요. 왕비님도 저를 미워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진 않았겠죠. 그건 그냥……. 일어날 일이었어요.”
로잘린 왕비는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생각을 말하는 듯했다. 내가 오해할까 봐 조심스레 설명하고 있다.
난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왕과 왕비님은 닮지 않은 부부였는데 필리프 왕과 로잘린 왕비는 오누이처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제 생각엔 제게 일어난 일도 그래요.”
내가 대답했다. 로잘린 왕비 때문에 내 소문이 퍼진 게 아니다.
그녀가 눈물을 가리느라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난 자리를 피했다.
어쨌든 대화는 끝났다. 멀쩡한 척하느라 힘을 주고 있던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제가 업겠습니다, 전하.”
“안 돼.”
알렉스의 제안은 유혹적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여긴 비스코티가 아니라 셔벗이니까. 그곳에서 난 약자여야 했지만 이곳에서는 반대였다.
바움쿠헨 백작은 포위망을 피해 비스코티로 귀환했다. 파이 공작은 그에게서 위임장을 받았으며 명령에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망설이는 셔벗 귀족들을 독려해 국왕군으로 끌어들이는 거였다.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병든 닭처럼 굴 수는 없었다.
어느 쪽에서도 난 전술적으론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를 불린다면 뭐라도 보탬이 되겠지.
* * *
광고의 효과가 있어서 내 복귀 이후 귀족들의 합류는 빨라졌다.
왕을 지지하던 신하들과 수도에서 가까운 영지를 가진 귀족들이 합류해서, 국왕군은 기세가 등등했다.
유일한 문제는 스프라우트 공작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그의 합류는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아직 동요하지 않았다. 대치 상황이라 정보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기도 했다.
그 때문에 문제의 소문이 스프라우트 공작을 실컷 망신 주고 왕성으로 침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도트를 통해 소문을 들었을 즈음, 필리프 왕의 귀에도 정보가 들어갔다.
왕은 나를 불러 조심스레 물었다.
“네 비서인 로웰 몽블랑이 혹시 최근에 누구랑 연애하는지 알고 있었니?”
“…….”
소문의 주인공은 로웰과 스프라우트 공녀였다.
둘이 공작의 눈을 피해 만나 왔으며, 공녀가 어리석고 문란하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닐 것이다.
내가 측근인 로웰을 이용해 공녀를 농락하고 있으며, 공녀와 공작이 동시에 내게 놀아나고 있다는 게 속뜻이겠지.
이게 소문일 뿐이었다면, 공작은 ‘딸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하며 더욱 분노해서 필리프 왕에게 합류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도는 공녀의 추문이라면 출처가 뻔했으니까.
공작은 그러지 않았다. 소문의 무언가가 공작을 건드린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소문의 반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로웰이 공녀와 헤어졌다면, 공작이 이렇게까지 화낼 리 없는데?
로웰은 내 질문을 듣고 얼굴을 짚었다.
“죄송해요, 전하. 제가……. 실수했나 봐요.”
“뭘?”
“전하를 찾는 데 마음이 조급해져서 에브니아를 끌어들였어요. 공작이 모욕감을 느꼈다면 저 때문이에요.”
스프라우트 공녀와 헤어지는 대신, 공녀를 통해서 공작을 움직였다고?
“수색 병력을 스프라우트 공작도 보냈어?”
“예. 그래서 반란군이 병력을 물린 거예요. 전하께서 스스로 내려오셨으니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일이 됐지만…….”
나도 이마를 짚고 싶어졌다.
로웰이 자책할 일이 아니다. 나도 공작에게 약속해 둔 게 있으니까. 초범보다 재범이 더 중한 처벌을 받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공작은 괘씸죄를 적용한 것 같다.
난 결혼을 제외하고 뭐든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래 놓고 로웰과 공녀를 만나게 했던 걸로 보였겠지.
공녀가 로웰과 결혼하면, 공작은 내 측근과 결혼 동맹을 맺는 셈이 된다. 가신 취급 당하는 셈이다.
“아니야. 수색이 멈춰서 살았어. 열이 심해서 꼼짝도 못 할 지경이었거든.”
동굴이 발견되지 않은 건 로웰의 공이었다.
“예?”
난 그때 내 상태를 자신했지만, 실은 멀쩡하지 않았다. 발목이 걷지 못할 정도로 부었는데 산을 내려가겠다는 판단을 제정신으로 할 리 없다.
로웰이 머리를 헝클었다.
“제가 수습할게요.”
“무슨 수로?”
“가서 설득을 해 보면…….”
“도착하자마자 어디 갇힐걸.”
목이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스프라우트 공작이라면 지하 감옥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저 하나로 분이 풀린다면 나쁘지 않네요. 공작의 동맹과 맞먹는 가치가 제 몸에 있는 거잖아요.”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는 모양이다.
“내가 쓰레기로 보여?”
“예?”
“아니면 시험하는 거야? 널 스프라우트 공작에게 팔아넘기라며. 누구한테 투자는 해 봤어도 누굴 팔아 본 적은 없는데.”
로웰이 갑자기 웃었다. 난 그가 실성한 건가 싶었다.
“전하, 전하를 만나기 전까지 전 어디 팔아넘길 가치도 없었어요. 전하께서 절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잖아요.”
“…….”
투자를 맡긴 거? 그거라면 로웰의 능력이다. 망하려고 골라잡은 몇 개를 제외하면 로웰이 고른 투자처니까.
“태어나 보니 상단의 막내아들이라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전하께서 보시기엔 우스운 정도겠지만요, 기대받는 것도 책임질 것도 없어서 잘 컸거든요. 위의 형들이 멍청해 보이긴 해도 제가 받을 유산에 지장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살다 보니 평판은 망가졌지만…….”
“…….”
“누가 절 어떻게 보든 아무래도 좋았거든요. 하지만 전하께서 절 괜찮은 사람으로 보셨잖아요.”
내가 그랬나? 그냥 로웰은…….
“……전 그렇게 되고 싶어졌어요.”
그가 말을 맺었다.
“넌 처음부터 괜찮은 사람이었어.”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전하뿐이에요.”
그가 다시 웃었다. 얼굴이 활짝 펴져서, 상대까지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미소였다.
처음부터 로웰이 괜찮은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기당하는 사람을 못 지나칠 만큼 좋은 사람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저는 전하께 계속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요. 쓸데없이 감정을 흘리고 다녀서 전하를 난처하게 하지도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가치가 있는.”
그가 중얼거리더니 씩 웃었다.
“저도 꽤 충성스럽네요.”
“알아. 언제나 그랬잖아.”
“예?”
“그러니까 널 싸게 팔지 마.”
도덕이나 상식에 따른 판단이 아니다. 사람을 누구한테 넘기고 대가를 받다니 야만적이라느니, 그런 판단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내가 싫다.
로웰을 넘기면 스프라우트 공작의 분노가 누그러들지도 모른다. 그가 로웰의 가죽을 벗기든 공개 처형을 하든 뭐 어떻게 처분할지는 잠시 잊자.
그는 로웰을 데려가서 분을 풀고, 모욕을 씻게 해 준 내게 병사들을 보내 지원할지도 모른다.
그럼 로웰을 줄 수 있나?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