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33화 (233/293)
  • 233.

    난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잖아.

    이전이었다면 궁금해하고 혼자 앓았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내 말에 뭐라도 대답해 줄 리 없다.

    하지만 난 그에게 편지하겠다고 말했다.

    아닌가. 반대인가?

    그에게 편지를 하라고 했다…….

    내가 물어보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아마도.

    난 앉아서 펜을 들었다.

    -잘 지내? 난 잘 지내고 있어. 셔벗에 무사히 도착했고 과정에 위험 같은 건 없었어. 셔벗 왕이 나를 맞으러 국경까지 나왔는데, 왜 이러는지 생각나는 거 있어? 후계 구도 이야기를 꺼낸 건 무슨 의미였어? 적어도 그레이한텐 설명해 줬어야 할 거 아니야. 설명 부탁해. 답장 기다릴게.

    궁금한 점을 주절주절 쓰다가 다시 읽어 봤다. 편지라기엔 좀…….

    이건 왕성 내에서 주고받던 쪽지가 아니다.

    거기선 원하면 에드워드가 어쩌고 있는지 유추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지 대신들을 괴롭히며 그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건강하게 지낸다고 말해 줘.

    난 덧붙이고 병사를 불렀다. 그에게 가장 빠른 말을 붙인 뒤, 에드워드에게 편지를 전달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는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난 방을 한 바퀴 돌고 침대에 누웠다. 갑자기 후회가 찾아왔다.

    역시 첫 편지라기엔 내용이 삭막하지 않나?

    일단은 애가 어쩌고 사는지 먼저 물었어야 하지 않나. 거의 업무 보고 아니었어?

    난 병사를 다시 부르려고 했으나 그는 이미 떠난 뒤였다.

    뭐 이렇게 빨라! 원래 안 그랬잖아?

    내가 끌고 온 병사들은 정예병이 아니다. 하나를 시켰을 때 반이나 해내면 다행이라며 바움쿠헨 백작이 감탄한 적도 있었다.

    “누굴 찾으십니까, 전하?”

    바움쿠헨 백작이 물었다.

    병사 훈련을 잘 시켰다고 나무랄 순 없어서, 난 그를 칭찬했다.

    “역시 백작이야. 병사들의 기강이 훌륭히 잡혀 있군.”

    “감사합니다?”

    * * *

    하지만 아무리 빠른 말과 정예병이라도 하루 만에 답장을 가져올 순 없었다.

    성주는 우리에게 환영 연회에 초대한 손님 명단을 넘겼다. 급작스럽게 치르는 연회인데도 근방의 유력 귀족들은 대부분 참여하는 듯했다.

    왕이 주최하는 연회인데 빠지기도 싫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긴 명단을 외워야 했다.

    그 명단에 새로운 손님이 추가된 건 연회 전야였다.

    성은 소란스러워졌다. 초대 명단에도 없던 손님이 어마어마한 호위 병력을 이끌고 성을 찾은 것이다.

    예의 없는 손님이었지만, 성주는 손님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그 손님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까지 했다.

    “비스코티의 조프리 전하께서 양국의 평화를 위해 친히 오셨는데, 이 땅의 신하가 되어 어찌 맨발로 나와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나?”

    문제의 손님은 에이드 경이었다.

    셔벗에는 세 명의 공작이 있었다. 그중 셔벗 왕의 후계 구도에 자기 아들을 올릴 수 있는 공작은 둘뿐이었다. 한 명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두 명의 공작 중 한 명이 에이드 공작이었다.

    에이드 경은 그의 아들이다.

    셔벗 왕의 건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내가 이 나라에 오는 것만으로도 셔벗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다.

    설마 얼굴도 본 적 없는 에이드 경이 내가 정말 반가워서 맨발로 달려왔을 리 없으니까.

    * * *

    에이드 공작의 아들 미셸 에이드는 비스코티에서 조프리 왕자가 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필리프 왕은 밀라네 공주의 죽음에 분노해 비스코티를 응징하리라 천명했다. 왕의 정예군이 벌 떼처럼 일어나 국경으로 향했고 비스코티는 두려움에 떨었다.

    미셸 에이드는 기사였다. 그것도 왕이 주최한 토너먼트에서 3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할 만큼 뛰어난 기사였다.

    드디어 비스코티를 정복하나! 미셸은 선봉에 설 자신이 있었다. 그가 전장에서 공을 세운다면 왕은 그를 달리 보게 될 것이다.

    애매하던 후계 구도는 공고해질 것이고 대신들도 미셸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리라. 유약한 콜린은 검을 들 배짱도 없을 것이다.

    “제가 출전하겠습니다, 아버지.”

    미셸은 에이드 공작에게 고했다. 그러나 공작은 인상을 쓰고 말했다.

    “경솔하게 굴지 마라!”

    “하지만 아버지!”

    “어찌 너는 참을성이 없느냐? 생각이 짧으면 행동이라도 진득할 것을. 저 왕이 타국의 영토를 탐낸 적이 있었더냐? 생각을 해 보아라!”

    미셸은 꾸중을 듣고 물러났다. 그러나 내심 아버지가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비스코티는 엉망이지 않은가? 내란에 빠진 나라만큼 갈라 먹기 쉬운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 전쟁에는 완벽한 명분까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고, 필리프 왕은 비스코티에 사신을 보냈다. 조프리 왕자를 보내 밀라네 공주의 죽음에 대해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미셸은 이러한 굴욕적인 일을 비스코티가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스코티는 시간을 끌더니 결국 굴복했고, 조프리 왕자를 보내고야 말았다.

    한심하다!

    미셸은 비스코티의 추태에 혀를 찼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식을 듣고 미셸을 불러들였다.

    “지난달에 폐하를 뵈었을 때, 그분이 달리 네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필리프 왕은 공자들을 가끔 성으로 불러 대화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아무도 겉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필리프 왕의 시험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필리프 왕은 도통 속을 모를 인물이어서 미셸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셸은 자신이 늙은이들의 마음을 살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코크 공작의 아들 콜린은 미셸과 달리 조용한 성격이었다. 어렸을 적 콜린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미셸은 콜린이 말수 적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진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겁이 많기 때문이다. 실수할까 봐 겁나서 왕 앞에서도 입을 떼지 않는 놈.

    필리프 왕이 미셸의 성격을 아주 좋아하지 않을 순 있어도, 콜린보다는 낫다고 판단할 것이다.

    셔벗은 강국이었다. 동부의 패자. 강한 나라를 다스리려면 강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미셸은 믿었다.

    “늘 그렇듯 최근에 무엇을 배웠는지 물으셨습니다.”

    “무어라 답했지?”

    “아시잖아요.”

    미셸은 입을 삐죽거렸다. 매번 지겨우시지도 않은가?

    공작이 호통쳤다.

    “제대로 말해!”

    “영지를 다스리려면 영지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배워 실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미셸은 놀라서 대답했다. 그는 늘 왕 앞에서 아버지가 일러 준 모범 답안을 얘기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답안이 왕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왕은 평소처럼 ‘훌륭하구나.’ 하고 미소 짓고는 콜린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으니까.

    아버지도 왕의 마음에 차는 대답은 떠올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야 그냥 미셸이 원하는 대로 답하는 게 낫지 않나? 신선한 대답을 왕이 기꺼워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미셸은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질문을 하시긴 했는데요.”

    “무엇이냐?”

    공작은 아들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사실 미셸 정도면 객관적으로 떨어지는 자식은 아니다. 오히려 또래 중에는 발군인 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군으로 이름 높은 필리프 왕의 눈엔 차지 않는 아들이었다.

    기대라는 건 주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어서, 공작은 자기 아들이 콜린 코크보다는 낫다고 여기면서도 매번 한심스러웠다. 아들이 몸을 쓰는 만큼 머리를 쓸 줄 알았다면 셔벗의 차기 왕좌는 이미 아들의 것이었을 터였다.

    아들은 둔하게 대답했다.

    “신문을 읽어 보았냐고…….”

    “신문?”

    그 말이 그 뜻인지 미셸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비스코티를 위협한 군대는 왕의 정예병이었다.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면 다른 귀족들은 전면전을 각오하고 군사를 그러모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귀족원에 요청하지 않았고, 이 분노가 왕의 복수임을 분명히 했다.

    거기에 흉악한 속셈이 있을 줄 미셸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는 쏜살같이 말을 달려 왕을 만나러 갔다. 눈에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온 파벨레 상송이 헉헉거리며 말에서 내렸다.

    미셸은 파벨 무리에게 평소 관심이 없었으나, 파벨이 비스코티에서 얼마 전 돌아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는 유학을 간다고 시끄럽게 굴다가 금방 셔벗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이유야 알 바 아니었다. 학사 경고라도 받고 수치를 이기지 못해서 휴학한 모양이지.

    중요한 건 파벨이 조프리 왕자를 안다는 사실이었다.

    파벨은 조프리 왕자가 셔벗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셸은 그 반응이 흥미로웠다. 조프리 왕자는 인품이 바르고 영리하며, 상재가 뛰어난 데다 백성을 아끼는 인물이라는 평이었다.

    상상의 동물도 아니고. 머리는 범처럼 생기고 몸은 뱀 같으며 다리가 넷이고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말하지그래? 미셸은 그런 말도 안 되는 평판은 믿지 않았다.

    “그자가 정말은 어떤 인물인가?”

    “저를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셔야 합니다.”

    파벨은 넋을 놓고 있는 듯하더니 갑자기 확답을 받으려 들었다.

    미셸은 불쾌해졌으나 겉으로는 쾌활한 척 말했다.

    “내가 내 사람을 버려둘 것 같은가? 뭘 그렇게 겁을 먹어? 어디, 왕자의 약점을 잡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야.”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뭐라고? 미셸은 미끼도 끼우지 않은 바늘로 대어를 낚은 기분이었다.

    “그 말 자세히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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