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파벨은 침을 삼켰다.
아직도 그 아찔한 시간이 떠올랐다. 에드워드의 방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죽다 살아났다. 그가 살아서 그 방을 나온 건 천운이 따라서일 것이다.
파벨은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공포에 질려 방에 틀어박힌 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았다. 그가 외부의 소식을 듣기 시작한 건 얼마 전부터였다. 밀라네 왕비의 죽음과 조프리 왕자의 희생은 셔벗 사람들도 매일같이 입에 올릴 만한 파장이 있는 사건이었다.
파벨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왜 그를 죽이려 들었단 말인가?
조프리 왕자는 그의 경쟁자가 아니던가? 약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면 좋아해야 하지 않나!
형제라고 편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왕실의 위엄이 실추된다고 여겼는지도. 생각은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서, 파벨은 어쩌면 조프리 왕자가 에드워드를 사주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조프리 왕자는 파벨이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당연히 알려 주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 조프리 왕자가 셔벗에 건너왔다니? 어쩌면 셔벗의 왕좌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니?
그가 왕이 되어선 안 된다. 파벨은 조프리 왕자가 차지한 셔벗에서 결코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파벨은 미셸의 귀에 속삭였다. 그가 알고 있는 왕자의 치명적인 약점을.
미셸의 어깨가 굳었다.
“그게 사실인가? 왕자가 남색을 한다고?”
“틀림없습니다. 그가 그토록 악독하게 제 입을 막으려 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바람둥이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있지만 실은 남자만을 사랑하는 성향을 지닌 게 틀림없습니다. 그가 어떤 자들을 곁에 두는지 보십시오. 아카데미에서도 곁에 잘생긴 남자만을 두기로 유명했습니다. 왕자에게 접근하는 놈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왕자와 술자리라도 가져 본 건 저 정도 되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얼굴을 밝히는지 아시겠지요?”
파벨은 말하며 스스로 설득됐다. 미셸이 파벨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파벨이 그만한 미남인가? 조프리 왕자는 심미안이 뛰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비스코티인에게 뭘 바라겠는가?
어쨌든 파벨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할 나위가 없다.
남색자 주제에 왕위를 넘본다고!
미셸은 기사였다. 그는 상대의 약점을 물어뜯는 방식으로 토너먼트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조프리 왕자는 그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 * *
연회장 밖으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사신단 전체를 연회에 초대했다. 연회의 명목 자체가 ‘사신단 환영’이 되는 셈이었다. 왕이 못을 박음으로써 사신단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건 물론 준귀족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뿐이었지만.
사신단 일행은 두셋씩 모여 입장하기로 했다. 난 알렉스와 로웰을 곁에 뒀다. 그들을 양쪽으로 낀 채 입장을 기다리고 있으니 아카데미가 떠올랐다. 그땐 나서서 평판을 망치려고 했는데.
비스코티에선 하등 도움도 안 되던 게 셔벗에 와서 말썽이었다. 셔벗 사람들은 비스코티인 이상으로 소문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디서 내 소문이 퍼지는지 모르겠다.
역시 성주의 하인인가?
하지만 하인은 두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전하께서 제게 친절히 대해 주셨는데, 그 밤에 대해 제가 함부로 떠들 리가요!’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어?’
그 밤이 어쩌고 하는 말? 난 뜨악했다.
‘아니요! 주인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전하께선 훌륭한 분이라고만 말씀드렸어요.’
내가 그에게서 정보를 캐 갔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누구한테 붙어야 이득일지 아는 하인이다.
난 그에게 돈주머니를 주고 돌려보냈다.
역시 소문의 출처는 이 하인이었던 것 같다…….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까. 셔벗에서 귀족이 하인과 잠자리를 하는 일 같은 건 추문도 아니었다. 내 취향에 대한 억측만 퍼졌을 뿐이다. 이걸로 사신단 일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 같긴 한데…….
내 마음은 찝찝했다.
로웰이라면 나보다 더 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어 왔을 것이다. 그는 미인이라면 다 좋아한다는 평이었는데, 소문만큼 공사 구분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셔벗 사교계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난 로웰을 돌아봤다.
그는 한숨을 내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었다.
“긴장되세요, 전하?”
“긴장은 네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표정이 굳어 있다. 난 그를 달랬다.
“말했잖아. 내가 너한테 실망할 일은 없어.”
“이미 기대치가 바닥이어서요?”
로웰은 시니컬하게 말했지만 이내 웃었다.
“하긴. 첫 단추부터 글렀는데요. 연회장에선 좀 놀라실지도 몰라요.”
하인이 외쳤다.
“비스코티의 조프리 2왕자 전하 입장하십니다! 바움쿠헨의 알렉스 경, 몽블랑의 로웰 님 입장입니다!”
난 누구도 에스코트하지 않고 홀로 들어섰다. 알렉스와 로웰은 내 뒤를 따랐다.
성주 부부는 손님맞이를 하고 있었다. 내가 등장하자마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조프리 전하! 연회의 주인공이 오셨군요!”
“환대에 감사하네.”
왕의 명령으로 열린 연회다. 왕이 얼굴을 비칠 거라는 정보가 알려져서 이토록 많은 귀족들이 모인 것이다.
당연히 이 연회의 주인공은 왕이었지만, 명목상 주인공은 나와 사신단이 맞았다.
성주 부부는 우리를 지극히 반겼다. 다른 귀족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우리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부채 너머로 미소 짓는 눈이 보였다. 나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태연한 척했다. 트집만 안 잡히고 가면 오늘 사신으로서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오오, 세상에. 피넛 성주. 전하께 본인을 소개할 영광을 받아도 괜찮겠습니까?”
“전하, 소개드리겠습니다. 이쪽은 윌넛 백작입니다. 누구나 아는 은광의 소유자이지요. 사업에 관심이 많아 여러 상단을 휘하에 두고 있으니 전하께서도 아마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윌넛! 그대의 위명은 익히 들었네.”
난 알은척하며 로웰을 바라봤다. 그가 귀엣말로 정보를 전했다.
“상단이 아니라 사채업이에요. 하지만 셔벗 동부에서는 손에 꼽게 부유한 영주이니 알아 두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여기도 사채업이 유행이야?
난 기가 질렸지만 웃으며 백작을 상대했다. 다른 귀족들은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가 내게 얼마나 금칠을 해 주던지 이 나라가 비스코티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환영 연회라고 했지만, 이런 분위기가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한숨을 내쉬자 로웰이 알렉스의 팔을 툭 쳤다.
둘은 잠깐 아웅다웅했다. 그러더니 알렉스가 지나가던 하인에게서 음료를 받아 왔다. 가벼운 샴페인이었다.
알렉스가 알아서 이렇게 눈치 있는 행동을 했을 리는 없고. 둘이 정말 친해진 모양이었다.
난 목을 축이고 두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때였다.
“에이드의 미셸 경 입장하십니다!”
귀족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입구를 바라봤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깨가 떡 벌어진 장신의 남자가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저 사람이 에이드 공작의 아들이었다.
그는 안을 둘러보더니 성주 부부를 발견했다. 이내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부부가 내 곁에 서 있으니, 이 낯선 일행이 누군지 짐작했을 것이다.
“에이드 경. 연회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기치 못하게 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어 대접이 미흡하진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성주가 재빨리 나섰다. 에이드 경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위아래로 뜯어보고 있었다.
대단히 무례한 시선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씩 웃었다.
“조프리 전하십니까?”
주인의 안내도 없이 인사를 하고 있다. 난 로웰을 돌아보며 물었다.
“셔벗에서는 객이 주인을 무시하는 게 예의인가?”
“결례입니다, 전하. 그런 예의는 대륙 끝에 가도 없을걸요.”
에이드 경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성주에게 정중히 말했다.
“왕자 전하께 나를 소개하고 싶네. 전하께서 나를 모르시는 모양이군.”
“조프리 전하…….”
성주는 곤란한 듯했다. 어느새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어쩐지 분위기가 너무 좋다 했다. 난 몸을 돌려 에이드 경을 마주 봤다.
“피넛 영주. 소개해 주게. 내게 자신을 알리고 싶다니 인사를 받는 게 예의겠지.”
“예…….”
성주는 하는 수 없이 에이드 경을 소개했다.
“에이드 공작의 장남 미셸 님입니다. 전하께도 아시겠지만, 셔벗에서는 매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를 가리기 위한 토너먼트가 열립니다. 에이드 경은 3년 연속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훌륭한 기사입니다.”
“어떠십니까?”
에이드 경은 재미있다는 듯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난 그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셔벗이고 나는 셔벗과의 갈등을 개선하기 위해 왔다.
에이드 공작의 아들과 갈등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야 당연히 없겠지만.
상대는 시비를 걸기 위해 작정하고 다가왔다. 내가 상냥하게 대한다고 나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 같지도 않다.
난 비스코티의 사신이었다. 내가 받는 모욕은 왕국이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난 마음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