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95화 (195/293)

195.

정문으로 들어가자 청소를 하던 하인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우리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난 몇몇이 안도의 빛을 띠는 걸 봤다. 눈시울을 붉힌 하인들은 소매로 눈가를 찍거나 몸을 돌렸다.

그들은 나를 보고 안도하고 있었다.

조프리가 왕비궁으로 돌아와서?

반역이니 하는 일들이 끝났고, 그들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받게 돼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난 그들을 지나쳤다.

왕비님이 차를 마시던 방으로 들어섰다. 난 왕비궁을 잘 알지 못하지만, 왕비님이 좋아하는 장소 두 군데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과 궁 외부의 정자.

둘 다 아름다운 장소였다. 왕비님이 꾸미기를 즐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심미적인 즐거움을 위해 씀씀이를 아끼는 분은 아니었다.

값비싼 차와 달콤한 디저트. 곁에 둘러앉은 시녀들과 아름다운 드레스, 그 한가운데서 나를 바라보던 왕비님.

문을 열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이상하게 여겨졌다.

난 방향을 돌려 정자로 향했다. 외부로 가는 동선은 비효율적이었다. 뒤를 따르는 행렬이 거추장스러웠다. 알렉스가 내 손을 잡았다.

“전하. 달리면 몸에 무리가 갑니다.”

그는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대로 정자에 갔다. 찻잔 하나 놓여 있지 않은 테이블을 보고, 지나는 길에 연못을 통과했다.

궁이 넓고 텅 비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비님을 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지금 왕비님을 내가 보러 가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난 조프리가 아니다.

“전하, 사실로 안내할까요?”

관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님과 함께 묻을 물건.

죽은 사람에게 현실의 물건은 의미 없겠지만, 그걸 준비하는 게 조프리의 일이니까. 난 조프리로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조금 더 빨리 그랬다면 좋았을걸.

왕비님이 친밀한 손님과 대화하는 사실은, 왕비님 취향이라기엔 조금 좁았다. 실내 장식이 많지 않아서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더욱 눈에 띄었다.

어린 조프리를 그린 그림.

처음엔 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이런 그림을 그리게 한 기억이 없었다. 초상화를 그릴 때 꼭 모델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왕비님이 대상 없이 모사한 그림을 그리게 시킬 것 같진 않았다.

어린 조프리는 어른스러운 표정이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건지, 화가의 재량으로 모종의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저 그림.”

“예, 전하. 목록에 넣겠습니다. 저 옆에 건 어떻게 할까요?”

옆?

또 그림이 있나 했는데, 액자 안에 들어있는 건 글이었다. 큼직한 글씨로 작문이 되어 있다.

내용을 읽어 보고 알았다. 내가 예전에 드린 답안지였다. 파이 공작 수업에서 칭찬받았다고 왕비님께 가져다 드린…….

계속 가지고 계셨구나.

“저건 됐어.”

“예.”

난 왕비궁을 빠져나갔다.

왕비궁의 궁인들이 복도 근처에 몰려 있는 게 보였다. 궁인들의 담당 구역이 이렇게 뭉쳐 있을 리 없는데.

그들은 법도에 맞게 왕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속이 좋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내가 왕자 취급 받는 건 괜찮다. 하지만 이곳은 왕비궁이고, 지금은 왕비님도 없었다.

* * *

에드워드와 면담을 끝내고 로웰은 바로 전대 왕조의 계보를 찾았다.

학구열에 불타서는 아니었고, 심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가 알기로 왕족의 역사는 근친상간의 역사였지만, 그건 어려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생긴 잘못된 지식일 수 있었다. 로웰은 전부터 발랑 까진 어린애여서 책을 읽어도 거기서 자극적인 정보만 기억하는 버릇이 있었다.

로웰은 책을 넘겼다. 그는 욕하고 싶었다.

어린 로웰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몇백 년 전만 해도 여러 나라에서 왕족들은 보통 가장 가까운 핏줄끼리 결혼했다!

당시 왕족의 피에 특별한 것이 있는지 연구하던 연금학자들은, 왕족의 피에 다른 건 몰라도 유전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발표한 연금학자들은 전부 사형당했지만, 결국 왕조는 대가 끊기지 않았는가?

로웰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당연히 에드워드 왕자는 형제간의 우애를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지 않은가?

‘응. 내가 그 애를 소중히 여기지.’

없겠지?

‘목숨보다…….’

없다!

에드워드는 조프리 왕자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얼마든 조사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당사자에게만 알리지 않는다면.

‘조프리가 몰라야 하는 이유는 알고 있겠지. 셔벗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질수록, 왕성 안팎에서 조프리를 압박할 거야. 셔벗에 가 달라고 하겠지. 조프리가 듣는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아?’

‘가려고 하시겠죠. 그런 분이니까.’

‘그래.’

‘전하를 차라리 외국으로 모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전하를 숭배하는 백성들이 오히려 전하께 위험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로웰은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에드워드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출전까지 하며 형제를 보호하겠다는 사람치고, 행동이…….

아니다!

로웰은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살짝 미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아니, 엄청 하고 있잖아!

* * *

궁으로 돌아가니 로웰과 이델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로웰이 미소 지었다.

“전하, 오셨어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술?”

도트가 중얼거렸다.

테이블 위에는 술이 잔뜩 놓여 있다. 내 궁에서 볼 일 없는 물건이라 처음엔 술병인지도 몰랐다.

“그건 뭐야?”

“생각해 보니까, 전하께서 일어나셨는데 저희가 제대로 된 축하연도 못했더라고요. 전하께서 완치되신 것도 아니고, 귀족들을 부를 순 없겠지만요. 저희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떨까 해서요.”

그렇게 말하는 로웰은 간만에 화사한 차림새였다.

“그래서 꾸미고 온 거야?”

“보기에 괜찮으세요?”

그가 보조개를 만들며 물었다.

“너야 언제나 보기 좋지. 이델라, 정말 예쁘다.”

“와아, 전 평상복이지만요!”

이델라가 기뻐했다.

“술은 안 돼.”

알렉스가 로웰을 가로막았다. 로웰은 잔을 여러 개 꺼내 놓고 술을 따르는 중이었다. 그가 말을 무시하자, 알렉스는 그의 팔을 잡았다.

“야아, 알았어! 말로 하자. 의사도 만나서 확인했어! 괜찮다고 했다고.”

“술 치워.”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그러더니 로웰은 알렉스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둘이 쑥덕거리는데 꽤 사이가 좋았다. 로웰이 이델라랑 잘 다니는 것도 그렇고, 나 빼고 다들 친해진 것 같은데.

하긴 윗사람을 모시고 다니면 짜증 나는 일도 많을 것이다.

내 욕 하다가 친해진 건가?

두 사람은 돌아와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주방에 미리 부탁했는지 카트에 안주까지 놓여 있었다.

이델라는 화분을 가져와서 장미를 꽂고 있었다. 장미를 보니 생각났다. 에드워드가 준 꽃다발은 어떻게 됐지?

“앗, 전하. 장미 꽃다발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어서요. 혹시 버리려고 하신 건 아니죠? 장식에 사용해도 될까요?”

이델라가 물었다.

에드워드가 준 거였다.

“물론이지.”

“잘됐네요! 화원에서도 상품으로 팔릴 만한 애인데, 버리면 아깝잖아요.”

도트가 어디에 보관했기에 굴러다녔는지 모르겠다. 탐스러운 장미를 보고 있으려니 다시 싱숭생숭해졌다.

로웰은 이제 도트를 설득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요? 환자에게 술이라니, 의사가 돌팔이가 아니고서야…….”

“잠깐만요. 쉿, 쉿.”

불평하는 도트에게 로웰이 뭐라고 쑥덕였다. 도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로웰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고개가 흔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췄다.

“그러면 조금만…….”

설득당한 도트가 내 옆에 앉았다.

“왕자님, 조금만 드시는 거예요. 축하주니까요!”

마시는 건 확정된 건가?

축하는 그렇다 치고 나 술 안 좋아하는데.

조용한 왕비궁이 떠올랐다. 혼자 있기는 싫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도 않다.

“와아, 전하. 저 이런 자리 처음이에요. 축하연에선 뭘 하나요?”

이델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난 잔을 들었다.

“모두 정말 고맙고. 우리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할까?”

“와! 건배!”

술은 안 마시면 되니까.

기분이 노글노글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생각을 잊는 데 술이 도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전하, 여행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웰이 물었다.

“여행?”

목소리가 늘어지고 있었다.

“네. 국외 여행. 좀 먼 곳으로 가서, 편하게 시간도 보내고, 저랑 놀기도 하면서 오래 머무는 거요.”

“국외 여행……. 한 번도 안 가 봤어. 여행을 별로 못 가 봤는데.”

방이 조용해진 것 같다.

아닌가? 내 얘기가 아니라 조프리라면. 조프리가 열한 살 이전에 여행을 갔는지는 모르겠다. 이후에 안 간 건 확실한데.

“저도요, 전하. 우리 똑같네요.”

이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행 못 가봤구나. 그럴 만했다. 그녀는 바쁘고 얽혀 있는 문제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약혼자 처리해 줘야 하는데.

이제 호감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이델라는 왕자를 구하는 데 공을 세웠다. 에드워드는 훈장 같은 거 내려 줄 생각 없나…….

“저도 그렇습니다, 전하.”

알렉스가 말했다. 도트가 손뼉을 쳤다.

“앗. 이곳에서 국외 여행 가 본 분은 로웰 님밖에 없네요!”

“아니, 그게 잘못이라는 듯 말씀하시면……. 다들 이렇게 도움을 안 주시면 어떡해요?”

“하지만 로웰 씨가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니까…….”

“왕자님 피곤하게 하지 마세요. 본론으로 들어가시라고요.”

방이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몸에 열이 오르는 건지, 조금 추웠다.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다. 아플 때 혼자인 건 정말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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