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96화 (196/293)
  • 196.

    “전하, 그게 아니라요. 제 말은 요양차 따듯한 나라에 가 계시지 않겠냐는 거였어요. 따듯한 햇살을 보면 기분도 좋아질 테니까요.”

    로웰이 열심히 말했다.

    “여행 좋지.”

    “그렇죠?”

    그가 활짝 웃었다.

    “저희 상단에서 별장도 취급하니까요. 원하는 장소만 말씀해 주시면…….”

    “장사꾼이네.”

    “예? 아니, 전하, 오해세요!”

    “맞아요, 왕자님. 저런 장사치 상대하실 필요 없어요.”

    도트가 아무렇게나 맞장구쳤다.

    “장사꾼 앞에 ‘훌륭한’을 붙이는 걸 빼먹었어.”

    “…….”

    “로웰 씨, 얼굴이 붉어졌어요.”

    이델라가 말했다.

    “취기가 올라서 그래요.”

    로웰이 얼굴을 가렸다.

    “바람 쐴래?”

    “전하, 지금 저보고 같이 바람 쐬러 나가자고 말씀하신 거예요?”

    “같이 나가 줘?”

    “그게 아니라…….”

    걷지도 못할 만큼 취한 건가 했는데, 로웰은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웃기 시작했다.

    “아, 정말. 바보 같아. 전하, 괜찮으세요?”

    “뭐가?”

    졸린데 자꾸 장미가 보였다. 로웰 바로 옆에 화병이 있었다. 장식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 괜히 에드워드가 떠올랐다.

    “에드워드 전하랑 정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잔을 잘못 건드려서 떨어뜨릴 뻔했다.

    “왜?”

    “두 분 뭔가 더 일이 있으셨던 거죠? 그분을 믿지 않으셨잖아요. 문제가 있다면, 혼자 고민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가 도움 안 된다고 생각하셔도요.”

    “그런 건 아니야. 문제라고 할 건…….”

    있지만.

    “저 말 잘 듣는데.”

    로웰은 턱을 괴고 웃었다. 두런두런하던 대화 소리가 끊겼다. 다들 조용했다. 춥고, 사람은 많고, 멍했다. 난 안전하다.

    “대전에서 폐하를 대면하고 있을 때, 에드워드가 왔어. 난 무릎을 꿇고 있었고, 아팠고, 좋지 않았는데.”

    “…….”

    “에드워드가 날 구했어.”

    그때 얼마나 두려웠는지는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날 안아 든 순간, 내가 얼마나 두렵고…… 안도했는지.

    이 세상이 나를 안은 기분이었다.

    그건 그때의 내가 아니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일 것이다.

    “그래서 믿기로 했어.”

    로웰은 망연한 표정이었다.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 얘기 때문인지 에드워드에 대한 감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 주변 사람들은 에드워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왕비님부터, 지금의 로웰까지.

    로웰은 에드워드에게 별 감정이 있진 않았는데, 지금은 싫어하는 것 같다.

    누가 들어도 에드워드를 믿게 될 만한 이야기 아닌가?

    로웰은 내가 속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아. 그리고 에드워드가 날 좋아한다고 말했어.”

    “예?”

    에드워드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알려 주려고 했는데, 방 분위기는 더 이상해졌다.

    “그래서요?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말을 했나?

    무슨 일이 있긴 했지만.

    난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그게 다야.”

    로웰이 머리를 감싸 쥐더니, 갑자기 테이블 너머로 내 손을 잡았다.

    “전하, 저도 전하를 좋아해요. 아시죠?”

    무슨 말을 원하는 거지?

    “전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전하께 꼭 좋은 사람은 아닐 수도 있어요.”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알렉스가 로웰의 목을 잡았다.

    “그 손 떼라.”

    “켁! 악! 잠깐만!”

    알렉스 앞에 수많은 빈 병이 놓여 있었다. 저걸 다 마신 건가?

    눈이 마주치자, 알렉스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전하. 저, 저도…….”

    “응?”

    “전하! 전하의 기사가 절 죽여요!”

    알렉스는 입을 꾹 닫더니, 로웰의 목덜미를 잡은 채 공중으로 들었다. 옷만 잡아서 사람을 띄우는 게 가능한 일이었다. 로웰은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두 사람이 장난을 치고 있는 동안, 도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혼자 납득한 듯 방긋 웃었다.

    “하긴, 뭐 그런 일이 흔하겠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이델라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앗. 잠시 전대 왕조 계보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와아, 기말고사 범위네요.”

    이델라가 우울해했다.

    다들 아카데미로 돌려보내 줘야 하는데.

    에드워드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거기에 나는 필요 없다고.

    * * *

    새벽에 깼다. 난 침대에 웅크려 누워 있었다. 옆방에서 언제 침실로 넘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침실엔 나밖에 없었다.

    옆방을 열어 봤다. 사람은 없었다. 각자 자리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깨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밖으로 나가자, 졸고 있던 병사가 눈을 떴다.

    “전하? 어디 가십니까?”

    난 입에 검지를 댔다.

    “산책 다녀올게.”

    “이 밤에요?”

    “따라오지 않아도 돼.”

    왕비궁은 멀지 않았다. 잠깐 다녀오는 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목이 타고 멍한 기분이었다. 다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병사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명령을 무시할 순 없고, 그렇다고 그냥 보낼 수도 없는 듯했다. 거리를 두고 따라올 것 같다.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대화 소리가 컸던 모양이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문이 열렸다. 알렉스는 취기가 남지 않은 얼굴이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전하.”

    난 고개만 끄덕였다.

    왕비궁을 지키던 병사는 나를 알아보고 길을 비켰다.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길을 맞게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응.”

    “힘드시면 제가 업겠습니다.”

    아. 그쪽.

    알렉스는 충실한 기사였다. 내 시종들도 충실한 건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내가 왕비님을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효자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그런 믿음을 갖게 됐는지 모르겠다.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어떻게든 사실에 도착했다. 난 탁자 위에 램프를 내려놓았다. 희미한 조명을 통해 본 조프리의 초상은 낮에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런 얼굴이었구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사람은 아주 작은 부분만 변해도 인상이 달라 보인다. 난 어린 조프리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표정은 정말 화가의 솜씨일까? 조프리는 딱딱하고 불편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늘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였다면.

    “알렉, 저 애 나랑 닮았어?”

    “예, 전하. 전하가 아니십니까?”

    “맞아.”

    왕비님이 알았을 리 없다.

    “나보다 섬세하게 생긴 것 같은데.”

    “전하께서는 섬세한 분입니다.”

    그건 아니고…….

    알렉스가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쳤다. 춥진 않았지만.

    “허약이랑 섬세는 다른 의미인데.”

    “예? 압니다.”

    진짜 아는 거 맞나?

    왜 여기까지 다시 왔는지 모르겠다. 잠시 서 있었다.

    “내가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해?”

    주어를 말하지 않아도 알렉스는 알아들었다.

    “슬퍼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닌데.”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의아했다.

    돌아보자, 알렉스는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전하를 안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뭐 그런 걸 물어봐?”

    이상한 걸 묻는다. 알렉스는 어색하게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만두라는 소리가 아니라…….

    알렉스를 끌어안자, 잠시 뒤 그가 내 등에 팔을 둘렀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날 지켜 줄 거야?”

    “전하께서는 좋은 분입니다.”

    “아니야.”

    “…….”

    “난 슬퍼할 자격도 없어.”

    화병에 장미가 장식되어 있어서 에드워드 생각이 났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왕비궁의 관리를 보내고 수레를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를 믿는다. 그렇지만, 그가 왕비님을 증오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왕비님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왕비님이 돌아가셨을 때, 에드워드는 알렉스에게 누명을 씌워 내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이델라와 날 ‘이간질’했다.

    그는 나를 살렸지만, 정말로, 조금도…….

    날 해칠 마음이 없었을까?

    왕비님은?

    술은 시름을 잊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생각은 또렷하게 떠올랐다.

    에드워드에게 말해야 하는 게 이렇게 많은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 평온하고 좋은 상태로 있고 싶다.

    좋은 말을 믿고 싶다.

    아니.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내면, 모든 일은 나쁜 방향으로 흐른다.

    다른 생각이 동시에 든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다고 큰 깨달음을 얻고 바뀌는 일은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난 두려운 것 같다.

    한 걸음 들어가서, 에드워드에게 진실을 묻는 게 두렵다.

    에드워드가 왕비님을 해쳤다면? 해치지 않았대도. 복수하려 했다면?

    내게 복수할 자격이 있나?

    내가 에드워드를 계속 볼 수 있을까?

    “슬퍼하는 데 자격이 필요합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어?

    “그건…… 아니지.”

    “제가 스승님의 양자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제게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그래?”

    바움쿠헨 백작에겐 못 들은 얘기다.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그렇겠지.”

    넌 17대 1도 이기잖아.

    “전하께선 따듯한 분이라 국법으로 손목이 잘렸어야 할 도둑에게 검을 쥐여 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천한 자라는 사실을 아시면서, 전하의 곁을 허락하셨습니다. 누군가 전하께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저는 그자를 처벌할 겁니다.”

    “…….”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슬퍼하고 계시니까…….”

    알렉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했다. 말을 유창하게 잘한다 싶더니 머릿속에서 꼬인 모양이다.

    바움쿠헨 백작은 연설 교육 같은 것도 안 시킨 모양이다. 검 말고 가르친 게 뭘까? 알렉스는 용케 선량하고 반듯한 기사로 컸다.

    그는 내가 슬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한밤중에 여기까지 찾아와 놓고,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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