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13화 (213/293)
  • 213.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귀족들을 상대로 한 협박은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그 다음은 항복하면 좋은 점을 알리는 것만 남았다. 파이 공작을 어떻게 선전해야 하는데.

    나는 궁으로 돌아갔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용병들이 에드워드의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검으로 용병을 경계하다가 나를 보고 외쳤다.

    “전하! 이자들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응. 지금까지 수고했어. 이제 내 궁을 지키는 건 그만두고 원래 임무로 돌아가.”

    에드워드의 이름이 나올까? 뜻밖에도 병사들은 머뭇거리면서도 검을 검집에 넣었다.

    “저희 모두 원래 임무로 돌아갑니까?”

    “응. 한 명도 빠짐없이.”

    “예, 전하. 명에 따르겠습니다.”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난 그들이 물러가는 모습을 봤다. 에드워드의 병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궁인들도 궁에서 고개를 내밀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용병들은 어색하게 궁 앞에 서 있었다. 난 그들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정말로 다 가 버렸네.

    도트가 달려 나왔다.

    “왕자님! 어떻게 하셨어요?”

    “잘…… 해결됐나?”

    “예?”

    도트는 나와 함께 어리둥절해했으나, 이내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역시 왕자님이세요! 굴복시키셨군요!”

    누구를?

    난 아무도 굴복시키지 못한 것 같고, 애초에 그러려는 의도도 없었지만.

    “저녁에 에드워드가 올 거야. 식사 준비해 줄래?”

    “예? 예, 왕자님.”

    도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더니 알렉스에게 열심히 눈짓을 보냈다.

    알렉스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까? 나도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건 에드워드가 정말 이상한 애라는 것뿐이다.

    지금도 머리가 멍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너무 화나서 아까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뒤늦게 심장에 반응이 왔다.

    에드워드는 내게 왕위를 주겠다고 했다.

    왕은 정말 죽었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내가 궁금한 건, 죽었다면 대체 언제냐는 거였다…….

    * * *

    “제가 이곳까지 와도 됩니까?”

    파이 공작이 곤란한 듯 물었다. 알렉스가 한 팔로 그를 잡고 있었다. 공작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좀 연행 같기는 했다.

    “예. 이제 스승님의 처지를 어떻게 선전할지 같이 생각해 봐요. 공식 석상에서 에드워드와 친밀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작은 상상하는 듯했다. 그가 인상을 썼다.

    “친밀한 모습이라면…….”

    “에드워드에게 아부하고 곁에 붙어 있는 거죠.”

    “…….”

    공작이 침묵했다.

    생각해 보니 에드워드가 받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면 제게 해 주셔도 되고요.”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기자 회견이라도 해 볼까요?”

    “그편이 낫겠습니다.”

    공작이 바로 동의했다.

    “기자 앞에서 아부하는 게 더 민망하지 않으세요?”

    “아부를 꼭 해야 하겠습니까?”

    “다른 생각 있으세요? 간신처럼 보이셔야 하잖아요.”

    “…….”

    어쨌든 권력에 아부해서 살아남았다는 인상을 줘야 할 텐데. 파이 공작이 잘 할지 모르겠다.

    내가 관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긴 하지만, 공작은 딱 봤을 때 누군가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공작은 침묵을 지키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두 분 전하의 관계는 제가 생각하던 것과 다른 것 같더군요.”

    뭐라고 생각했길래 저렇게 말하는 걸까?

    “어떻게 보였는데요?”

    “그분을 신뢰하십니까?”

    “그 말 스승님까지 포함해서 수십 명에게 들은 것 같아요.”

    과거까지 통틀어 보면 그쯤 될 거다. 에드워드와 내 신분이 왕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보통 왕자 욕을 왕자 앞에서 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상사 앞에서 다른 상사 욕하는 거랑 비슷하지 않나?

    “안 믿어요.”

    그냥 대답했다. 파이 공작 앞에서 내 생각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비님 일은 유감입니다.”

    “…….”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의 측근들은 처형됐고, 폐하를 모시던 궁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궁에서 왕비님의 최후를 알고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에드워드가 그 일에 연관되었기 때문에, 증인을 제거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마 남아 있는 사람들 중 그날의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왕비 전하를 모시던 시녀들일 겁니다.”

    파이 공작이 말했다.

    “그들을 불러들여 물어보십시오. 전하께서 지신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 *

    그레이와 이델라는 어느 여관을 올려다봤다. 3층 높이의 여관은 좋게 말해서 아담한 정이 있었고 나쁘게 말해 낡았다.

    평소라면 그레이가 이런 냄새나는 장소에 들어갈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냄새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고, 이델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흉흉한 얼굴로 건물 안으로 쳐들어갔다.

    “이 건물이 맞나?”

    “그렇습니다, 도련님.”

    “몇 호라고요?”

    “꼭대기 층 오른쪽 복도 마지막 방입니다, 아가씨.”

    여관 주인이 고개를 연신 숙이며 말했다.

    “열쇠는?”

    “이쪽에, 그런데 이게 뭉치로 있어서…….”

    여관 주인은 열쇠 뭉치를 꺼내다 떨어뜨릴 뻔했다. 크래커의 기사 머랭 경이 재빨리 낚아챘다.

    그레이가 명령했다.

    “가자.”

    “저, 저기, 제가 주인인데 열쇠가 없으면……. 어이쿠! 잘 사용하고 돌려주십시오.”

    여관 주인은 머랭 경에게 금화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여관이 조용해지자, 세 사람은 계단으로 올라갔다. 분노로 인해 피가 빠르게 돌고 심장이 뛰었다. 냉정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으나 발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누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마음이 맞았다. 이 작자를 도망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

    3층 복도 끝 방에 도착했다. 그레이가 쳐다보자, 머랭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델라에겐 익숙한 목소리였다. 얼굴이 파래진 그녀가 찾는 사람이 맞는다는 신호를 보냈다.

    머랭 경은 열쇠로 문을 땄다. 안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누구야! 멋대로 지금 뭐 하는 짓……. 이델라?”

    방에 있던 남자가 놀랐다. 이델라는 싸늘하게 말했다.

    “아버지. 전하의 기사, 아버지가 파셨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내 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걸, 아버지가 되어서 말 좀 보태 줬을 뿐인데.”

    에클레어 남작은 불쾌해했다. 그가 이델라 뒤의 두 사람을 돌아봤다.

    “이보시오. 초대도 하지 않은 손님이 멋대로 들어오다니. 그대들이 그러고도 귀족이오? 예의가 아니지 않소? 자기소개도 않고…….”

    “전하를 팔고도 이런 곳에서 묵는다고?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 아닙니까?”

    그레이가 이델라를 돌아봤다.

    “어느 신문에 팔아도 거금을 벌 정보인데요. 이 작자가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고서야.”

    그레이는 경멸하듯 방을 둘러봤다. 이델라는 당황했으나, 곧 그레이의 의도를 깨닫고 장단을 맞췄다.

    “제 아버지가 그렇게 어리석은 분은 아니죠. 그러리라 믿어요. 물론 사기를 당해서 집안 재산을 다 말아먹긴 하셨지만…….”

    “그놈이 작정하고 사기를 쳤어!”

    에클레어 남작이 버럭 화를 냈다.

    “사기당한 게 죄냐? 그놈이 사기꾼이었다고! 하지만 이번엔 달라! 어딜 평민이 귀족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겠느냐? 그 기자가 금괴를 가져올 거란 말이다. 그럼 빚을 탕감할 수 있어!”

    “그렇구나.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또 저를 파셨군요.”

    이델라가 말했다. 짐작은 했으나, 역시 아버지의 짓이었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아버지에겐 아무런 기대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그녀는 비참해졌다.

    에클레어 남작은 이델라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붉어진 이마가 드러났다.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매정하고 저만 아는 소리를. 네가 우릴 버리고 떠났을 때도 우린 너 안 끌고 왔다. 자유를 줬단 말이다! 우린 빚에 시달리며 굶고 있어도 넌 공부하라고, 응? 그런데 넌 결혼도 하지 않겠다, 취재도 싫다…….”

    “더 들을 필요가 있어요?”

    그레이가 물었다. 이델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정도 거둬들였다.

    “아니요.”

    “죄인으로 처벌하죠.”

    그레이의 명이 떨어지자, 머랭 경은 팔을 걷고 나섰다. 건장한 기사가 앞을 가로막자 에클레어 남작은 주춤 물러났다.

    “뭐, 당신들 무슨…….”

    “잠시만요.”

    이델라가 가로막았다.

    “뭡니까? 부모라고 보호하고 싶은 거라면 나가 있어요.”

    그레이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델라가 말하려는 건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다.

    “입은 남겨 두셔야 해요. 기자의 행방을 들어야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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