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86화 (186/293)
  • 186.

    “왕자님?”

    이상한 기분이었다. 대전에서 에드워드는 이상하게 군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내 편이라는 사실을 귀족들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반역자라고 쫓기던 왕자가 아니라, 에드워드가 아끼는 형제라고.

    내가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가 날 보호하고 있다.

    정말 이상했다. 표정도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에드워드가 날 해치는 것도,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보호하고 있다.

    날 좋아해서.

    왜 속이 이상해지는지 모르겠다. 가슴을 툭툭 치고 있으려니 도트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대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왕자님이 이상하세요.”

    “밖으로 끌려가는 죄인들을 보셨습니까?”

    “예. 제가 있던 문으로 나간걸요.”

    “그자들이 조프리 전하를 음해해 왕을 부추긴 자들이라고 합니다.”

    “뭐라고요? 왜 진작 말씀 안 해주셨어요! 왕자님, 괜찮으세요? 얼마나 충격받으셨을까.”

    도트가 호들갑을 떨었다. 난 가슴 치는 걸 멈추고 도트에게 물을 받아 마셨다. 그래도 속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에드워드 전하가 조프리 전하를 끌어안았습니다.”

    “예?”

    알렉스와 도트가 나를 쳐다봤다.

    “왜?”

    난 당황해서 물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로웰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내 방에 자유롭게 출입할 권한을 받은 몇 사람 중 하나였다.

    “전하께 무슨 일이 있었다고요?”

    “누구요, 전하? 누구한테 무슨 일을 당하셨다고요?”

    로웰의 뒤에서 또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갈색 머리카락과 리본, 동그란 눈이 보였다. 이델라였다. 그녀는 인사도 없이 놀라서 물었다.

    방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어? 나?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데?

    난 일단 인사했다.

    “안녕, 이델라.”

    “예, 안녕하세요! 전하!”

    난 이델라랑 회포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순식간에 나를 빙 둘러싸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도엔 언제 올라왔어?”

    “얼마 전에요.”

    “로웰이랑 다 같이 온 거야?”

    “아니요. 백작님을 따라왔어요. 그보다 전하,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녀는 내가 큰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말했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나를 지지하려고 그런 거야. 내 앞에서 죄인들을 처벌하고, 나와의 우애를 과시했어.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권위를 인정해 줬으니, 귀족들도 나를 대하는 데 주의하겠지. 적어도 반역자 낙인이 찍힌 왕자 취급은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짐작한 사실을 설명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영리했다. 대전에서 왕자 둘이 끌어안고 있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 것이다.

    “그렇군요.”

    로웰이 대답했다. 표정이 애매했다.

    그와 이델라가 시선을 교환했다. 뭐가 걸리는 걸까?

    “왜?”

    이델라는 망설이는 듯했다.

    “괜찮아. 말해 봐.”

    “전하, 사실 저 알고 있어요. 두 분 전하께서 어떤 관계인지.”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뭐?”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니, 이델라가 알 리 없잖아.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침착하려고 했다.

    “아카데미에선 두 분의 사이가 좋다고 소문났지만, 제가 곁에서 봤을 땐 아니었으니까요. 에드워드 전하는 제가 조프리 전하를 의심하도록 이간질하려 하셨어요…….”

    에드워드…… 이간질까지 했냐?

    걱정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이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혹시라도 전하께 밉보일까 봐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사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이델라는 똑똑했다.

    “에드워드 전하께 무슨 약속을 하신 거예요? 바움쿠헨령을 둘러싼 병사들이 물러나는 걸 봤어요. 얼마 후엔 전하에 대한 수배령이 거둬졌고요. 백작님은 전하께서 ‘에드워드 전하를 설득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에드워드 전하는…… 전하의 적이잖아요.”

    그렇게 보이는 걸까? 그렇겠지. 실제로도 적이었다.

    “지금은 아니야.”

    난 설득력 있는 말을 덧붙이려고 했다. 근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 수도로 올라가자마자 크래커 공작의 사병들에게 붙들려 성으로 끌려왔어요. 이대로 죽나 싶었는데 그레이 크래커가 전하를 뵙게 해 주겠다고 말하더라고요. 가 보니까 전하께선 침실에 누워 계셨고, 에드워드 전하가 간호하고 계셨어요.”

    로웰이 문득 말했다. 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주치의가 전하를 진찰했고, 보살핌에 소홀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전 안심했지만, 솔직히 에드워드 전하가 믿을 만한 분은 아니죠.”

    어?

    좋은 말을 해 주려는 줄 알았는데 결론이 이상했다. 도트가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왕자님을 해치실 순 없을 거예요! 백성들이 들고일어날 텐데요!”

    “지금 당장은 그렇겠죠. 전하의 인기가 최고조니까요. 하지만 장기적으론 어떨는지.”

    “전하께서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알렉스가 뒤늦게 이해하고 물었다.

    “지금 폐하의 대리인은 에드워드 전하시니까요. 폐하께서 살아 계실까요? 전 반반이라고 봐요. 살아 계신다고 해도, 에드워드 전하가 조금만 불경한 마음을 품어도 언제든 잘못되실 수 있지 않나…….”

    로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불경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어느 쪽이든 에드워드 전하의 권력은 강해질 일만 남았다는 거죠.”

    이델라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전하, 에드워드 전하께 무슨 약속을 하셨나요? 어떤 대가를 치르셨어요?”

    역사서에 나올 법한 협상을 떠올리는 것 같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심각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약속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어디로도 가지 않겠다고…….”

    “예?”

    * * *

    의사가 들어와서 왕자를 진찰했다. 이델라와 로웰은 왕자의 침실을 나갔다.

    “그게 무슨 조건일까요?”

    이델라가 물었다.

    그녀는 사실 로웰에게 유감이 많았다. 그가 그녀만 빼놓고 조프리 왕자를 구하러 왕성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로웰과 알렉스 등이 사라진 뒤에야 그 사실을 알고 망연해졌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힘을 쓸 수 있는 소수만 가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성적으론 납득했으나, 그녀도 왕자를 왕성에서 구출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도 안 된다는 거지. 쓸모없는 인원이라도 판단했다는 거지. 왕자 전하께서 잘못되셔도, 먼 곳에서 소식이나 들으라는 거지!

    분노와 공포감에 휩싸여 있던 그녀는, 조프리 왕자가 모든 일을 해결한 뒤에야 백작과 함께 수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조프리 왕자는 약속대로 해냈다.

    바움쿠헨 경이나 로웰은 믿지 않았지만, 결국 에드워드 왕자를 설득해 낸 것이다.

    이델라는 백작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그녀는 조프리 왕자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았다. 왕자의 능력과 인품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능력까지 출중하면, 이상한 판단을 해 버릴 때도 있는 것이다.

    왕자는 왕성에 자신을 희생하러 갔다.

    이델라는 그 점에 있어서는 로웰과 생각을 같이했다. ‘나 하나쯤 희생해서 괜찮아진다면.’ 그렇게 판단하셨던 거겠지. 그런 분이니까.

    에드워드 왕자를 설득하고 말고를 떠나 위험한 길이었다. 어린아이도 죽을 길임을 알 것이다. 실제로 조프리 왕자는 죽었다 살아나지 않았는가? 왕자는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왕자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 왕자가, 에드워드를 무슨 조건으로 설득했을까?

    목숨 외의 모든 것을 내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이델라는 생각하고 있었다.

    “조프리 전하는 이용 가치가 있는 분이니까요.”

    “계속 왕성에 계셨잖아요. 뭔가 알고 계신 게 없나요?”

    “전하 곁을 떠날 수 없어서…….”

    이델라는 혹시 왕자 방에 감금됐다는 소린가 싶어서 깜짝 놀랐다가, 로웰이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는 걸 봤다. 민망해하고 있었다.

    전하를 너무 걱정해 다른 일은 생각도 못 할 지경이었다는 게 아닌가?

    잘생기긴 해도 신뢰 가는 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달라 보였다. 그녀를 혼자 두고 간 악감정을 잊게 할 정도였다.

    로웰은 외모와 달리 충실한 사람이었다. 역시 사람은 겉보기로는 모르는 법이다.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해요.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로웰이 부끄러워하며 부탁했다.

    “그런 말씀은 하실 필요 없어요. 전 어디를 조사하면 될까요?”

    “같이 시장에 나가 볼까요? 왕성의 일은 전하의 시종과 기사에게 맡기고요.”

    “네. 아카데미에도 편지를 보내 볼게요. 제 친구는 여러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니까, 뭔가 들은 소문이 있을지 몰라요.”

    “저도 집안사람들을 만나 봐야겠네요.”

    로웰은 먼 곳을 보며 한숨 쉬었다.

    이델라는 그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랐으나, 그 우울한 태도 때문에 그녀의 집이 떠올랐다. 약혼자에게 저질러 버린 말들도.

    왕성으로 달려오면서, 그녀는 자신이 왕자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바움쿠헨 백작이나 로웰과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왕자에게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싶은 것이다.

    공부를 해야 해. 그녀는 절실하게 느꼈다. 그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신분 말고는.

    그녀는 왕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었는데 왕자는 그녀를 영리한 데다 결단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왕자가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자신이 정말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충성심은 로웰처럼 부유하고 알렉스처럼 신분이 따라 주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덕목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기 자신조차 돕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품은 마음과 달리, 언제나 현실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빚…… 갚을 수 있을까.

    화려한 왕성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조금 침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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